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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에게 복음을: 캄보디아 - 가난한 교회와 사회 속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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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191

[만민에게 복음을 - 캄보디아] 가난한 교회와 사회 속의 예수님


전체 인구의 95%가 불교 신자이고, 불교가 국교인 캄보디아. 이 나라의 천주교 역사는 450년이 넘는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근근이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대학살이 진행된 ‘크메르 루즈’의 공산치하(1975-1979년)에서 그 명맥이 끊어졌다. 그리고 1990년 비로소 선교사의 재입국이 가능해져 교회의 싹을 다시 틔우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20년 정도가 된다.

방인 사제 4명, 신학생 5명, 교우 약 2만 명(이 가운데 약 70%는 베트남계 신자들이다.) 이 전부여서, 50여 명의 외국인 선교회 신부들이 교회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습득이 어려운 캄보디아의 문자와 어려운 경제 사정이 맞물려 국민들의 문맹률이 50%에 이르는 현실도 선교에 장애가 되고 있다.

최근 10여 년 동안은 사회가 안정되어서, 주요 도로가 포장되고, 도시들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시골의 상황은 변화가 없으며, 도시에서는 날로 빈부 격차가 벌어지고 있어 도시빈민을 양산하고 있다.


청소년사목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

프놈펜 교구와 두 개의 사목 대리구(받탐방, 꼼뽕짬)로 구성되어 있는 캄보디아 교회는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며,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사목과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많은 본당이 학생 기숙사와 유치원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육과 의료 등 가난한 사람과 병자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적지 않은 외국인 신부들이 각종 NGO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외방선교회도 2001년에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지금은 4명의 신부가 활동하고 있는데, 3명은 꼼뽕짬에서 활동하고 있고, 1명은 수도 프놈펜에서 가난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은 기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판잣집에서 산 10년 인간적인 기본적 생활 기반이 결핍된 이곳에 내가 파견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처음 몇 년은 전기, 수도도 없는 변방(라오스와 베트남 국경 지역)의 시골에서 지냈는데 우물물에 의지해 밥 짓는 일부터 시작했다. 얼마 안 되는 교우들은 모두 생업에 바쁘다 보니 전례 준비부터 거의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내야 했다.

1년 내내 여름뿐인 이곳의 평균 기온은 35도, 도로는 엉망이어서 몇 년 동안은 배를 타고 옮겨 다녀야 했다. 그나마 길이 정비된 뒤에는 픽업트럭에 의지해 하루 종일 먼지 자욱한 길을 이동해야 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여행을 할 때는 늘 약간의 빵과 물을 지니고 다녀야 했다. 그 당시에는 선교보다 생존이 먼저였다고나 할까.

나는 10년 동안 판잣집 사제관에서 살았다. 그래도 내가 거주하는 곳에는 재래식이나마 화장실과 우물이라도 있었지만, 교우들은 대개 평생을 판잣집에서 살고,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는 집이 대부분이다.

한 대뿐인 주일미사는 오후 3시에 있다. 그 이유는 교우들 거의 모두가 아침에는 시장에 나가 생선이나 채소 등 무엇이든 팔아야 하루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부모님을 따라 생활전선에 나서야 한다. 이런 생활형편이니 약 30-40명이 참석하는 주일미사 헌금 총액이 평균 1만 2천 원(10달러)도 되지 않는다.


가난한 교회와 사회 속의 예수님

이처럼 일상의 모든 것이 문명사회의 물질적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던 내겐 상상 이상으로 어렵고 불편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을 견디어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보살핌과 함께 이곳 사람들의 참으로 순박한 마음과 어린이들의 해맑은 미소였다.

또한 늘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석양 그리고 밤하늘의 무수히 쏟아지는 별 등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 덕분이다.

재작년에 겨우 성당을 지어 이젠 집다운 집에서 지내고 있지만, 10년 가까이 판잣집 사제관에서 지내며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사람들을 통해서 내게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과 기다림 덕분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젠 이곳에도 전기, 수도가 들어온다. 내 눈에는 무척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는 ‘그냥 이 사람들에게 정이 들어버린’ 내 마음의 변화다. 가난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은 시골에서 내 마음도 무척이나 여유로워진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이들은 내게 참으로 인간다움과 순박한 사랑스러움을 자신들의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의 인간적인 부족함도 이들과 함께 있으면 절로 녹아버리고, 이들의 해맑은 미소 속에서 이들의 친구가 되어갈 뿐이다.

물론 이들의 열악한 외적 환경을 개선하고, 지원하고, 제대로 된 성당을 짓게 된 것은 모두가 한국의 교우들과 세계 여러 교회의 도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형제적 사랑과 봉헌 덕에 두 곳에 성당을 짓고, 무료 학생 기숙사와 사랑 진료소를 운영할 수 있음에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그 덕분에 지난 7년 동안 3만 명이 넘는 가난한 이들이 무료진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의 또 다른 한편에는, 물질적 도움을 많이 준 한국의 교우분들이, 그 답례로 이들의 순수하고 밝은 마음들을 닮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도 있다.


직접 와서 보면

한국에서 대만과 뉴질랜드를 거쳐 이곳에 정착한 내게, 이제야 아주 분명하고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모든 이들이 갈망하는 행복은 결코 외부 환경에 있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왜 주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가난한 이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는지를(마태 25,31 이하 참조) 직접 체험함으로써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가난한 안토니오 주교님이 머리와 목에 수건을 감아, 도로의 흙먼지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 하신다. 안타까운 마음에 “주교님, 저기 차를 놔두고 왜 오토바이를 타고 가십니까?” 하고 말씀드리니, “나 혼자 가는데 왜 차가 필요하지?” 하고 되물으신다.

가난하고 단순한 생활이 일상에 적지 않은 불편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들과 벗이 되어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많이 버릴수록 삶이 단순해지지만, 지금의 삶보다 더 행복해지고 아름다워진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체험들이 선교사들에게 주어진 그분의 큰 선물이고 행복이 아닐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며 질문을 던지자, 예수님께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와서 보아라.”(요한 1,39) 하고 말씀하셨다.

누구든 여건이 허락된다면, 선교지에 관한 100편의 글을 읽는 것보다 직접 한 번 와서 보는 것이 최고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투자한 시간과 경비의 몇 배로 갚아주실 것이다. 신앙과 행복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이다.

* 박서필 사도 요한 - 한국외방선교회 소속 신부. 1992년에 사제품을 받고 1994년에 대만에 파견되었다. 2001년에 캄보디아로 옮겨가 지금까지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박서필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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