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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의 해 신앙의 재발견8: 생명의 존엄성과 창조질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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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22 ㅣ No.399

[가톨릭신문-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공동기획 신앙의 해, 신앙의 재발견] (8) 생명의 존엄성과 창조질서

생명 중요성 공감해도 선택은 세속화된 잣대로


지난 1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생명을 위한 행진’에 참가한 젊은이들이 낙태를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생명은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심지어 신앙인조차 상당수가 낙태를 찬성 혹은 조건부 찬성하고 있다.


현대인들의 일상에서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에 가장 심각한 모순을 보이는 분야가 바로 생명윤리이다. 그나마 생명윤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지 못하거나 ‘내 삶의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교회는 한결같이 ‘인간생명의 존엄성 수호’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지만 일반인들은 물론 신자들의 관심사 또한 ‘생명’에 가닿지 않고 있다. 사회에 만연한 생명윤리 문제들을 단순히 시대적 착오 혹은 해묵은 논쟁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더 이상 교회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 신자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실태를 적극적으로 인지하고, 사목적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데에는 여전히 미지근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교회 안에서도 실천되지 않는 구호는, 세상 밖으로 외쳐도 힘을 얻지 못한다.

생명윤리는 모든 인간이 살아 숨 쉬는 모든 일상과 연관된다. ‘신앙의 재발견’을 올바로 이루기 위해 인간생명과 창조질서의 수호에 대해 성찰하고 보다 구체적인 실천을 이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세속주의의 가장 심각한 결과는 생명 파괴

생명윤리와 관련한 각종 논쟁들은 현재 범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돼 있다. 게다가 의·과학 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윤리 문제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지만, 이와 관련한 교회의 가르침은 단순히 ‘종교적인 입장’으로 치부되는 흐름이 거세다.

인간생명이 존엄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생명을 수호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실제 삶 안에서는 인간생명을 훼손하는 ‘죽음의 문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넘쳐난다. 생명문제야말로 세속주의, 상대주의, 개인주의 등의 흐름에 가장 쉽게 휩쓸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릇된 가치관들은 생명권이 가장 기본적으로 존중돼야 할 권리가 아닌, 상대적으로 선택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지난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전 세계 추기경들도 새 천년기 교회의 도전과 사명을 논의한 특별회의에서 세속화 및 상대주의와 관련한 문제들은 생명윤리 영역에서 가장 심각하게 두드러진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교황은 “오늘날 윤리문제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해결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나타나며, 특히 생명공학 발달로 인한 생명윤리의 영역에서 잘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선출 직후 가톨릭신문사가 한국 가톨릭 신학자 100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서도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더 이상 전통 교회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 생명윤리의식이 꼽혔다.

실제 매스미디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생명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들은 인류 복지 증진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과 질병에 대한 편파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이른바 ‘삶의 질’을 내세우면서, 유용성과 효용성 등의 경제논리만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생명을 담보로 이윤을 추구하고, 특별히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생명은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생명을 일종의 멍에로 생각해 선택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삶의 질’을 명목으로 생명의 기본 가치를 훼손하는 사회규범과 법률까지 제정 혹은 적용하려는 시도들도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장봉훈 주교는 “생명윤리의 세속화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과 권위가 현저히 떨어졌다”며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 증진을 위한 교회의 노력이 단지 종교적 입장으로만 이해되어 외면 받고, 보편성이 없다는 오해까지 받는 지경이 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신자 생활에도 죽음의 문화 만연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온갖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를 ‘죽음의 문화’로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지체 상해, 육체와 정신을 해치는 고문, 심리적 억압,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노예화, 매매춘, 인신매매, 굴욕적 노동 조건 등도 모두 하느님을 극도로 모욕하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죽음의 문화는 현대인의 삶 안에도 여전히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대표적인 죽음의 문화로는 우선 자살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10년 기준으로 인구 10만 명당 33.5명에 이르렀다. 하루 평균 42.6명의 자살률은 OECD 회원국 평균치인 12.8명보다 2.6배나 높다. 지난 2003년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자리에 오른 후 8년째 1위를 지키는 모습이다. 최근 10년 동안 청소년의 사망원인 가운데 자살이 차지하는 비율도 2배로 급증했다. 최근 12년간 90세 이상 인구의 자살 사망률이 3.6배나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자살통계 정도를 제외하면, 우리사회에서는 생명윤리의식과 관련해 현 실태를 명확히 들여다볼만한 통계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생명윤리의 중요성에 비해 실태를 파악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만드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특히 낙태율에 관해서는 사회적 조사가 더욱 부족한 형편이다. 수년 전 자료이긴 하지만, 일부 단체 등의 조사에 따르면 한 해 우리나라에서 자행되는 낙태는 150~200만 건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2008년 실시된 산부인과 조사에 따르면, 조기낙태약인 응급피임약을 처방받은 여성 가운데 30%가 피임 실패로 낙태를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응급피임약 복용자들의 80%는 미혼여성이고, 그중 70%는 20대로 조사됐다. 지난 11월 한 결혼정보회사가 실시한 혼전순결 관련 설문에서는 남성의 82.9%, 여성의 64.3%가 혼전순결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

