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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말 · 일제시대 한국 교회와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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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2-17 ㅣ No.658

[기조 강연] 한말 · 일제시대 한국 교회와 선교회

 

 

1. 한말 · 일제시대의 한국 교회

2. 선교회의 한국 진출과 활동
3. 한국 교회와 선교회


1. 한말 · 일제시대의 한국 교회

한국 교회가 설립된 지 100년이 지난 1876년 조선 정부는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이후 1880년대에는 미국을 비롯한 歐美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특히 1882년에 미국과 맺은 수호조약은 조선이 서양국과 체결한 최초의 조약으로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이 묵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886년에 체결된 韓佛條約은 선교사들이 護照만 지니면 국내 어디나 자유롭게 다니며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치외법권을 보장해주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개항지에서 본당 조직을 발전시킴은 물론, 개항지 이외의 지방에도 정착하여 본당을 건설해 나갔다. 그 결과 1882년에는 서울에 鐘峴本堂(현재의 명동)이 처음으로 설립되었고, 이어 제물포(1889), 원산(1887), 부산(1890), 평양(1896), 목포(1897) 등 지방의 주요 도시에 본당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지방 관리와 선교사, 지방민과 교인들 사이의 분쟁인 敎案이 발생하였다. 교안은 시기적으로 1890년대 후반부터 1904년 사이에 가장 빈발했는데, 1900년을 전후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난 海西敎案과 1901년 제주에서 일어난 濟州敎案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가운데 1899년에 敎民條約이 체결되어 한국인에게도 신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1904년에는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宣敎條約이 체결되어 선교사들의 지방 정착권이 허용되었다.

이렇게 하여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개화기의 천주교회는 선교 활동과 함께 언론과 교육 활동을 통해 개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먼저 1906년 10월에는 순한글의 <京鄕新聞>을 창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동참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 올바른 교리 지식과 시사 문제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서울의 仁峴學校(1882) 등 각지에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전개한 결과, 1910년에는 천주교계 학교가 124개로 증가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정규 학교뿐만 아니라 교리 학교 등 비정규 학교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 학교들의 설립 취지가 대부분 國泰民安, 保君輔國, 國權回復이라는 점에서, 당시 한국 교회가 교육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885년 10월에는 방인 사제의 양성을 위해 예수성심신학교를 부엉골에 세웠고, 같은 해 3월과 7월에는 서울에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905년 乙巳勒約이 체결되고, 1910년에 합병이 되면서 한국은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이 시기 천주교회는 국권수호운동과 독립운동에 전교회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평신도들은 개인적으로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즉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한 徐相燉(아우구스티노)은 열렬한 천주교 신자였고, 安重根(토마스)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하였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 때에는 교회 당국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대구의 신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했으며, 황해도 殷栗의 尹禮源(토마스) 신부를 비롯해서 江華, 廣州 등지에서도 천주교인이 만세 시위의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 시기 일제의 종교 통제는 해가 거듭될수록 노골화되어 1915년 3월에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여 그리스도교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 및 종교 의식을 금지시켰고, 8월에는 <布敎規則>을 제정하여 성당의 건립과 선교 등 교회 활동을 견제하였다. 또 합병 이후 神社 제도를 정비하는 가운데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국 교회는 1925년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을 통해 조선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여갔고, 1931년에는 ‘조선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행사와 기념 사업을 전개하여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 한국교회는 《경향잡지》(1911)를 비롯하여, <별>(1927), <천주교회보>(1927), 《가톨릭청년》(1933), 《가톨릭연구》(1934) 등을 간행함으로써 문화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국가의 모든 체제를 전시 체제로 전환하는 가운데 종교계에도 협력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어 1941년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국내의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거나 구금하였고, 또 조선 교회의 교구장들을 일본인으로 대체시켜 갔다. 그 결과 광주지목구는 1942년에 맥폴린(O. McPolin, 林) 교구장을 대신해 와키다(脇田) 신부가, 대구대목구는 무세(G. Mousset, 文濟萬) 주교를 대신하여 하야사카(早坂) 주교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울대목구의 경우는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비밀리에 동경의 교황 사절을 통해 1942년 1월 盧基南(바오로) 신부를 서울교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최초의 조선인 교구장 주교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말 ? 일제시기의 한국 교회는 굴곡의 민족사와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어 왔다. 그렇지만 1910년에 하나였던 교구는 1911년에 대구대목구, 1920년에 원산대목구, 1927년에 평양지목구(1939년 대목구로 승격), 1928년에 연길지목구, 1937년에 전주지목구(1931년 감목대리구)와 광주지목구, 1939년에 춘천지목구가 신설되었고, 1940년에는 원산대목구가 德源免屬區와 함흥대목구로 분리되는 등 8개로 늘었으며, 1910년에 73,517명이었던 신자수와 54개였던 본당수는 1944년에 179,114명과 163개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사제수는 1910년에 한국인과 외국인을 합쳐 61명이었던 것이 1944년에는 234명으로 거의 4배나 늘어나 있었다.


