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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춘천교구 설정 7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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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2-02 ㅣ No.413

춘천교구 설정 7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춘천교구가 70년 신앙 역사를 되돌아보고 100주년을 향해 나아갈 길을 고찰해보는 학술 심포지엄을 마련했다.

 

11월 9일 오후 2~5시 강원도 춘천시 죽림동주교좌성당 말딩회관 2층 강당에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강원 영서 지역의 천주교 수용과정’, ‘춘천교구 설정 · 해방 이후 시련과 발전’을 주제로 금경숙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과 최선혜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각각 주제 발표했다.

 

논평자로는 여친천 신부(배론성지 주임)와 옥현진 교수(광주 가톨릭대학교)가 참여했으며, 진행 및 종합토론 사회는 김주영 신부(강원교회사연구소 소장)가 맡았다.

 

교구장 장익 주교는 “교구설정 7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면서 “자료 부족으로 북쪽지역에 관한 연구가 미흡해 아쉬움이 남지만 오늘 이 자리를 계기로 교구 역사 자료수집과 연구에 더욱 매진해주길 바란다”고 말해 앞으로 춘천교구가 70년 역사를 바탕으로 도약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심포지엄 내용을 요약한다.

 

 

강원도 영서지역의 천주교 전래와 수용에 관한 고찰 - 춘천지역을 중심으로(금경숙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

 

“신유박해 이전부터 교우촌 형성됐을 것”

 

춘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영서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오게 된 것은 역시 정부의 박해가 원인이 된다. 지금까지 1802년 신태보가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한 순교자의 가족을 이끌고 용인에서 강원도로 왔을 때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확인한 결과 그 이전인 신해박해(1791년)때에 이미 강원도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 일가의 이력서와 가계를 근거로 해 살펴보면 1791년 윤지충 사건을 당한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공식 탄압하기 시작했을 때, 최양업 신부의 5대조 최한일이 박해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으로 내려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황사영 백서 사건(1801년) 당시, 춘천에 피난해 있으면서 한양으로 왕래하며 황사영을 도왔던 황심(1756~1801)의 존재도 1801년 이전 춘천 북산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춘천을 중심으로 한 교우촌은 1801년 신유박해 신자들의 유배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해 춘천군 북산면 일대와 화천군 간동, 양구 남면·방산면 등지에 교우촌을 이뤘다. 평신도 회장이었던 김기호(1824~1903)의 「봉교자술」에 의하면 1876년 당시 블랑 주교가 춘천의 공소 2곳, 양구의 궁동 공소, 낭천의 사동 공소와 율극 공소 등을 순방했다. 또 조선천주교회 교구장 뮈텔 주교의 전국 공소 순방 기록과 파리외방선교사들의 교세통계표를 통해 춘천지역에 6개 공소(각기리·물이울·강복두루·삼밭·부구터·다라목이), 홍천지역에 2개 공소(신당 고개·보리울), 화천지역에 2개 공소(만산이·복두산), 양구지역에 1개 공소(오리골)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춘천교구의 설정과 해방 이후 시련과 발전 -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활동과 관련하여(최선혜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혼란 · 갈등 역사 겪으며 교구 초석 다져”

 

35년에 이르는 일제 침략 시기와 해방 이후 1945~48년의 미군정시기, 1950년 한국전쟁까지 춘천교구는 70년 동안 한국이 근·현대사회로 진입하면서 겪었던 혼란과 갈등의 역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이하 골롬반회)는 춘천교구 70년 역사에 깊이 관여하며 춘천교구의 초석을 다졌다.

 

춘천교구는 1939년 4월 25일 경성대목구(지금의 서울대교구)에서 지목구로 분리 · 설정됐으며 골롬반회가 그 사목을 맡았다. 1938년 11월 춘천을 시작으로 강원도 사목 활동의 문을 연 골롬반회는 춘천교구가 설정되고 발전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초대 춘천지목구장은 당시 광주지목구장 맥폴린 신부가 겸임했고, 1940년 12월 8일 퀸란 신부가 2대 지목구장을 맡았다.

 

1941년 12월 8일, 춘천교구는 지목구장 퀸란 신부를 비롯해 골롬반회 소속 선교사 11명이 수감되는 시련을 겪는다. 12월 9~10일, 그 외 모든 사제들도 체포돼 각 지역의 감옥으로 이송됐다. 1941년 12월 25일부터 1942년 12월까지 사목활동이 정지됐고 가택연금까지 당했다.

 

1945년 8월, 비로소 사목활동의 자유가 찾아왔다. 38선이 그어지면서 교구 3분의 1을 잃게 됐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신자는 꾸준히 증가했다. 퀸란신부는 교세 진작을 위해 수곡리(현 양덕원)·묵호·소양로·삼척·죽림동주교좌본당 등 새로운 본당들을 세워나갔다.

 

그러나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춘천지목구는 인적·물적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전후로 해 백응만 신부(평강본당)가 연행돼 옥사했고, 김교명 신부(의주본당)가 연행돼 행방불명됐으며, 콜리어 신부(소양로본당), 퀸란 신부(지목구장), 크로스비 신부(홍천본당)가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했다. 이 밖에도 많은 사목자들이 사선을 넘나들다 죽임을 당했다.

 

1953년 7월 27일 전쟁은 휴전됐다. 도시는 철저히 파괴됐지만 교회재건을 위한 노력 속에 개종자가 꾸준히 증가했고, 죽림동주교좌성당과 속초(현 동명동)성당도 완공됐다. 1962년 7월 26일 춘천지목구가 교구로 세워졌고, 퀸란 신부는 주교 착좌식을 가졌다.

 

당시 신자수는 1952년 8619명, 1958년 2만4281명, 1963년에는 4만2821명으로 급성장했다.

 

1961년에는 골롬반회 박 토마 주교가 ‘행복한 가정운동’을 전개했다.

 

박정희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에 대항해서다. 오늘날 자연주기법에 대한 관심과 실천은 인공 피임, 낙태 등 생명권에 대한 위협이 가장 심각한 문제며 그에 대한 최상의 대안은 자연주기법이라는 확신 하에 일찍이 ‘행복한 가정운동’ 보급에 노력해왔던 춘천교구의 공이 크다는 평가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15일, 임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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