2009년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가 실시한 이른바 안락사 허용에 관한 여론조사에서는 성인 남녀 88.3%가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안락사에 대해 찬성한다고 밝힌 응답자 중 43.8%는 환경의 고통 경감을 위해 제도가 필요하다고 응답했으며, 가족의 정신·경제적 부담 경감을 덜기 위해서(28.3%), 환자의 존엄과 품위유지를 위해서(25%)라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이러한 세속화된 잣대들은 신자들의 생활에서도 별 차이 없이 드러난다. 즉 신자들은 교회 가르침에 공감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의 의견 혹은 사회적 흐름을 선택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주교회의 한국사목연구소가 발표한 ‘생명과 가정에 관한 설문조사 보고서’가 나왔을 때 교회에서는 당황하는 움직임이 적잖았다. 신자들의 생명과 가정에 대한 의식과 실천이 일반인들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설문 결과에 따르면 우선 신자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윤리적 지침은 인공피임 금지로 꼽혔다. 신자들은 인공피임의 문제점을 별반 인식하지 못했다. 응답자 중 35.8%만이 인공피임을 반대했으며, 절반 정도는 이미 불임시술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시험관 시술에 반대하는 경우도 응답자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부분적으로라도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은 87.6%로 조사됐으며, 실제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도 34.2%에 달했다.

올해 초 수원교구 복음화국이 교구 홈페이지를 통해 조사한 ‘신앙인의 생명 존중’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공피임과 시험관 아기 시술을 찬성 혹은 조건부 찬성한다는 비율은 응답자의 70.9%와 69.1%로 드러났다. 낙태를 찬성 혹은 조건부 찬성한다는 응답비율도 20.4%나 된다. 이러한 결과는 생명존중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응답이 71.8%, 현 사회의 생명경시 풍조가 심각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97.6%라는 결과와는 상당히 대조된다.

앞서 제시한 안락사 허용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천주교 신자의 87.2%가 찬성한다는 통계가 나온 바 있다. 반대 입장을 밝힌 응답자들도 종교적인 이유(11.8%)보다 자기결정권을 타인이 대신할 수 없음(47.9%)을 더욱 우려하는 목소리였다.


생명은 살아있음 그 자체로 존중

인간은 특별한 자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서 존중받는다.

‘생명’이라는 것은 이른바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즉 생명권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권리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순히 신학적 관점에서만 밝혀진 것이 아니라 생명과학과 철학, 인간학, 윤리학 등 각 학문 분야에서 또한 사회적, 법적 기준으로도 뒷받침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헌법은 물론 법적 판례도 “생명은 한 번 잃으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며, 한 사람의 생명은 전 지구보다 무겁고 또 귀중하고 엄숙한 것이며, 존엄한 인간존재의 근원”이라고 판시하고 있다.

국제적인 관심은 유네스코 설립을 비롯해 유네스코가 발표한 ‘생명윤리 및 인권에 관한 보편 선언’에서도 대표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 선언에서 유네스코는 과학기술 발달이 인간 삶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일부 과학기술은 인권이나 생명윤리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이에 대한 전 세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인간 생명 존엄성의 명제는 삶과 관련한 모든 분야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존중돼야 할 핵심원리이다. 이러한 원리는 시류에 따라 변화하거나 세태가 바뀐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생명윤리는 교회 복음화만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살리는 ‘삶의 윤리’가 돼야 한다.

생명윤리를 경시할 때 인류는 ‘삶의 질’을 논할 자리는커녕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12년 12월 25일, 주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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