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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과 신앙: 레올로지 그리고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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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3 ㅣ No.105

[과학과 신앙] 레올로지 그리고 신학


물이나 설탕과 같은 화학물질들을 저분자 화합물이라고 합니다. H2O,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물의 분자식이지요. 수소 분자량이 1이고 산소 분자량이 16이니, 물의 분자량은 18이 되는 셈이지요. 이렇게 계산하면 설탕은 분자량이 368이 된답니다. 화학물질마다 분자량이 다 다릅니다. 이렇게 해서 분자량이 10,000 이상 되는 화합물을 고분자 물질이라 부릅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이나 고무는 물론이고 생명에 중요한 단백질이나 DNA 같은 생체분자들도 모두 고분자 물질이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자량이 커지다 보면, 고분자는 물이나 설탕과 같은 저분자 화합물과 같은 화학물질들과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게 됩니다.

고분자 물질이 갖는 가장 흥미 있고 신비한 물성 가운데 하나가 점탄성이란 성질입니다.


고체이면서도 액체 같은

물은 쉽게 흐르는데, 풀이나 치약 같은 물질들은 잘 흐르지 않지요. 이렇게 액체들이 쉽게 흐를 수 있느냐 아니면 잘 흐르지 않느냐 하는 성질을 점성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책상이나 의자, 그릇 같은 물질들을 고체라고 하지요.

그런데 어떤 고체는 잘 튀지 않는 반면에 고무공이나 용수철 같은 것은 잘 튀지요. 이런 성질을 탄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고분자 물질은 액체이지만 고체 같고, 고체이면서도 액체 같은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진답니다. 우리는 이런 성질을 점탄성이라고 부릅니다. 곧, 액체가 갖는 점성과 고체가 갖는 탄성을 아울러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신비한 성질, 곧 어떤 고체가 액체처럼 흐르고 형태가 변하는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레올로지(rheology)’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이 레올로지란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무슨 무슨 학문을 이야기할 때 영어로 ‘-logy’라고 하지요.

하느님을 연구하는 학문을 ‘신학’이라고 부른다지요? 영어로는 ‘테올로지(theology)’라고 하고요. theology에서 t만 r로 바꾸면 rheology가 되는데, 우리말로는 ‘유변학’이라고 부른답니다. 흐를 류(流)에다 변할 변(變)이 붙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곧, 어떤 물질이 액체같이 흐르기도 하고 고체같이 변형되기도 하는데,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서 유변학이라고 번역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신학 같은 유변학

고체인데 액체 같기도 하고, 액체이면서도 고체 같은 물질, 곧 고분자 물질의 독특한 성질을 왜 신학(theology)과 거의 같은 단어인 유변학(rheology)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요?

빙햄(Bingham)이라는 학자가 1929년에 유변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창시하였는데, 고체이면서 액체 같은 신비한 성질을 드러내는 고분자 물질의 성질이 마치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랍니다. 그 배경에는 판관기에 나오는 드보라 판관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드보라는 구약성경 판관기 4장에 등장하는 라피돗의 아내인 여자 예언자이지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과 함께,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가나안의 시스라 장수를 카인족 헤베르의 아내 야엘의 손에 죽게 하고, 가나안의 임금 야빈을 멸망시켰죠. 그리고 바락과 함께 이렇게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요.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었습니다,
시나이의 그분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앞에서”(판관 5,5).

우리가 보기엔 끄떡없게 보이는 산들도 하느님 앞에선 “떨었습니다.” 곧, 우리가 보는 산들은 전혀 변함이 없는 것 같지만, 주님 앞에선 ‘떨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눈에는 전혀 변함이 없는 산들이지만, 수천 년 수만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엔 산들의 높이가 풍랑에 시달려 낮아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 생애 동안 그 변화를 볼 수 없을 따름이지요. 그래서 고분자 물질의 점탄성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연구의 출발점이 바로 ‘드보라 수’라는 것입니다. 드보라 수란, 대상 물질의 변형을 일으키는 외부변화의 진행 속도를 관찰 시간으로 나눈 수를 말합니다.

