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헤아려주시는 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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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0 ㅣ No.402

[레지오 영성]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헤아려주시는 성모님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5-7) 

 

산후 조리원도 없던 그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마리아는 산파도 없이, 아기를 낳았고, 그나마 배냇저고리는커녕 낳은 아이를 뉠 곳조차 없어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 밥통에 뉘었습니다. 황망하고 처절한 출생의 순간입니다. 

 

언젠가 첫영성체 교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이 왜 가난하게 태어나셨을까?”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건만, 초등부 한 여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너무나 뜻밖의, 그러나 정확한 답변에 순간 멈칫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서 그런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설명하면 예수님의 케노시스(비움)를 설명할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었으니까요. 성령께서는 그 아이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 인간과 같은 조건과 같은 처지를 취하신 주님. 가련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가련한 처지로 오신, 그것도 가련한 인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가련하게 오신 예수님. 오히려 인간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실 정도로 철저하게 인간 가난을 선택하신 주 예수님. 가련한 생활을 하는 목동들보다도 더 가난하게 오셔서, 목동들의 위로를 받으셔야 했던 예수님. 가난한 이들조차 자신의 가난을 부유하다고 느끼게 해주셨던 주 예수님.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그분은 진정 가난하고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위로자이십니다. 

 

 

가난을 물질로만 채우려할 때 교회의 본질 잃게 돼 

 

가난이 뭐가 좋은가? 어떤 이들은 성당에 가면 가난 이야기를 자꾸 해서 가기 싫다고까지 합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이들 중에는 가난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얼굴을 찡그리게 된다고 합니다. 교회가 말하는 가난은 단지 물질적인 가난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빨리 벗어나야할 가난의 상태를 추상적으로 추켜올리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가난은 현세의 물질적인 결핍에서 벗어나, 하느님 풍요로운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주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야고보 사도는 교회의 가난 구제 활동을 믿음과 관련하여 말하기까지 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교회는 물질적인 가난, 궁핍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인생의 결핍을 채워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상황에서 빠지게 되는 유혹에도 주의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교회가 가난 구제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난을 물질로만 채우려고 하면 자칫 교회의 본질을 잃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로 채워주려고 하면 더 많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교회 내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물질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이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풍요한 사람이 더 존중받는 상황이 됩니다. 교회는 주는 이와 받는 이로 갈라지고, 주는 이가 우위에 서게 됩니다. 교회는 구성원들 간의 평등과 일치가 손상됩니다.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가 갈라지지 않도록 익명으로, 십시일반으로 모아 나누려고도 하지만, 교회가 주는 이로 변모될 위험을 안게 됩니다. 물질을 주는 교회와 받는 이로 또 갈라지게 됩니다. 가난은 어느 정도 구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기는 할지언정, 가난한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친근하지도 가족이 되지도 못하고, 가난한 이들을 기죽이고 손님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가난하지 않은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뭇 사람들은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힘이 없어지고, 외출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문해봅니다. ‘내가 전에 가난했던 시절보다 행복한가?’ ‘가난하게 살았을 때보다는 어느 정도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또 자문해 봅니다. ‘그러면, 부유해지면 부유해질수록 행복한가?’ ‘꼭 그렇지 않습니다.’ 

 

회상해 보면, 가난할 때도 나름대로 행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니 무언가를 가지면 그 가진 것에 의지합니다. 그 가진 것이 자신을 풍요롭게 하고, 자신을 뒷받침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가진 것이 친구의 시간을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마음을 사지는 못합니다. 

 

가진 것이 없을 때 함께 떠들고 어울리며 인격적으로 돈독하고 풍요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유형무형한 무엇으로 대신 채워진 다음에는 관계를 맺던 인격 사이에 물질이 자리합니다. 그 유형무형의 무엇을 공유하지 않는 한, 자신이 간직하고 지켜야 할 물질 때문에 벽이 세워지고 서로 간에 간극이 생깁니다. 

 

관계가 냉랭하고 사무적이고 표피적으로 변해 텅 빈방을 홀로 들어가듯이 공허하고 허망해 집니다. 가져서 행복하고 더욱더 돈독해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 거리를 느끼게 하고 멀어졌습니다. 편안한 것이 아니라 외롭습니다. 풍요로워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결핍을 느낍니다. 

 

 

인간은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살도록 만들어져 

 

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가난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가족이나 친지나 다른 어느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갈증과 원의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물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풍요로운 사랑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버린 하느님. 우리가 뭔가를 드려야 할 정도로 연약하고 가난하게 오셔서,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시는 하느님.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으시면 서도,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와 행복을 주시는 아가 예수님. 우리에게 오신 기쁜 소식입니다. 어미 품에 안겨 쌕쌕 잠이 든 아기를 바라보며 부모는 더 이상의 다른 행복을 찾지 않습니다. ‘너는 나의 모든 것?’ ‘너는 나의 참 기쁨’입니다. 

 

‘왜, 많이 먹어 배부른 것보다, 나눠 먹을 때 더 행복한가?’ ‘왜, 혼자 먹을 때보다, 함께 먹는 것이 행복한가?’ ‘왜, 자식이 먹는 것을 보면, 안 먹어도 배부른가?’ 

 

주 예수님은 우리 영신생명의 양식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주 예수님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풍요로운 양식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요한 6,37-38)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주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양식으로 내어주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사도직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2.34) 

 

‘주 예수님, 주님을 뵙는 기쁨을 주소서. 아멘.’ 

‘주 예수님, 주님을 맞이하는 행복을 허락하소서. 아멘.’ 

‘주 예수님, 주님을 모시는 구원에로 이끄소서. 아멘.’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련하게 예수 아기를 낳으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5월호, 심흥보 베드로 신부(서울대교구 삼성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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