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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판공성사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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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3-18 ㅣ No.576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판공성사 보셨나요?”


판공성사 기간이 시작되었다. 성사를 어느 기한까지 보아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다. 더욱이 화해를 청할 수는 있지만, 아직도 상대편과 편편하게 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 있을 터이면 성사기간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판공성사는 우리 교회 생활의 중심이다.

한국교회는 사제도 성당도 없이 시작되었다. 박해기간 100년 중 우리 교회는 절반이나 사제없이 살았다. 그래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대세와 보례로 이어 나왔다. 그러나 보례는 사제가 주관해야 했다. 또한 성체, 고해, 종부성사 등도 사제만의 몫이었다. 우리나라 신자들이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선교사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1794년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에도 그에게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신자는 극소수였다.

1835년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언어를 익힐 시간도 없었다. 당시 천주교는 사회에 공인되지 않았다. 신자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숨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고해를 하고 성체를 영하기 전에 자기들이 죽거나 선교사가 세상을 떠날까봐 모두 성사를 서둘렀다. 길은 멀고 험했으며,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하는 모임에도 신자들은 떼를 지어 나타났다. 20년 혹은 30년이나 묵은 그들의 기나긴 고해를 준비하는 방법을 가르쳐야만 했다. 선교사들은 가는 곳마다 회장을 임명하거나 승인하고, 신앙생활에 관한 규칙을 정해 줌으로써 신자집단의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보충했다. 그들은 판공성사를 세웠다.

박해시대 이래 선교사들은 9월에 판공성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6월까지 사목여행을 했다. ‘천사의 망토’라고들 불렀던 조선의 상복을 입고 낯선 땅을 헤매는 선교사들의 삶은 고달팠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렇게 신자를 직접 대하고 신앙생활을 지도했다. 또 신자들은 판공성사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는 날이 1년 중 이 날뿐이며, 그들이 부모처럼 공경하는 선교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뿐이었기 때문이다. 즉 판공성사는 성사라기보다는 사제들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도우려는 배려였으며 사제와 신자 간의 소통의 기회였다.

사랑과 희생을 기꺼이 감당하려는 이 특수한 선교방법은 조선교회의 독특한 선교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기나긴 박해 사이에 짬짬이 찾아온 평화기를 거쳐 이어져 온 이 사목방법은 장엄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선교사들이 순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목생활은 거의 순교자의 삶이었다. 우리 교회에 순교자가 많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 사목방법에서 하나의 원인을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판공성사는 고스란히 오늘 교회에 전해졌다.

판공성사란 한국교회의 특수용어이다. 판공성사라는 단어에는 신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교리 지식을 갖고 있는지, 신앙생활의 진보가 있는지 등을 헤아린 다음에야 받을 수 있는 성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즉 단순한 고해성사가 아니다. 판공성사의 시작이 사제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신자의무를 준행할 기회를 제공하려는 데에 있었던 만큼, 이때 사제는 신자들의 가정형편, 개인의 신앙생활 정도를 파악했다. 그리고 성교사규에 따른 고해성사를 주었다.

성교사규는 적어도 1년에 한 차례씩 고해성사를 보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칙은 13세기에 열렸던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의결된 것이었고, 이 내용이 교회법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교회법 제920조, 제989조) 또 세계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부활을 준비하면서 고해성사를 의무적으로 보도록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이 의무적 고해성사를 성탄 전과 부활 전 2회로 규정하고 있다. 이 관행은 대략 개항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신자들이 1년에 한 번 사제를 만나도 행운이었던 한국교회는 신앙의 자유가 오고 사제가 늘어나면서 사제들이 봄, 가을 공소를 방문할 정도가 되었다. 사제를 늘 만날 수 없는 신자들에 대한 배려는 많을수록 좋았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는 이 관례에 따라 부활대축일과 성탄 대축일을 중심으로 연중 두 차례의 판공성사 관행을 세우게 되었다. 성탄 전에 받는 고해성사를 가을 판공이라 했고, 부활 전의 성사를 봄 판공이라고 불렀다

판공 때의 고해는 교리와 십계명 등에 자신의 생활을 비추어 다시 점검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판공성사는 늘 찰고를 거쳐야 했다. 베네딕도회 베버 신부는 1911년의 찰고 날 풍경을 묘사한 바 있다. 즉 한낮의 열기가 잦아든 봄날 저녁, 모두 공소 앞마당에 모였다. 멍석을 깔고, 사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남자, 다른 쪽에는 여자, 가운데는 아이들이 앉았다. 어려운 질문이 나오면 유창하던 말문이 막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답변을 시원하게 했다. 전교회장은 자신의 지위에 걸맞게 답변을 거들었다. 호기심 많은 외교인들이 둘러서서 오가는 문답들을 들었다. 신자들의 자신감 넘치는 답변에 경탄하고, 사제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에 기뻐했다. 검게 탄 남자들과 할머니들이 그들의 빈한한 가사를 작파하고 공소까지 먼 길을 달려와 앳된 소녀들과 교리 암송실력을 겨루었다. 대부분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교리서를 술술 암송하고, 아이들까지 교리를 훤히 꿰고 있었다. 부모들도 그동안 아이들을 가르친 노고를 보상받고, 스스로도 열의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였다.