곧, 어떤 변화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시간 범위 안에서 가능하다면 드보라 수가 작은 것이지만, 우리가 관찰할 수 있기엔 너무나 그 변화가 느리게 진행되고 있을 땐 드보라 수가 매우 크게 되는 것이지요. 강물 같은 액체는 드보라 수가 1보다 작지만, 산과 같은 고체는 드보라 수가 매우 크지요. 고분자 물질은 그 중간 값을 갖고요. 자, 이야기가 너무 어렵게 진행되는 것 같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100년 세월 동안은 산들이 변형하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시편 90,4)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눈에는 산들이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이렇게 고분자 물질의 유변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과학을 연구한다는 생각보다는 무슨 신학을 공부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답니다. 그래서 빙햄이란 학자는 신학을 뜻하는 theology에서 t를 r로만 바꾼 채 rheology란 단어를 만들었나 봅니다.


고분자 물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신비

사실은 그게 아니고요. 우리가 영어 단어를 처음 배울 때 그 어원을 알면 어려운 영어 단어가 잘 외워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레올로지는 류머티즘과 어원이 같답니다. rheo(흐르다)와 logos(학문)를 더해서 만든 말이지요. 신경통을 의미하는 류머티즘(rheumatism)은 아픈 곳이 신체 속을 이리저리 ‘흘러’ 돌아다닌다고 해서 만들어진 단어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고분자 물질이 고체이지만 액체처럼 흘러서 돌아다니기도 한다는 뜻에서, 빙햄이란 학자는 고분자 물질의 점탄성을 설명하고자, 류머티즘과 같은 뿌리를 갖는 ‘rheo’와 학문을 뜻하는 ‘logy’를 합쳐 레올로지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고분자의 물리적 성질을 30년간 연구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레올로지란 학문 또한 제 연구분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이 레올로지란 학문을 처음 접하였을 때 어려운 수학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학문 곳곳에 숨어있는 신학적인 문제로 적지 않은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안 산들이 떨고, 산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천 년도 하루 같은 주님의 눈에는, 산들이 떨고 산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 같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을 수는 있습니다.

비단 레올로지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공부하는 고분자라는 물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곳곳에 깃들어있는 신비함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깊이 연구할수록 더욱 알 수 없는 사실이 더 많아짐을 절실히 느낍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한처음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땅과 바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신 하느님이시죠. 고분자 물질의 성질을 파헤치는 연구에 매진할수록 그 속에 든 주님의 놀라운 손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누군가는 “신은 죽었다.”고 했다지요. 그런 분들에게 과학에 대해 공부해 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자연과학적인 문제, 자연과학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 속에 든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그 속에 든 신비의 근원을 밝히다 보면 마침내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 노벨상을 수상한 왓슨이 그랬다지요. 한 쪽도 안 되는 논문으로 생명의 신비를 밝혀 노벨상을 수상한 그분이 한 말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워 참이 아닐 수 없다.”

그렇습니다. 자연의 신비 속에 든 그 아름다움, 그것 자체가 참이 아닐 수 없고, 그 참의 뿌리에는 주님의 오묘한 섭리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천체의 운행법칙과 강물의 흐름은 물론이고, 제가 연구하는 고분자 물질에 이르기까지 숨어있는 하느님의 신비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실, 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하느님을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이었고, 내가 잘난 줄 알았습니다. 1980년 초이지요.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이 땅의 모든 젊은이가 선망하던 카이스트에 입학하고, 졸업을 앞둔 시절 하느님을 만나 그분 자녀로 다시 태어났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 강단에 선 지 올해로 꼭 30년이 됩니다. 그동안 고분자 분야의 연구에 더욱 깊이 빠져들수록 고분자라는 물질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손길, 그 모든 것을 더욱 가슴깊이 느끼게 됩니다.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고자 하네”(시편 27,4 참조).

* 하창식 프란치스코 - 부산대학교 고분자공학과 교수. 부산대학교 부총장, 한국접착 및 계면학회장을 맡고 있으며, 부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4월호, 하창식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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