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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1981년 여성교육관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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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9-18 ㅣ No.607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여성이여 날개를 달아라.” - 1981년 여성교육관 설립

 

 

얼마 전 주문받은 다음 바로 밥을 해주는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옆에 앉았던 분이 밥을 퍼주는 대로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밥을 퍼주던 사람이 내 앞에 놓인 밥그릇을 낚아채더니, “이 밥이 더 많아요.”하며 남자 분 앞에 놓았다. 우리 팀에서는 “그 분이 우리 중에서 제일 많이 먹는데요.”라며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냄비바닥에 붙은 밥은 여성들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읽었다. 30년여 전 사회는 더했으리라. 1981년 대구시 남구 봉덕동 1336-2번지에 가톨릭여성회관(이듬해 가톨릭여성교육관으로 개칭)이 설립되었다. 대지 2148.76m2(650평)에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1646.281m2(498평)이었다. 2인용 침실 22개를 비롯하여 2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 1백명을 수용하는 강의실, 성당, 4개의 회합실과 식당 등을 갖추고 있었다. 축성식을 주례한 교구 총대리 이문희 주교는 “1년 전 만 해도 빈터이던 곳에 집과 성당이 들어서게 된 것은 독일 은인들이 도와준 결과였다.”고 했다. 이 인사말에는 돈을 얻으러 다니던 때의 어색함도 함께 묻혔을 것이다.

 

한 올, 한 동작도 헛되이 쓰심이 없는 은총

가톨릭여성교육관은 젤뚜르다(1256~1301) 성녀를 제2주보로 모셨다. 거의 평생 여성의 교육을 위해 진력했던 젤뚜르다 성녀를 주보로 모신 것이다. 독일에서 여성교육관의 설립을 처음 결심하고 이를 실천한 이도 젤뚜르다 엘레(Dr, G. Ehtle, 1897~1987)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성교육을 통한 복음전파를 위해 ‘국제 헬프타 세미나’를 주관하면서 가톨릭여대생기숙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숙사에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 이옥분이 있었다. 그가 한국과 독일간의 다리가 되었다. 그는 대구대교구 교구장에게 편지를 보내 여성교육관의 설치를 요청했다. 그리고 대구교구장의 승인을 얻어 독일 주교회의 개발기금과 독일 가톨릭 부인회의 지원을 얻어냈다.

1959년 김천 성의여고, 순심고등학교, 분도수녀원에서는 3명의 학생을 독일 간호학교에 유학을 보냈다. 4년 후 두 번째 팀 9명이 파견되는데 이때 김천 성의여고 출신 이옥분이 선발되었다. 그들은 김순복 수녀와 정하돈 수녀의 인솔로 독일로 떠났다. 이옥분은 그곳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한 다음, 1967년 아헨 사회복지대학으로 진학했다. 광산지역인 아헨에는 국제원조기관인 미세레올(Misereor)과 미씨오(Missio)가 있었다. 이옥분은 외국인을 위한 센터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독 파견 간호사와 광부 및 한인들 생활을 도와주게 되었다. 1970년부터 이옥분은 쾰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과의 외국인 상담부, 외국학생 장학기관 등에서 일했다.
 
헬프타 기숙사에는 36개국에서 온 105명의 학생이 살고 있었다. 이옥분은 이들에게 한국문화를 소개할 기회들이 있었고, 국제 헬프타 세미나 등에서 “한국 여성교육의 현황”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엘레와 그를 돕던 직원 프륌(M. Pr m)은 이옥분을 주목했다. 이들은 이미 인도 캐랄라와 아프리카 다르에스살렘에 교육회관을 건립해 주었다. 이제 한국에 세 번째 건물을 지어 국제적인 관련성 안에서 활동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일을 주도한 엘레는 독일가톨릭여성연합회 회장이고, 또 독일가톨릭여성연합회는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를 창립한 멤버였으므로, 이 일은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의 활동이 되었다. 엘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가톨릭 평신도 여성 대표로 참석한 쾰른대학 박사이며 삼촌이 바티칸의 엘레 추기경이고, 오빠는 성직자, 동생은 수녀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를 돕던 프륌은 오빠가 그레고리안 대학의 저명한 성서신학자였다.

