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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2: 민족문화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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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9-01 ㅣ No.408

한일강제병합 100년 - 일제 강점기 한국 천주교 (하) 제2편 민족문화부흥운동


교육 출판 활동 통해 민족계몽운동 헌신

 

 

일제 강점기 3ㆍ1 만세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활기를 잃어가던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민족 문화를 부흥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민족문화부흥운동은 한국 천주교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우리 민족에 대한 착취와 억압 정책을 전개하면서 특히 한국 천주교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켜 나갔다. 그러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성장을 지속해온 한국 천주교는 강제병합 이후에도 교세를 더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1911년 4월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됐고, 1920년 8월 원산대목구, 1927년 3월 평양지목구, 1928년 7월 연길지목구, 1937년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 1939년 춘천지목구가 설정됐다. 1940년 1월에는 원산대목구가 다시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로 분할됐다. 일제 강점기 시대 특히 3ㆍ1운동 이후 한국 천주교의 민족문화운동을 정리했다.

 

 

출판 및 한글 운동

 

민족문화부흥운동은 전국 각지 종교 단체에서 민족 언론 기관을 설립, 신문ㆍ잡지를 연이어 창간하면서 활발히 전개됐다. 한국 천주교도 가톨릭 문화 활동을 촉진하고 대 사회활동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로 출판물 보급 사업을 확장했다.

 

특히 서울대목구가 1933년 6월에 창간한 「가톨릭 청년」은 가톨릭의 사회 문화 매체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톨릭 청년」은 순수 종교지 입장을 취하면서 문예ㆍ언어ㆍ사회ㆍ법률ㆍ과학ㆍ미술ㆍ의학 분야 등 민족 문화 발전을 위한 지식 전달에 힘써 명실공히 계몽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가톨릭 청년」은 억압받고 가난한 우리 민족 현실에 대해 사회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내용을 게재해 민족의식을 부추겼다.

 

"전 조선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중 60%가 소작인이다. 이런 소작인의 연평균 수입이 250원이며 그 결과로 인해 그들은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남에게 돈을 빌려 쓴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구해야 한다. 이러한 대중의 행복을 위한 시설이 있어야 한다. 즉 지주는 정당한 보수를 받음과 동시에 소작인의 노동에 적응한 정당한 생활의 보장을 주어야 한다"(「가톨릭 청년」 1934년 11월호 중에서).

 

이처럼 「가톨릭 청년」은 사회 구조의 모순이나 식민지 하에서의 일제 착취에 대해 강한 내용을 다루진 못했으나 민중 생활이 극도로 피폐하고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춰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다.

 

한국 천주교 잡지는 우리 민족을 위한 한글 운동에 노력했다. 일제는 한국의 민족성을 말살해 일본 민족의 최하층으로 동화시키려 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한글 전용 원칙을 고수하며 「경향잡지」를 간행했다. 한국 천주교는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자, 새 철자법을 즉시 「경향잡지」에 적용했다. 그리고 한글에 대한 일제 탄압이 자행되던 1940년대에도 「경향잡지」 한글 전용 원칙을 고수했다.

 

학자들은 "한국 천주교회가 한글을 사용하고 한글 보존에 앞장섬으로써 일제의 동화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하고 민족 고유 언어를 보존 발전시킴으로써 민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갖게 했다"고 평가했다.

 

 

교육 사업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해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이 확산됐는데 한국 천주교는 비교적 온건한 교육과 출판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최초로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여성 교육을 전담했다. "한국인이 일본인으로 동화되는 데 있어 제1의 첩경은 여성 교육의 진보 발달에 있다"고 말할 만큼 민족 주체성 말살에 최종 목표를 두고 있던 일제의 한국 여성 교육 목표와 달리 수녀회는 훌륭한 모성애를 가진 주부로, 모범적 신자로 양성하고자 국문ㆍ한문ㆍ산술ㆍ역사ㆍ지리 외에도 세탁ㆍ육아법ㆍ자수ㆍ직물법ㆍ종교 교육을 실시했다.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회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숭신사범학교'와 실업학교인 '숭공학교'를 설립했다.

 

1910년에 문을 연 숭공학교는 △ 실업교육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사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정부와 한국 국민에게 보여준다 △ 자립 가톨릭 수공업자 계층을 탄생시켜 지금까지 가난했던 교인들은 중산층으로 발돋움하도록 하는 받침목이 된다 △가톨릭 신앙 전파에 기여한다 △ 유능한 한국인 수사를 양성한다는 데 목적을 뒀다. 3년 교육과정으로 목공부ㆍ정밀 금속부ㆍ철공부ㆍ제차부ㆍ재단부ㆍ원예부 등을 운영한 숭공학교는 매일 이론 2시간 실습 8시간 독일 도제제도 방식 교육을 실시, 뛰어난 장인들을 배출했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포와넬 신부는 1912년 숭공학교에 편지를 보내 "본당의 여러 가족이 벌써 거기서 소중한 생계를 찾았습니다. 바라건대 이 사업이 발전해 다른 젊은이들도 무위도식으로부터 구해 불안 상태에서 좀 더 벗어나 보다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어떤 직업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숭공학교는 조선 총독부가 폐교시키려고 갖은 압박을 가하면서도 서울을 방문하는 모든 고위층 일본인에게 자랑스럽게 견학시킬 만큼 우수한 학교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결국 1921년 문을 닫고 말았다. 성 베네딕도회가 양질의 교사 양성을 위해 1911년 설립한 2년제 사범학교인 '숭신학교'도 개교 2년 만인 1913년 9월 폐교했다.

 

이 두 학교가 문을 닫게 된 근본 원인은 교육을 통제하고 특히 한국인이나 외국인이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려는 일제 식민지 교육 정책에 있었다. 일제는 1911년 8월 23일 식민 교육 지침인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고 어느 정도 치외법권을 누리던 천주교 사립학교에 대해 종교와 교육의 분리를 지시했다. 숭신학교와 숭공학교가 바로 이 식민교육 정책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이들 두 학교가 폐교된 이후 한국 천주교가 운영하는 정규 중등교육기관은 전국에서 단 하나 '동성상업학교'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로 인해 한국민 상당수가 개신교 학교나 일본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돼 한국 천주교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다.

 

학자들은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 천주교는 정부에 의한 근대 교육 추진이 부진했던 상황에서 교육 발전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가 서유럽식 근대 교육 제도를 도입해 신학문을 수용했고,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교육 기회 균등의 원칙을 내걸고 여성 교육을 실시해 남녀평등을 지향했으며 빈곤ㆍ근로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에 큰 점수를 주었다.

 

아울러 사범학교를 설립해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 노력했고 운동회ㆍ연설회ㆍ토론회 등을 장려해 전인 교육의 새 방향을 제시한 점도 높이 평가했다.

 

[평화신문, 2010년 8월 29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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