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4: 전후 복구, 그리고 천주교의 역할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27 ㅣ No.710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4) 전후 복구, 그리고 천주교의 역할


기도와 연대로 폐허가 된 땅에 희망의 싹 틔우다



사진제공=가톨릭구제회


대문 옆에 ‘북동천주교회 무료급식소’라고 적혀 있고, 그 위에는 C.R.S.(Catholic Relief Services)라고 표기돼 있다. 그 앞에는 양푼이나 밥솥, 대야 등을 든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다. 대문의 작은 쪽문 사이로 뒷짐을 진 한 아낙네가 보인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사 천 노엘 신부에 따르면, 1956년께 제16대 광주 북동본당 주임인 마이클 힐리 신부가 CRS의 지원을 받아 이 무료급식소를 설립 운영했으나 재원 부족으로 몇 달 만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또 다른 사진을 보자. 1950년대 초, 한국에 파병된 미군들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과 함께 걷고 있다. 겨울 김장거리를 마련하러 가는 참이다. 김장 소식을 듣고 어디서 빌려왔는지, 미군들이 달구지를 몰고 왔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미군들이 환하게 웃는다. 당시 대구에 주둔하던 미군들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수녀원을 많이 지원했는데, 특히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보육원 원아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대 초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대구수녀원의 수도자들이 미군과 함께 김장거리를 준비하러 가고 있다. 전쟁 당시 대구수녀원 보육원은 미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진 출처=「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888-1988」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만 남기고
 
전쟁은 상처만 남겼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국토는 3년간 총격과 폭격에 잿더미로 변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산가족만 514만 명이 생겨났다. 전쟁미망인 20만 명, 고아도 10만 명이 넘었다.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였다.

그런데도 정부는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눈을 돌리지 못했다. 교회는 세계 교회에 한국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지원과 연대를 호소했다. 이 같은 노력은 특히 미국 교회에 집중됐고, 미 교회 또한 정신적, 물질적으로 연대했다.

조광(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는 「교회와 역사」 통권 171호에 실린 ‘6ㆍ25전쟁과 한국 교회’라는 논문에서 “전쟁 당시 미국 교회에선 ‘블록 로사리오(Block Rosario) 운동’, 곧 기도의 띠 잇기 운동을 전개, 한국전쟁 승리를 위한 묵주기도를 바쳤고, 이 같은 신앙적 유대와 격려에 더해 물질적 지원도 이뤄졌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가톨릭사회복지협의회의 가톨릭구제회(CRS)를 통한 원조였다”고 전한다.


가톨릭구제회를 통한 원조

그렇다면 평양교구장 서리 조지 캐롤 몬시뇰이 이끈 CRS는 한국에 ‘얼마나’ 지원했을까. 그 정확한 지원 규모는 안타깝지만, 파악할 수 없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 CRS의 원칙 중 하나였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6,3)는 성경의 가르침대로였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3년이 지난 서류와 사진 등은 폐기했고, 1974년 말 국내에서 철수하면서 모든 자료를 소각했다. 그랬기에 1952년 당시 외원법에 따라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 외원단체로 등록하면서 시작된 한국에서의 CRS 현존 23년의 기록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신문기사 등을 통해 단편적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950년 한 해 동안만 미국의 종교단체와 민간 구호단체에서 국내에 들어온 구호금품 총액이 280만 달러였는데, 이 중 200만 달러가 CRS를 통해 들어온 것이었다. CRS가 1953년 6월까지 한국에 보낸 의약품과 의류는 1130만 달러에 상당했다고 한다. 1946년부터 미군을 통해 들여온 지원 물품까지 합치면 25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1976년 서강대 사회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의 사회발전과 가톨릭 교회의 역할’이란 보고서를 보면, 1946년에서 1963년 사이 연간 원조액은 140만 달러, 1964년엔 350만 달러, 1965년 이후엔 연간 140만 달러가 지원된 것으로 나타나 있고, 혜택을 받은 사람은 모두 75만 명에서 8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CRS의 지원 원칙 중 하나는 ‘현물 지원’이었다. 이들 구호품은 정부나 교회를 통해 배분됐는데, 전쟁 중이나 전후 초창기에는 긴급 식량 구호에 집중되다가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을 찾자 양곡ㆍ의료ㆍ지역 사회 개발 사업 등에 대한 후원 형태로 이뤄졌다.

