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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원 수도회 이야기15: 파티마의성모프란치스코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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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5-28 ㅣ No.451

수원 수도회 이야기 (15) 파티마의성모프란치스코수녀회

성모님 닮은 모성의 영성으로 사도직 수행


- 수녀회 설립자 故(고) 이우철 신부는 사회의 돌봄이 필요한 무의탁 소년들과 함께 지내며 이들에게 ‘아버지’가 돼주며, 그 시대 가장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수도회 설립보다 사도직 활동이 먼저 시작된 수녀회가 있다. 바로 1969년 설립된 파티마의성모프란치스코수녀회(총원장 안호인 수녀)의 이야기다.


■ 수녀회의 시작

수녀회 설립자 故(고) 이우철 신부(1915~1984)는 수녀회 설립 20여 년 전부터 사회의 돌봄이 필요한 무의탁 소년들과 함께 지내며 이들에게 ‘아버지’가 돼줬다. 1946년 일제 해방 직후 사회적으로 혼란을 겪던 시기에 이 신부는 본당 근처 서울역을 헤매던 소년 5명을 모아 자신의 사제관에 안식처를 마련했다.

전쟁고아가 만연하던 당시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점차 늘어나자 이 신부는 1947년 의지할 곳이 필요한 소년들을 위한 ‘성심원’을 설립하게 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데다, 아이들의 수도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혼자서는 늘어난 식구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이 신부에게 봉사자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이들에게도 ‘엄마’, ‘어머니’의 역할이 필요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9년, ‘성심원’에 도움을 주던 이들을 중심으로 ‘어머니회’가 결성됐다. 이것이 수녀회의 모태이다.

수녀회의 역사를 소개한 총원장 안호인 수녀는 “사도직 활동의 필요성이 수녀회 설립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처음 서울 잠원동에 터를 잡았던 ‘성심원’은 당시 아파트 개발 사업과 함께 새로운 곳을 물색해야 했다. 주변의 땅을 알아보던 이 신부는 교구 내 용인 수지 동천동에 새 보금자리를 세우기로 했다.

1980년 당시 교구장 김남수 주교로부터 정착 허가를 받은 수녀회는 1984년 수녀원 본원 건물과 ‘성심원’의 축복식을 가졌다.

정착 초기, 수녀들은 닭 등 동물을 키우고, 본래 과수원 땅이던 수녀원 땅에서 키운 과일을 내다 파는 등 부지런히 움직이며 아이들을 보살폈다.


■ “불우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십시오.”

수녀들은 ‘성심원’에서 아이들의 ‘엄마’가 된다. 영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을 매일 아침 깨워서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에 보낸 후에야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 미사도 여느 수도회와 달리 아이들 등교시간 이후를 기준으로 오전 8시30분에 봉헌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에도 수녀들은 온갖 행정업무로 애를 쓴다. 각종 프로그램에 예산을 짜고 사진 등 기록을 남기는 일도 모두 수녀들의 몫이다. 이밖에 아이들에 대한 상담일지와 양육일지는 물론, 부모, 학교 교사와의 상담일지를 만들기도 한다.

- 설날을 맞아 윷놀이를 하고 있다.


오후 3~4시경 아이들이 돌아오면 다시 수녀들은 바빠진다. 간식을 먹이고, 학원을 챙겨 보내는 등 여느 ‘엄마’ 못지않다. 이처럼 수녀들의 24시간은 아이들 위주로 돌아간다.

수녀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데도 중점을 두고 있다. 방황하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수녀들을 만나기 전 부모에게 받았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보듬어 주고자 하는 것. 상담이 필요한 아이들은 외부의 전문 상담기관으로 보내 도움을 받도록 한다.

또한 수녀들은 아이들에게 “공부해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검도, 태권도, 기타 등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다양한 분야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인문학 교실 등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 경험을 쌓기도 한다. 안 수녀는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할 때 더 좋은 결실을 얻는다”며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것은 없다”고 밝혔다.

매년 1회 방학기간동안 아이들이 스스로 만드는 예술제 ‘스타킹’을 열고, 자율적인 참여의 결실을 공유하기도 한다.

현재 수녀회는 ‘성심원’을 비롯해 여자 청소년들을 위한 그룹홈 ‘성심효주의 집’과 영아들이 살고 있는 ‘시몬의 집’, 새터민 자녀 영·유아들을 위한 ‘성모소화의 집’ 등을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여주 ‘파티마 성모의 집’(노인복지), 충주 ‘사랑의 집’(무료 양로원) 등 각 지역에 다양한 사회복지 시설을 마련하고 있다.

이 신부는 생전 수녀들에게 “불우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십시오”라고 당부했다. 아이와 함께할 때도, 어르신들을 돌볼 때도 성모님을 닮아가는 모성의 영성으로 사도직을 펼치라는 전언이다. 수녀들은 이 신부의 이야기를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안 수녀는 “이 신부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다방면에 사랑이 많으셨던 분으로 그 시대 가장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돌보신 분”이라고 밝혔다.

수녀들은 물론, 초창기 이 신부와 함께 살았던 이들과 ‘성심원’ 출신들도 이 신부가 삶을 통해 보여줬던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맨 처음 이 신부와 함께했던 5명의 소년들 가운데 하나는 ‘장남’을 자처하며 4년 전부터 연 1회 5명의 아이들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초청, 견문을 넓히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아울러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심원’ 출신들도 동생들을 초대해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안 수녀는 “명절에 가족들을 데리고 찾아와 동생들과 미사 봉헌, 식사, 축구 등을 함께하는 모습을 보면 참 보기 좋다”고 전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3년 2월 24일, 이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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