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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한일관계: 어긋나는 한일관계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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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16 ㅣ No.227

[경향 돋보기 - 가깝고도 먼 한일관계] 어긋나는 한일관계 왜?


지난 4월 21일 일본의 아소 타로 부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이 침략전쟁에서 숨진 이들을 추도하려고 만든 시설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A급 전범 14명이 포함되어 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일본 각료의 신사참배에 항의해 방일 계획을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써 지난해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방문으로 얼어붙었던 한일관계가 다시 한번 냉각기를 갖게 되었다.

또한, 아사히신문이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전국 유권자 3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우편 여론조사에서,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17%가 ‘강하게 찬성’, 39%가 ‘약간 찬성’이라고 각각 응답해 찬성이 56%에 달했다. 반면, 반대자는 31%에 불과했다. 일본 국민의 과반수가 현직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동의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두 나라의 관계에서 갈등의 시작을 파악하지 않으면 상호 이해가 막히는 것은 물론, 성숙한 개선을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역사교과서 왜곡, 일본군 위안부, 독도 영유권, 망언, 전후 배상 등 민감한 사안이 나오면 불편해지기 일쑤인 채 제자리걸음 상태이다.

일본 보수 정치가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의 적극적 미화는 일반인들 사이에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분위기를 만든다. 이것이 두 나라가 가까워지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오늘날 한일관계가 불편하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그 짐을 물려줄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한일관계는 언제부터 악화되었으며, 그것이 해결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 멸시관의 역사적 뿌리

8세기 일본에서 편찬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집권적 통일국가를 수립하여 천황의 권위를 절대화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4세기경, 주아이(仲哀) 천황의 부인 진구(神功) 황후가 남편 대신 ‘신라에 출병’하여 ‘삼한을 지배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한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말하는데, 이 전설은 이미 많은 연구자에 의해 허구임이 밝혀졌다.

이 시기는 통일국가의 존재조차 부정되어 있는 상태인데 대규모 해외파병이 가능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진구 황후 전설은 ‘일본이 신국(神國)’이라는 신국관을 동반하여 후세에까지 이어지면서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전통적 조선관을 형성시켰으며, 사상적으로는 그 후 일본인의 조선관에 토대를 제공하였다.

일본에서 조선 인식에 대해 큰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이래 7년간 16만의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두 번 상륙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문화적 존경과 함께 조선 멸시관을 심어주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조선 성리학, 도자기, 금속활자 등이 전래되어 유학자를 중심으로 한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문화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을 갖게 되었는데, 1607년 조선에서 처음 파견된 통신사에 대한 열렬한 반응이 그것을 말해준다.

에도시대에는 일본과 조선의 평화적인 국교가 계속되어 쇄국 가운데 조선만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가졌다. 이 시기의 조선관도 양면적이었다. 하나는 당시의 지식층, 특히 유학자는 조선의 학문, 학자를 존경했다는 것이다. 조선 학문에 대한 존경심에서 조선본 서적의 복각이 활발하였다. 조선인 또는 그 자손들이 번(藩 : 에도시대에 봉건 영주가 지배한 지역)의 교수로 초빙되거나 승려로 존경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인이 모든 조선인, 조선문화를 존경한 것은 아니다. 조선문화의 일면, 특히 봉건적 질서의 형성에 이바지한 주자학을 존경하였다. 일본 지식층 가운데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유학자가 조선의 학문이나 학자에게 경의를 표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존경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존재했던 또 다른 태도가 조선 멸시관이다. 일본의 건국 신화나 전설에 근거하여 우월한 지위를 강력히 주장한 것은 일본의 국학자들이었다.

국학자는 일본 고전의 우수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연구하고 신국(神國)일본의 모습을 그려냈다. 국학자가 고전 연구에서 조선에 대해 생각한 것은, 아주 먼 옛날, 일본의 신이나 천황이 조선을 지배하고, 때로는 일본의 신이 조선의 신 또는 왕이 되었고, 조선의 왕이 일본에 복속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한 국학자들의 조선관은 후대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곧 막부 말기의 조선 · 아시아 침략론의 길을 열고, 메이지 정권 성립 이후의 조선 침략 정책을 용이하게 만드는 사상적 토양이 된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군사적 우월감을 심어주었으며, 조선민족에 대한 멸시감은 어느 시기보다 강렬하게 되었다.


계획적인 조선 침략 과정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1868년 천황을 정점으로 한 신정부가 탄생하여 근대 일본이 시작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구미의 근대문명과 기계제 공업의 도입에 적극적이었고,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추진했다. 그 사이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일본의 입장은 구미에 대해서는 추종적, 타협적이었고, 주변국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자세를 보였다.

신정부는 구 막부가 외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1871년 이와쿠라 도모미를 전권대사로 하는 구미사절단을 파견하여 조약개정을 타진하였다. 그러나 조약개정은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 정책이 불가결함을 통감하였다.

