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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가정사목] 오늘부터 우리는 연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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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23 ㅣ No.825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준비하며] 오늘부터 우리는 연애합니다



잠든 연애세포를 깨워라

얼마 전 기분 좋은 광고 하나를 보았다. 광고는 신혼이 지난 부부 스무 쌍을 극장에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참석한 부부의 결혼식 동영상이 나온다. 부부들은 당황하면서도 반갑고 민망한 표정을 짓는다. 갖가지 모습으로 평생을 사랑하겠노라 약속하는 오래전 영상에 여기저기서 웃음보가 터진다.

곧이어 스무 쌍 남편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묻는다. ‘사랑의 마법은 풀리지 않았는지, 손을 놓은 적은 없는지, 기쁘게 해주며 살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키스한 적이 언제인지,이 자리에서 다시 고백할 수 있는지….’ 이러한 질문에 많은 부부가 눈물을 닦고 서로 기대며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이 극장은 잠시 암전입니다. 당신의 잠든 연애세포를 깨워보세요.”라는 자막이 나온 뒤 불이 꺼진다.

서로 얼굴을 쓰다듬고 꼭 안으며 마주하는 모습이 ‘연애의 농축이 이런 거구나.’를 느끼게 한다. 광고는 “오늘부터 우리는 연애합니다, 부부에서 다시 연인으로!”라는 문구를 남기고 끝난다.


부부 위기는 불안정한 가정생활의 징후

가정의 붕괴가 가정문제의 중심이라면 가정 붕괴의 핵심은 부부관계의 해체다. 부부가 서로 살만하다 싶으면 가정은 웬만큼 유지된다. 부부가 서로 못 살겠다고 하면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체로 우울하다. 부부관계가 해체되는 이혼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족의 갈등을 생각하면 이혼율이, 불안정한 한국 가정의 현실을 보여주는 주요 지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이혼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이혼에서도 60세 이상의 황혼 이혼의 비중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 전체 이혼 중 28.1%로 1위다. 배우자가 가장 필요할 때인 황혼기의 이혼율이 가장 높은 것이다. 10명중 1명이 고령자인 인구 구조를 생각하면(15년 뒤인 2030년에는 4명 중 한 명 꼴이 고령자다.), 이는 전체 이혼율을 증폭시킬 수도 있겠다는 우려까지 든다.

황혼 이혼의 요구는 여성이 압도적이다. 지금껏 살았지만 이제라도 이혼해야겠다는 이유의 절반 이상이 남편의 폭언과 폭력 등 부당대우다. 남성의 이유는 다르다. 절반 이상이 장기 별거나 성격차이다. 여성 입장에서는 부당한 대우에도 참고 살았다고 한다. 참고 살겠다고 맘먹는 시한은 대부분 ‘아이들 결혼시킬 때’까지다. 그때까지 가정을 지키기는 했으나 부부관계는 이미 종료한 경우가 대다수다.

한 지붕 두 가족이 되었든, 두 지붕 두 가족이 되었든, 부부의 별거는 이혼의 전주곡이다. 남자와 여자가 황혼 이혼의 이유로 표현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 원인은 통한다.

이혼은 부부에게 크나큰 사건이다. 이혼이라는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또는 우연히 생기지 않는다. 긴 세월 수십 수백 가지의 징후가 있었을 것이다. 큰 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사건들이 반복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 ‘하인리히 법칙’이다. 곧 큰 사건 하나는 이미 잠재적 사건들이 3백 개, 경미한 사건이 29개가 이미 징후로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방치하거나 무시하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가족이나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미 30-40대 때 부부관계의 위기를 예고하는 수많은 징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위기를 예고하는 징후

적어도 한 주간에 한 번 이상은 데이트해야 연인관계가 유지된다. 연인관계의 사람들 절반 이상은 한 주간에 두 번 이상은 데이트한다. 그러다 바빠서 연락을 자주 못하고(73.5%), 공감하는 이야깃거리가 없거나(12.5%),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잦은 다툼(9.5%)이 생기기 시작하면 헤어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헤어지는 연인이 열 쌍에 여섯 쌍이다(2015년 3월 취업포털 커리어 조사).

관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함께’를 느낄 수 있는 일정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숨만 쉬는 것은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든 몸이든 마주하며 주고받는 ‘대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마음과 몸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한 주간에 한 번 데이트하는 만큼도 부부로 함께하지 못한다면 관계 해체의 징후다. ‘부부는 서로 눈빛만 봐도 안다?’ 가족 환상을 만드는 대표적인 통념이다. 안다는 것은 ‘관심’의 시간과 노력에 비례한다.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그래서 좀 안다고 하는 정도가 느낌을 채울 수 있는 선이다. 부부관계도 다르지 않다.

OECD 국가 중 연 평균 근로시간은 가장 길고(한국 2,163시간, OECD 평균 1,770시간), 저임금 근로자 1위에 실직 뒤 소득안정성은 최하위다. 통근시간은 두 번째로 길고, 평균 수면시간이 가장 짧다. 직장인 스트레스는 1위, 직장인 가족대화 시간은 하루 평균 28분에 불과하다. 이러한 우리 현실에서 눈빛만 보고도 상대가 이해해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기대한다, 같이 산 세월의 길이만큼 이해의 폭도 커졌을 것이라고.