1976년 여름 엘레는 이옥분에게 한국 가톨릭여성교육을 위해 회관 건립 계획을 말하며 이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엘레는 한국에서 여성교육관을 운영할 의지가 있으며 대지를 제공할 수 있는 기관을 찾고자 했다. 이들은 김수환 추기경과 박기홍(Josef Palwzer) 신부, 그리고 김천 성의학교를 운영하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채인숙(Vertwina Caesar) 수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수녀원으로 배달된 편지는 당시 대구대교구 사무처장이던 전달출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염원하고 있던 여성교육사업”이라며, 정하돈 수녀를 통해 책임자들의 한국 방문을 요청했다. 이듬해 엘레와 프륌은 이옥분의 안내로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과 마산교구를 시찰하고 온 이들에게 대구에서는 서정길 대주교가 직접 봉덕동 구 효성여대 앞의 부지를 안내했다. 이들은 대구대교구를 신뢰하게 되었다. 이들은 독일 여성연합회를 움직여 4년을 작정하고 모금을 시작했다. 현지의 상황을 보고 간 엘레와 프륌은 독일에서 한국의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산 증인이 되어 이 일을 추진했다. 이문희 보좌주교는 이 일을 위해 여러 번 독일을 방문했고, 최시동 신부, 전달출 신부, 이창배 신부 등도 이 일로 독일을 방문했다.

잘츠부르크 코리아센터에서 일하고 있던 이성우 신부가 국제간의 업무를 추진했다. 그런데 4년이란 기간은 길었다. 몇 곳에서 이의 제기도 있었다. 태양열 시스템을 이용하는 설계도를 가지고 나타난 이문희 보좌주교와 이성우 신부의 설명에 독일 가톨릭부인회에서는 냉소적이었다. 당시 70년대 후반은 독일에서도 태양열 시스템이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었다. 한국은 기름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앞으로 운영을 위해서 이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일이 실패했다고 판단되었지만, 교구 측에서는 그동안의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독일부인회 측에서는 식사 자리에서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해 보자고 제안했고, 일은 계속될 수 있었다. 물론 이옥분도 자신은 신용을 잃어 귀국을 할 수 없다고 버텼다. 독일부인회도 여성교육관 건립의 의의를 설명해가며 신자들의 헌금을 호소해야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일은 여러 일화를 생산해 냈다. 이옥분이 남부 독일에 가서 여성 대표 20여 명 앞에서 설명을 하고 나서 바구니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현금이 없던 이들은 나가지를 못하고 있었다가, 집에 가서 종잣돈으로 모아둔 돈을 부쳐주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가톨릭 여성연합회 회장을 했던 볼펙 여사는 자신이 정년 할 때 받은 1만여 마르크(330만 원)를 전부 기부했다. 당시 200만 원이면 연립주택 한 채를 지을 수 있었다.

살림이 어려운 교구에서는 이 성금을 받아서, 병원 건축 마지막 비용을 충당하고 여성교육관을 지었다. 그리고 교육관을 개관하기 전에 이미 독일에서 고생했던 이성우 신부를 초대 지도신부로 위촉하고 이옥분을 관장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이듬해 귀국하여 이 일을 시작했다. 이로써 대구대교구는 전국에서 최초이며 유일한 가톨릭여성교육기관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뒤 이옥분은 경북대학교 교수로 나가게 되었다. 그는 겸직 금지 때문에 1993년까지 교육관에 살면서 정식 타이틀 없이 봉사했다.
 