메이지 정부는 주변국과도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과의 관계는 1811년 이래 통교가 중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쓰시마(대마도)를 통해 조약 체결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여 쇄국정책을 고집하고 있었고, 일본이 개국하여 서양과 국교를 연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무력에 의해 개국을 요구하자는 정한론자가 세력을 얻었다. 이들은 국내의 반정부 움직임을 조선 침략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정한론은 징병령에 대한 사족(士族)의 불만과 농민소요의 빈발에 따른 내란의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대외강경책이었고, 동시에 만국이 대치하는 국제상황 아래서 조선 침략을 통해 일본의 국권을 신장시키려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구미 견문을 마치고 돌아온 사절단은 나라 안을 다스리는 일이 급선무라며 이를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조선 정복은 일단 취소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정한파는 1873년 일제히 사임하고 정부를 떠났다.

그 후 1875년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조선연안을 측량한다는 구실로 강화도에 들어왔다가, 조선 측이 포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사실상 일본 정부가 승인한 계획적인 도발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을 압박하여 이듬해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여 조선 침략의 제1보를 내딛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조선 삼키기 작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17세기 후반의 조선 멸시관, 막부 말기의 조선 침략론, 메이지시대 초기의 정한론, 그리고 이후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전후 처리의 문제점

근대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한 이후, 일본의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국가주의와 함께 대외팽창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결과 타이완을 식민지로 확보하여 국제사회에 후진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하였다. 이어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이를 발판으로 강제병합을 감행하고 대륙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대외 침략전쟁을 확대해 갔으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반격으로 패망하였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고, 9월 2일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일본의 전후 처리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첫째, 일본의 가해자 의식의 부재이다. 일본은 아시아인이 일본의 침략주의로 겪은 막대한 고통을 외면하고, 오히려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국이라는 점만을 강조하였다.

둘째, 전쟁 책임의 부재이다. 일본 스스로가 피해자의 대열에 섬으로써 과거 침략 행위의 진상이나 피해 파악을 외면하고, 과거 역사에 대해 특별히 책임질 일이 없다고 강변하였다.

셋째, 대외적 배상의무를 회피하였다. 일본의 전후 보상은 군국주의 정책 수행 과정에 참여했다가 피해를 당한 자국민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일본 침략주의에 희생당했던 각국 피해자의 고통은 외면당했다.

넷째, 일본의 지식인, 정치가들도 내면에서부터 일본사회를 반성하는 작업을 하지 못했다. 독일에서 정치적으로 반성하고, 지식인이나 학생 운동으로 과거의 극복을 위해 노력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일본 정부는 전후문제 청산에 부정적이며, 보상 청구에 대해서는 한일청구권과 경제협력협정으로 이미 끝났으므로 고려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청구권의 교섭 당시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과거를 청산하고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가 요구하는 철저한 조사와 진상규명에 소극적이며 책임을 축소하고자 사실을 은폐하였다.


어긋난 한일관계의 근본적 원인 세 가지

전후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한일관계가 회복되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 극동 국제군사재판의 한계이다. 일본의 패전은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면서 이루어졌다. 일본에 진주한 연합국은 1946년 5월 극동 국제군사재판을 열어 전범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였다.

A급 전범으로 28명이 선정되었으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정신이상자로 석방되었으며, 25명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전범 18명 가운데 5명이 옥사하고, 13명은 연합국의 점령이 끝난 1952년 이후 단계적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쇼와(昭和)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다. 이 재판의 핵심은 전범 처벌에 있다기보다, 미국의 전후 일본 점령정책의 일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 추궁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만약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 한국에서의 ‘인도(人道)에 관한 죄’가 추궁되었다면 당연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문제가 되고, 그 안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 강제 연행과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 등의 죄상이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일본의 국제적 전후 처리의 기본틀을 제시한 것은 1951년 9월 8일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그러나 이 조약에서는 일본이 가해자, 침략자의 입장이 아닌, 전후 냉전의 대미 협력자의 입장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과거의 침략전쟁에 대한 철저한 징벌과 배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국을 강화조약에 참가시키지 않은 것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고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며,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공헌했다는 일본인의 제국주의적 역사 인식을 전후에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셋째, 한일기본조약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관련한 과거사 청산 문제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법률적으로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한일 간의 과거사 청산 문제의 초점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과정에서 체결된 구 조약의 무효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있다.

한국 측은 1910년 한국병합조약과 이 조약에 이르기까지 체결된 구 조약들이 일본의 강압적 무력으로 강요된 만큼 원칙적으로 무효이고 불법이라는 점을 주장하였다. 반면, 일본 정부는 한국병합조약과 그에 입각한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가 당시에는 유효하고 합법적이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무효가 되었다는 입장을 유지하였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은 군사정권에 의해, 본래의 중심 현안이 되어야 할 과거사 청산 문제는 유보된 채, 경제협력자금의 수수를 규정하는 문서로 탈바꿈되어 버렸다.

전후 일본의 가장 큰 잘못은 아시아에 대한 잔학행위에 대하여 솔직하고 효과적인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은 데 있다. 과거사 청산 문제는 일본사회가 극복해야 할 커다란 과제이다.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국제적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최혜주 아녜스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일본 동경대학교에서 한일관계사 연구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근현대 한일관계와 국제사회」(공저), 「근대 재조선 일본인의 한국사 왜곡과 식민통치론」, 번역서로는 「일본 망언의 계보」, 「일본의 근대사상」, 「조선잡기」, 「일본인의 조선관」, 「아시아 태평양 전쟁」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3년 8월호, 최혜주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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