2. 선교회의 한국 진출과 활동

위의 통계와 같이 한말에 이어 일제시대에도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시기 한국에 진출한 선교회의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즉 파리 외방전교회가 단독으로 맡았던 조선 선교를 베네딕도회(1909), 메리놀 외방전교회(1923), 골롬반 외방선교회(1933)가 진출하여 함께 사목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발전을 견인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1) 파리 외방전교회

1660년경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목적으로 프랑스에서 설립된 파리 외방전교회는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뒤 소속 회원인 브뤼기에르(B. Bruguiere, 蘇) 주교가 초대 대목으로 임명되면서 한국에 진출하였다.1) 이후 모방(P.P. Maubant, 羅) 신부가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이래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기 전까지 4명의 주교를 포함한 20명의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중 12명이 박해 때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병인박해로 인해 조선을 떠났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다시 입국한 것은 1876년이었다. 1876년 5월 블랑(G.-M.-J. Blanc, 白圭三) 신부와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鎭) 신부의 입국이 최초이며, 이어 1877년 9월에는 리델(F.C. Ridel, 李福明) 주교가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 ? 두세(C.E. Doucet, 丁加彌) 신부와 함께 입국하였다. 그러나 1878년 1월 28일 리델 주교가 체포되어 6월에 추방되었고, 1879년 5월에는 드게트 신부가 체포되어 9월에 중국으로 추방됨으로써 박해가 재현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체포된 선교사들이 예전과 같이 처형되지 않고 추방된 것은 개항 이후 한국 사회가 보여준 커다란 변화였다. 그 결과 새로운 선교사들의 입국이 계속되었는데, 드게트 신부가 추방된 이듬해 11월에는 뮈텔(G.-C.-M. Mutel, 閔德孝) 신부와 리우빌(L.N.A. Liouville, 柳達榮) 신부가 입국하였고, 1883년 4월에는 추방되었던 드게트 신부가 블랑 주교의 요청에 의해 재차 입국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82년에 한미조약이 체결되고, 1886년에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고,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들은 1909년 베네딕도회가 새로 진출할 때까지 한국 교회의 본당 사목 ? 교육 사업 ? 사회 복지 사업 ? 신학생 양성 등 모든 것을 맡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1911년에는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하여 일제 말기까지 양교구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2) 베네딕도회

한말의 천주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프로테스탄트와의 경쟁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는 교육과 의료 사업을 통해 한국민에게 접근해 갔고, 그 결과 단기간에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특히 이들은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장래의 발전을 도모했는데, 천주교회에서는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인해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할 여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뮈텔 주교는 한국 내에서 교육 사업을 맡아 줄 수도회를 초청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09년 2월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백동(혜화동)에 땅을 매입하여 수도원 건물을 신축한 후 1910년에 실업학교인 숭공학교를, 1911년에는 사범학교인 숭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를 위임받아 덕원을 중심으로 함경남북도와 간도 지역의 본당 사목 및 신학교 운영을 담당하였다. 이후 베네딕도회의 관할 구역은 1928년에 간도 지역이 연길지목구로 분할되었고, 1940년에는 원산대목구가 덕원면속구와 함흥대목구로 재분할되었는데, 이러한 변화 속에서 베네딕도회는 함경도 지역의 교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편 덕원 수도원과 연길 수도원에서는 출판 시설을 갖추어 잡지 《소년》을 비롯하여 교리 문답서, 성가집 등 교회 서적을 인쇄 보급하였으며, 특히 이들은 1930년대 초부터 전례서의 한글 번역을 시도하여 1936년 《미사경본》을 간행하였고, 1938년에는 《가톨릭성가》를 발행함으로써, 한국 신자들이 전례에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3) 메리놀 외방전교회

1920년대 들어 평안도 지역의 교회 상황은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이 지역에는 5개 본당과 50여 개의 공소가 있었으나, 5명의 신부가 이것을 모두 담당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또 교회 외적으로는 천주교보다 먼저 평안도에 진출한 프로테스탄트의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어 교세상 천주교의 10배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안도 지역은 사목상 새로운 조치가 필요했고, 이에 뮈텔 주교는 1922년 교황청에 평안도의 분할 문제를 의뢰하면서, 이 지역을 미국의 외방전교회에 위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를 추진하였다.2)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11년 미국에서 동아시아 전교를 주된 목적으로 창설된 선교기관이다. 이들은 이미 중국과 만주 지방에서 크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언제든지 한국으로 진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22년 11월 교황청으로부터 평안도에 대한 포교권을 위임받은 메리놀회는 1923년 5월 번(J.P. Byrne, 方溢恩) 신부를 교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한국에 파견하였고, 이어 여러 신부들이 도착하는 가운데, 1927년 3월 17일 정식으로 평안도 지역을 서울대목구에서 분리하여 평양지목구로 설정하고 초대 지목구장에 번 신부를 임명하였다.

