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종교철학ㅣ사상

종이책 읽기: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2-12 ㅣ No.150

[김계선 수녀의 종이책 읽기] 김수환 추기경의 《친전》


2월이 오면 뵙고 싶은 그리운 사람이 있고 또 떠오르는 영상이 있다. 명동성당의 들머리에서 남산으로 가는 언덕을 돌아 퇴계로의 명동입구 전철역까지 길고도 긴 조문행렬, 그리고 그 긴 줄에 서있다는 것을 힘겨워하지 않고 기꺼이 감내하던 거룩한 얼굴들! 이들의 조문을 인자한 얼굴로 말없이 받아 주시던 김수환 추기경이다. 그들은 왜 추운 겨울날 손과 발을 얼리면서 그 긴 행렬의 맨 끝에 서기를 자처했는가? 이제는 손도 잡을 수 없고 이야기도 할 수도 없고 간단한 목례만 드릴 수 있을 뿐인데….

누군가 이 고단한 세상에서 깊은 연민과 사랑으로 편협함 없이 그렇게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끌어 주고 삶의 모범이 되어주는 스승을 원하는구나, 그래서 차마 그분을 그냥 가시게 할 수 없었던 것이구나 하는 마음에 그분이 가신 2월이 되면 더욱 추억이나마 붙들고 그분의 삶에 우리 삶을 견주어 보고 싶은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리던 그분으로부터 편지를 받아보자. 그것도 친전(親展)이라고 쓰인 편지를. 친전이란 편지를 받는 사람이 직접 펴보길 원할 때 편지 겉봉의 받는 사람 이름 옆에 쓰는 말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로 시작되는 이 책은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 보낸 사랑편지의 ‘그대’이다. 그리운 마음에 얼른 펴보는 이 책은 생전의 우리와 함께 이 시대를 살았던 자상하고 소탈한 김수환 추기경의 육성을 듣는 것 같다. 평소에 사랑해마지 않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런 고민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런 절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저렇게,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준엄하게 시대의 가르침을 주기도 하면서 먼저 그 길을 앞장서 걷는다.

즐겨서 많은 이들이 인용하는 말씀 중에 늘 자신을 성찰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긴 여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입니다. 머리에서 마음에 이르는 것. 머리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에까지 도달하게 하여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모두 잘 못합니다.”(본문 중에서) 이 말씀은 책을 읽을 때는 감동을 받아서 ‘아,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어느새 본성대로 살고 있고 머리로만 살고 있는 나에게 하신 말씀 같았다. 이처럼 각 장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 직접 주시는 말씀들이 담겨 있는 친전 편지이다.

이 책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희망 없는 곳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그대여, 청춘이 민족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내 기쁨을 그대와 나누고 싶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희망과 위로, 꿈과 인간적인 고뇌와 체험을 통한 교감, 그리고 일생을 관통한 기쁨과 행복의 원천과 비밀에 대해 알려 주시는데 하시는 말씀마다 우리를 치유하는 은총의 비로 적셔 주고 있다. ‘희망이 없는 곳에도 희망이 있습니다’에서는 사람이 희망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47세의 젊은 추기경 시절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여름에 한 소녀에게 써주었던 글귀는 평생 간직하고 희망의 등불로 삼게 하고, 누구에게라도 희망을 주는 글이다. 그 소녀는 “아빠는 집을 나가고, 엄마는 병으로 누워 있어요.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 뒷바라지를 하고 있지만…. 하루하루가 힘들어요. 추기경님이 저를 위해 좋은 말씀 하나만 적어주세요.”, “장마에도 끝이 있듯이 고생길에도 끝이 있단다.”

‘매스미디어에게 말한다’ 이 부분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매스미디어의 조명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누구보다도 매스컴의 힘과 본령을 잘 알고 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언론은 진리의 증거자로서 그 시대정신을 드높이고, 밝은 사회의 앞날을 열어주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는 본연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매스미디어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뚜렷이 말하기는 어렵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고, 인간으로 존경하고 사랑할 줄 아는 것, 글을 쓰든 시를 쓰든 참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데서 우러나오고 인간을 아름답게 키워주기 위해 봉사하는 것, 이것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기본이라는 것은 비단 언론뿐 아니라 나라에서 단체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새겨들을 일이다. 어쩌면 그토록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사셨기에 그분이 여전히 가장 보고 싶은 인물 1위를 차지하신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고독했던 그분, 그리고 우리 민족을 위해 30년 동안 앓았던 고질병인 불면증 등 그분의 인간적인 진솔한 내면의 고백에서는 가슴 아팠고, 또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과 ‘서시’를 좋아하지만, 감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서 서시를 읊어 볼 생각을 못했다는 내용은 그분의 겸손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외적으로 어려울 때일수록 내적으로는 더 심화되고 마음의 문이 열려서 인생을 더 깊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 만약 시련의 때라면 오히려 우리 자신을 보다 더 성장시킬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십시오. 어떤 고통도 겪지 않은 인간, 고독도 슬픔도 겪지 않은 인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겠지만 있다면 그런 인간은 무미건조합니다. 인간의 깊이도 없고 향기도 없습니다.”란 말씀은 현재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보내는 희망의 연서이다.

여러 계층, 여러 성향의 사람들을 사랑하셨지만 특별히 젊은이들, 약자, 소외된 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이신 그분, 사랑은 배려이자 친절이자 축복임을 자주 강조하셨는데 사랑이 축복인 것은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추기경이기 전에 죄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바보야’라는 스스럼없이 그린 자화상, 한결같이 진리, 정의, 사랑을 실천하고 가르치고 전하셨다. 그분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 정의, 사랑은 이제 그분의 편지를 받은 우리의 미덕이자 등불이다. 때로는 강하고 용기있게 그렇지만 부드러운 그분의 행동은 생명의 움을 결코 꺾어버리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었음을 다정하게 보여주신다. 이제 온 몸으로 살아내신 우리의 영원한 신앙과 삶의 스승께 우리도 사랑의 삶으로 답장을 쓸 차례다. (*사진출처 : 굿뉴스)

[월간빛, 2013년 2월호,
김계선(에반젤리나 · 성바오로딸수도회 수녀)]


1,76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