기대만큼 충족되지 못했을 때 상처와 실망, 분노가 쌓인다. 자신이 갖는 기대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는 자기성찰 없이는 고스란히 상대에 대한 감정이 된다. “실망했다.” “예전의 당신이 아니다.” “당신이 제대로 해준 게 뭐야?” “남만도 못한 우리가 부부냐!” “이렇게 사느니 혼자 산다.” “그래 끝내자!” 징후가 현실화되는 표현들이다.


위기의 현실화

이 과정에서 세 집에 한 집꼴이 폭력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바로 가정폭력이다. 자신의 감정을 외면해야 살아갈 수 있는 생존문화에 길들여진 많은 남자들에게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읽어낼 코드와 언어가 없다. 좋지 않은 감정에서 말과 몸으로 표현하는 언어는 곧 폭력으로 전해진다.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표현은 대부분 상대를 비하하거나 무시하고, 온갖 상소리 섞인 폭언으로 분출된다. 정서적 언어적 폭력이다. 이것으로도 안 되면 몸 언어가 나온다. 육체적 물리적 폭력이다. 감정의 분출이다. 그 분출은 징후를 사건으로 현실화시키는 촉매다.

분출되는 감정은 예정하지 않은 곳에서 함부로 터져 나온다. 결국 후회의 감정이 또 하나의 상처로 남는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펑 터지는 분출이 아니라, 쌓인 감정을 적절한 때에 적당한 표현으로 드러내는 감정의 방출이 필요하다. 방출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격한 말과 행동은 감정을 방출하는데 적절하지 않다. 상대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는데 성공해야 방출한 감정의 끝이 시원하다. 폭력은 자신을 더 이해하지 못할 자로 각인하는 자폭행위다.

어린 시절 보았던 70년대의 ‘여로’나 ‘아씨’ 같은 드라마뿐 아니라 90년대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소통의 기본 화법이 명령어였다. “이걸 밥상이라고 차렸냐?”며 상 엎는 것은 다반사요, 맞은 뺨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아내에게 또 손을 갖다 대는 남편…. 그런 장면을 온 국민이 큰 불편함 없이 보았다. 무형식의 학습 장면이 되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부부의 소통방법으로 배운 역사다.

긴 세월 살면서도 공감을 나누고 애정을 이어가는 부부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인가? 76년의 세월을 해로한 부부의 사랑을 보여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오랜 세월 함께 잘 살아가는’ 부부에 대한 목마름인지도 모르겠다.


연애 초심의 회복

많은 부부가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할 것 아니냐고 하소연한다. ‘감정’ 막혔던 것을 뚫지도 않고 내보내겠다고 하니 ‘통’할리 만무다. 통하지 못하는데 풀겠다는 건 혼자만의 굿판을 벌리는 격이다. 이해하지 못해 미워하고 폭력으로 죄를 짓느니 차라리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은 무관심과 회피로 나온다.

우리 자녀들은 그렇게 부모를 보고 배우며 결혼해 가정을 꾸민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교육이나 학습도 없는 채 말이다. 결혼식은 결혼하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도록 맡겨도 된다. 먼저 살아본 부모로서 해줘야 할 것은, 부부의 사랑을 키워가는 데 필요한 좋은 마음의 세간을 준비해 주는 것이다. 부부 서로를 살리는 ‘살림’을 잘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어떻게 삶을 이룰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삶’은 순간순간이 선택이다. 결혼해서 살고 있는 부부도 지속적인 부부 ‘리모델링’이 필요한 이유다.

같이 산다는 것의 의미는 서로의 삶을 알아간다는 것이다. 상대를 이해시키는데 최고의 기술은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상대를 바꾸려면 상대를 바꾸지 못했던 그동안의 자기 방식을 바꿔야 한다.

바꾸려고 하지 말고 바뀌려고 해야 한다는 거다. 어떨 때 자신의 말과 행동에 상대가 속 터지고 화를 내는지 짚어보자. 일방적이지 않은지, 요구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상대에 대한 원망만 그득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대화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남남으로 만나 ‘부부’로 한생을 살아가는 인간관계 기술의 고수를 우리는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상대를 자신 안에 들어오게 했던 연애 말이다.

가만히 연애 때를 떠올려보자.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려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상대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하려고 애썼던가. 상대의 관심을 받거나 자신의 관심을 전하려고 얼마나 많이 애를 태웠던가.

공들이고 공들인 끝에 나온 ‘사랑해!’라는 한마디에 온 마음이 얼마나 뜨거워졌던가. ‘깨어진 혼인으로 가족을 서로 떼어놓고 흩어놓는 속세의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가족’의 힘, 그 뿌리를 부부로 맺겠다고 결심했던 연애시절의 초심에서 찾아본다.

* 이상화 테오도라 -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은 여성가족부 산하 공무원 교육기관이다. 2003년부터 여기서 일하며 양성(兩性)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희망을 키운다. 서울시 몇몇 구(區)의 성 평등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5월호, 이상화 테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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