평양 인근의 서포에 본부를 설치한 메리놀회는 본당 사목과 한국인 성직자 양성은 물론, 1932년 6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라는 방인 수녀회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가톨릭운동’(Catholic Action)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평신도들이 교회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고, 문서 전교를 위해 1934년 1월에는 《가톨릭 연구 강좌》를 간행하기도 하였다.3)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42년 6월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강제 송환될 때까지 평안도 지방에는 21개의 본당이 설립되었고, 방인 신부 8명과 방인 수녀 39명이 배출되었으며, 신자수는 26,424명으로 증가하였다.

4) 골롬반 외방선교회

1916년 아일랜드의 갤빈(Edward Galvin) 신부에 의해 창설된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국경과 언어 ? 종족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증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중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전개했는데, 한국에는 1933년 10월 29일에 맥폴린 신부 등 10명이 처음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진출하기에 앞서, 대구대목구의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는 1931년 5월에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설정하고, 초대 감목대리에 金洋洪(스테파노) 신부를 임명하였다. 하지만 전라도 감목대리구는 넓은 관할 지역에 비하여 신부가 부족했고, 또 전라남도의 경우는 섬과 오지가 많아 전교활동비가 많이 필요하였다. 이에 재정이 충분하지 않았던 대구대목구에서는 전라남도를 인적 ? 물적 자원이 풍부한 선교 단체에 이양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1933년 10월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이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라도 감목대리구는 1934년 5월 10일에 전주 감목대리구와 전남 감목대리구로 나뉘어져, 전주의 경우는 한국인 신부들이, 전남의 경우는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사목하게 되었고, 1937년 4월 13일에는 전남 감목대리구가 광주지목구로 승격되면서 맥폴린 신부가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39년 4월에는 춘천지목구가 설정되어 퀸란(T. Quinlan, 具仁蘭) 신부가 초대 지목구장이 되면서, 골롬반회는 강원도 지역의 사목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3. 한국 교회와 선교회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일제시대 한국 교회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서울 ? 경기와 충청도, 대구와 경상도 지역을 맡았고, 베네딕도회가 함경도 지역을, 메리놀회가 평안도 지역을, 골롬반 회가 전라남도와 제주도 ? 강원도 지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물론 황해도는 1928년 1월에 감목대리구(1942년 폐지)로 설정되어 金命濟(베드로) 신부가 담당했고, 전라북도의 경우는 1931년 5월 이후 감목대리구로 설정되어 김양홍 신부가 사목하다가 1937년 4월 전주지목구로 승격되면서 최초의 방인 지목구가 되지만, 대체로 일제 시대의 한국 교회는 외국 선교회에 의해 이끌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 말기가 되면서 이들 선교사들은 추방되거나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심지어 간첩 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선교사도 생겨났다.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 전쟁 때에는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살해되거나 ‘죽음의 행진’을 겪기도 하였다.4)

이러한 점에서 파리 외방전교회를 비롯한 선교회들은, 물론 나름대로의 아쉬움과 한계점도 있지만, 박해시대 이래 봉사와 희생 속에서 한국 교회의 유지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200여년의 한국 교회사에 있어 이들의 역할은 한국 교회를 떠받친 하나의 축이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이들의 노고와 희생을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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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조선대목구를 맡게 된 것은 1833년 8월이다.

2) 뮈텔 주교는 처음에 베네딕도회에게 평안도 지역의 사목을 제의했었다 하지만 이미 평안도 지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와의 경쟁이 무리라고 판단한 베네딕도회에서는 평안도 대신 함경도 지방의 전교를 선택하였다.

3) 《가톨릭 연구 강좌》는 1934년 7월부터 《가톨릭 연구》로 개칭 간행되었고, 1937년 1월부터는 《가톨릭 조선》으로 바뀌어 발행되다가 1938년 12월에 폐간되었다 이 잡지에서는 문맹퇴치운동과 문서 보급, 한글 교육과 학교 설립 문제 등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4) ‘죽음의 행진’이란 북한군에게 체포당한 천주교 외국인 성직자 · 수도자들이 겪은 고난으로, 남한에서 끌려간 성직자 · 수도자들이 한 갈래, 덕원 · 함흥교구의 성직자 · 수도자들이 한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번 주교와 비에모 신부를 비롯한 남한에서 끌려간 성직자 ·  수도자들은 1950년 10월 31일 만포에서부터 중강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많은 포로들은 죽음의 행진 도중 하느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5) 이와 관련하여 명동 본당에서는 2002년 12월 박해의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교회를 위해 노력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보은하는 의미로 ‘한국 순교 성인 현양비’를 제작하여 2003년 6월 21일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제막식을 거행하였고, 2007년 9월 30일에는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준비위원회’에서 평양교구 선교에 기여한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감사하는 표시로 ‘평양교구 선교 감사비’를 미국 뉴욕 주에 있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에 마련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교회사 연구 제29집, 200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염수정 주교(한국교회사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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