우선 1950년대엔 양곡 사업과 의료 사업이 집중적으로 추진됐다. 양곡 사업은 모자 보건과 아동 급식, 학교 급식, 근로 지원, 극빈자 구호로 나눠 추진됐고, 의료 사업 또한 비타민제와 기타 의약품 공급, 병원 설립 운영을 위한 원조, 의료 기구 지원 등으로 나눠 추진됐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CRS의 활동은 지역 사회 개발 사업에 집중되는데, 농로 및 농수로 개설과 축산, 저수지 축조, 관개, 주택, 간척, 신용조합 육성 등에 대한 직ㆍ간접 원조가 포함됐다.

이처럼 막대한 지원을 위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미국 가톨릭 교회는 해마다 11월 제3주일 추수감사절을 구호 물품 수집일로, 사순 제4주일을 구호 모금일로 정해 구호 금품을 모아 우리나라를 포함한 해외의 빈국에 지원했다. 또한, 양곡은 CRS가 미국 경제협조처의 승인을 받아 들여온 남은 농산물로 충당했다. 이 같은 CRS의 지원은 한국 가톨릭 사회사업의 모태와 모범이 됐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8일, 오세택 기자]



“전후 CRS 가장 큰 후원 단체, ... 밀가루 먹는 습관도 이때 생겨”


최재선 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 사무국장



최재선 전 사무국장.


“CRS는 6ㆍ25 전후 구호와 복구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전후 민간 단체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단체였습니다.”

최재선(폴리카르포, 74) 전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사무국장은 당시 CRS의 역할을 이같이 평가하고, “당시 국내에 대여섯 개 원조기구가 활동했는데, 전체 원조물량의 70%를 CRS가 감당할 정도로 가장 많이 지원했다”고 전했다.

1970년 5월 CRS에 들어가 4년 8개월간 활약한 최 전 국장은 “제가 들어갔을 땐 이미 큰 개발사업은 중단하고 작은 사업만 하고 있었는데도 전국 수백 개 사업장에 밀가루 50파운드(22.68㎏) 600포씩 보내 소규모 사업, 곧 농로나 농수로, 작은 저수지, 제방 사업 등을 벌이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에 따라 최 전 국장은 거의 일주일 내내 전국 사업장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답사하고 사업 책임자를(주로 본당 신부를) 만나 사업을 결정하고 진행된 사업을 사후 평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를 위한 재원은 미 공법 480호(Public Law 480)에 따라 미국 정부가 수매한 잉여 농산물을 CRS가 들여와 현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 굶주렸을 땐 배를 채워주는 구호 역할에 그쳤지요. 밀가루를 먹는 습관도 이때부터 우리나라에 생겼어요. 그렇지만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간척이나 제방 등 대형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만드는 데 주력했고, 그 뒤에는 소규모 개발 사업을 통해 가난한 주민들이 스스로 자조사업을 할 수 있게끔 하는 데 힘썼어요. 새마을운동이 다른 게 아닙니다. CRS의 자조사업에서 비롯된 것이죠.”

CRS에서도 일했지만, 실은 최 전 국장도 CRS의 수혜자였다. 피란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서울중학교에 재학할 때 아현동성당에서 나눠준 밀가루와 옥수수가루, 분유, 치즈 등을 먹고 살던 기억을 아직도 떠올린다. 1960년대 초반 대학에 다닐 때도 미국에서 보내온 의류를 시장에 가서 줄여 입었다고 한다.

1974년 말 CRS가 철수하자 인성회를 거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에 30여 년간 투신한 최 전 국장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과 연관을 맺지 않을 땐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난한 교회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평화신문, 2015년 6월 28일, 오세택 기자]



2,28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