선교사들은 직접 나서서 판공의무를 챙겼다. 대구의 선교사 로베르 신부는 교리를 외우지 못하면 고해성사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교리공부가 늦은 지각생들을 기다렸다. 그는 판공성사를 받으러 오라고 꾸지람을 듣는 사람들이 이곳 대구에만도 2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들은 교리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찰고를 통과하지 못해 혼배성사를 할 수 없었거나 사제에게 고해실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들은 지금까지도 왕왕 회자되고 있다.

판공성사는 교인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교회의 여러 행정적인 일들이 정리된다. 판공성사는 찰고를 통과한 사람만이 성사를 보았기 때문에 이 전통이 남아서 성사표를 만들게 되었다. 오늘날 반장을 통해서 전달되는 성사표는 이미 이러한 과정을 담아서 신자 모두에게 선물로 주는 셈이다. 우리 교구에서는 1970년대부터 통일된 판공성사표를 인쇄해서 배부했다. 2001년부터는 사목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도입한 온라인 양업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신자들의 개인 신상을 파악하는 양식으로 부활 판공성사표를 배부하고 있다. 그리고 대구대교구는 1989년부터 부활 판공과 성탄 판공의 찰고 문제지를 작성해서 인쇄했다. 내용은 그해 신앙의 중심활동을 위주로 교리나 성경에 대한 질문을 한다. 교구는 이를 무료로 제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재료 원가만을 받고 보급하고 있다.

한편 판공성사의 실천 여부는 교적에 기록된다. 판공성사를 본 뒤에는 성사표를 본당에 제출해야 한다. 우리가 본당이라고 할 때는 교적이 있고, 교무금을 내며 판공성사를 보는 성당을 말한다. 따라서 판공성사를 다른 성당에서 보았다면 날인을 받아 자신의 본당에 제출해야 한다. 고해성사를 본지 얼마 되지 않아 특별히 고백해야 할 것이 없을 경우에도 교적상의 기록정리를 위해서 본당 사제에게 이야기하고 성사표를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971년부터 판공성사표 일련번호 앞에 지역명인 ‘대구’를 넣도록 했다. 그리고 교회는 박해시대부터 판공성사를 파악하고 통계 내는 일을 해왔다. 판공성사는 7세 이상의 신자 수를 세고, 어른 영세나 첫영성체는 부활판공 영성체로 통계를 잡았다. 춘추 판공의 경우에는 두 번의 판공으로 계산한다. 교회는 이 만남의 기회를 통해 냉담자를 파악하고, 교적 미정리자를 찾아내거나 교무금을 정리한다. 또 봉재(사순절) 애긍을 장려하거나 전교회원 등 활동회원 모집도 이 기회를 이용한다.

한국의 사제들은 교우들이 한꺼번에 성사를 보는 이 판공시절이 가장 바쁘다. 이 시기는 서로 사목을 도울 수밖에 없다. 박해시기에도 다른 지역 사목을 서로 도왔는데, 가을 판공 때에는 상호 형편껏 도울 수 있었지만, 봄 판공 때에는 다른 선교사를 도울 때 주교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976년부터 사목상 편의에 따라 공동고백을 실시하기도 한다. 물론 본당신부 독자적으로 하는 곳도 많다. 그래도 성사가 몰리는 바람에 1988년 당시 이문희 대주교는 판공성사에 단축형 사죄경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다.

판공성사는 한국 신자들이 그렇게 빨리 천주교를 익혀 갈 수 있었던 중심기회였다. 판공성사는 방법이 많이 변경되기는 했지만 그 의미만은 현재에도 변함이 없다. 판공성사의 관행을 세웠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면서 이렇게 말했다. “순교의 길을 떠나는 순간, 우리가 느끼는 기쁨을 덜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행복했던 3년 동안의 성사, 또 갈라디아인들이 사도 바오로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는 저 열심한 신입 교우들을 떠나는 일이다.” 신앙의 자유가 온 뒤에도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방문하는 신부의 미사 짐이 도착할 때쯤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환호했던 우리 교회였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가 사제를 존경하는 태도를 보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어린이들이 몇 명이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초기교회 신자들의 판공성사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곧바로 그들의 순교정신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도움 : 베버 『고요한 아침의 나라』 등)

[월간빛, 2013년 3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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