운영주체의 변화와 여성교육관 30년간의 활동

가톨릭여성교육관도 시대에 따라 운영체제나 내용 등이 변화했다. 여성교육관은 정신적, 신앙적인 면을 지도하고 재정을 감사하는 지도신부와 여성을 교육시키고 여성직원을 채용하는 실질적 업무를 담당하는 여성 관장제로 출발했다. 한편 한국 가톨릭여성연합회는 1963년 창립된 서울대교구 가톨릭여성연합회가 모체가 되어 1975년 발족했다. 대구에서도 이 해에 가톨릭여성연합회가 창립된 바 있었다. 이 대구가톨릭여성연합회가 1983년부터 교육관의 운영을 맡았다. 교육관의 초대관장은 이옥분이었다. 그를 이어서 대구여성연합회 5대 회장 장안나, 6대 팽정순, 7대 우순희 등이 여성교육관 2대, 3대, 4대 관장을 맡았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 가톨릭여성연합회는 여성교육관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동시에 신부가 관장을 맡게 되어 이성우 신부가 5대 관장이 되었고 이옥분이 교육부관장, 이숙희가 관리부관장이 되었다. 그리고 1992년에는 허용 신부가 6대 관장이 되었다. 그러나 1996년 다시 여성관장체제로 돌아갔는데, 이때 이옥분이 7대 관장으로 취임하여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다만 지도신부만 바뀌어 이용길 신부, 김용민 신부, 류승기 신부, 김율석 신부, 김영호 신부를 거쳐 2013년 현재 교구 사목국장인 박영일 신부가 책임을 맡고 있다.

여성교육관은 지역사회 여성교육과 평신도 재교육장으로 여성교육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한국, 나아가 아시아 여성교육센터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었다. 초기 연 5천 명이 여성교육관을 거쳐갔다. 교육관에서는 어머니대학·신부대학·시어머니대학과 시골여성·직업여성·비서교육 등 각계각층의 여성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제공했다. 단순한 기술교육이 아닌 여성 스스로 자각하고 깨어날 수 있는 교육을 진행했다. 이렇게 여성교육관은 「여성교육을 통한 복음전파」, 「봉사하는 여성」 구현이라는 목표를 실현코자 했다. 또한 여성교육관은 직접적 교육을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장소를 제공했다. 꾸르실료·피정·ME·성령세미나 등의 신자재교육은 물론 근로여성교육·자모교실·공소지도자교실 등 다양한 교육과 회합장소로 이용되었다. 또한 교구 주도의 공소회장 피정이나 사제사목연수회, 예비 신학생 성소개발 연구 모임 등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5년 교구는 여성교육관 건물을 매각하고 여성교육관은 교구청 구내 옛 효성여고 건물로 옮기게 되었다. 이는 모(某) 본당의 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고 아울러 효성여고 이전으로 생긴 공간 활용을 겸하는 결정이었다.

여성교육관 건립비용을 마련하는 데에서부터 관여했던 두 사람은 초기의 목표실현을 위해 애태우고 있다. 이 두 사람 중 먼저 초대 지도신부였으며, 5대 관장을 맡은 이성우 신부를 들 수 있다. 그는 10여 년 넘게 교육관의 발전을 위해 투신해 왔다. 그리고 한국과 독일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고, 초기부터 현재까지 수고하고 있는 이옥분도 함께 기억할 수 있다. 그 30년간의 변화와 어려움은 어쩌면 외국의 도움으로 지어진 교육관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몸살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여성교육관도 이 땅에 더 좋은 프로그램으로 다시 출발해도 좋을 만큼 발전해 갔다. 실제로 1980년 대구지역 가톨릭 여성신자가 8천 명이었던 것이 현재 4배로 늘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1985년에는 우리나라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1,400명이었는데, 현재 15만 명쯤 된다. 그리고 대학진학률이 여성이 남성을 앞지르고 있다. 남성보다 평균수명이 7년 정도 높고, 독신여성이 증가하여 2030년에는 여성가구주가 전체가구의 절반이 된단다. 이 현대사회는 30년 전과는 다른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한국교회는 최빈국과 사랑을 나누어 우리가 받은 도움을 적극적으로 갚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톨릭여성교육관이 빚을 갚는 길 중의 하나일 것이다.(도움 : 이성우 신부, 이옥분 교수, 김지영과 영남교회사연구소)
 
[월간빛, 2013년 9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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