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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종이책 읽기: 산다는 것 그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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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1-19 ㅣ No.149

[김계선 수녀의 종이책 읽기] 산다는 것 그린다는 것


‘아기의 웃음소리가 천상 소식으로 들린 때가 있었다. 그 웃음소리는 티 없이 맑고 금방 돋아나는 새순 같은 것이었다. 이제 앎의 욕구를 포기하려 한다. 그리하여 아기처럼 온전한 믿음으로 살고 싶다. 나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은 내 안에 있다.’(책머리에서)

책을 읽으면서 인생의 스승들을 만난다. 앞서 의연하게 삶을 살아내신 그분들을 보면서 참으로 감사의 정을 느끼고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감히 삶의 변화에 대한 갈망과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감동이 크면 클수록 더 커진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예술가이신 최종태 선생의 책 「산다는 것 그린다는 것」은 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맑은 겨울날 투명하면서도 차갑도록 명징한 시린 하늘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래서 쉽사리 장을 넘길 수 없었고 앞으로 읽을, 남아있는 장이 아쉬워 조금씩 아껴 읽는 몇 안 되는 책이었다. 인생의 스승이 여기 있구나, 하고 느꼈고 그 느낌들을 책 포럼 팀들과 함께 나누었을 때 어쩌면 그리도 공감하는 게 많던지 그 나눔 또한 보배로웠다. 그리고 과감하게 그 스승의 자취를 찾아 나서게 하였다.

그의 일생은 그림을 성취하는 일과 참삶을 찾는 일, 곧 종교와 예술,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탐색의 연속이었다고 고백한다. 쉰 살에 ‘그림이란 모르는 것’이라는 찰나적인 깨달음 앞에, 또 어떤 날은 환하게 쏟아지는 빛 속에서 빛은 사랑이고 생명이며 기쁨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탐색의 걸음을 계속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종교와 예술이 한군데로 모였다는 것이지만 역시 예술은 알 수 없는 것이고 하물며 하느님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피력한다.

고비고비마다 예술에 대한 깨달음, 하느님과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을 지닌 것은 그의 진정성이 담긴 고백 때문이다. 그는 그리는 일은 기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도와 그림이 둘일 수 없다고 한다. 화가에게 일하는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며 자기 성찰의 시간이고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그냥 과정일 뿐이라고, 사람이 숨을 쉬듯 화가에게 일이란 숨 쉬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예술과 종교, 인생, 그 모든 것이 산다는 것인 것만 같다고 한다.

책에서 보여주는 그의 예술의 길은 구도의 길처럼 그렇게 갈고 닦는 한결같음이다. 그의 작품세계도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조각을 하면서 줄곧 사람만을 만들어왔다고 한다. 현대의 조각가들이 조형미의 탐구에 심취한다면 그는 인간, 정신이 깃든 영혼이 깃든 인간상을 만들어왔다며 거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 함께하는 작품, 즉 조각에 혼을 불어넣는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한결 같게 만들어온 소녀상도 그의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늘 높은 데를 향하고자 하는 그의 추구가 작품으로 우리에게까지 도달하는 것은 당연지사, 한국적인 아름다움도 그리지만 종교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경지는 작품 앞에 서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공감한다.

2011년 ‘구원(久遠)의 모상(母像)’이라는 작품 전시회가 서울에 이어 이곳 대구에서도 열렸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시대도 종교도 초월한 영원한 어머니를 거기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책에서 쓴 것처럼 단순한 어조로 이 전시회 직전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지, 조각이 뭔지를 알기 위해 50여 년 동안 동서고금을 공부하고 세계를 헤맸지만 제대로 답을 찾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야 문득 깨달았어요. 답은 바깥에 있지 않고 내 가슴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하느님과 단순하면서도 숨바꼭질 하듯이 그렇게 만나고 있는 그 노예술가가 풍기는 인생의 향기는 하도 그윽해 절로 옷깃을 여미고 사색에 잠기게 하는 힘을 지녔다. 책을 통해서 글을 통해서 만난 그와 작품을 통해서 만난 그는 하나였다. 솔직하게 자기이야기 풀어내는 재주를 지닌 그는 작품에서도 그렇게 소박하게 그렇지만 인간의 내면에 깃든 영원성을 담아내면서 경계를 무너트린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깨달음 앞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던 분께서 먼 데 계시지 않고 자기와 함께 늘 마주하고 계셨다는 것을 일순간 깨달으면서부터 사물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어둠은 세상의 것이다. 자유는 ‘완전한 항복’에서만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죽음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싶다. 육신적인 죽음, 세상적인 것의 죽음, 그것이 완전한 항복이다. 자유의 나라, 사랑의 나라, 기쁨의 나라. 우리가 다 같이 희구해 마지않는 곳, 그곳이 하늘 나라다. 거룩한 곳이다.”

그가 만났던 그리운 분들을 회고하며 적은 글들에서 우리도 덤으로 그분들과 교유하는 선물을 받게 된다. 법정스님의 부탁으로 길상사에 관음상을 조각하고는 “성모상과 관음상은 영원한 어머니로서 대자대비이고 큰 사랑이며, 맑음과 깨끗함, 고귀함과 온화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여성상”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김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니, 이분들은 진정 죽음을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대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종교와 예술이 분리되는 21세기에 두 분을 만나 종교와 예술, 삶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고백했다. 책을 보면서, 또 그분을 직접 만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월간빛, 2013년 1월호,
김계선(에반젤리나 ·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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