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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박종구 신부가 쓰는 다시보는 천주실의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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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1-16 ㅣ No.415

[다시 보는 천주실의] (11) 서양의 유가(儒家) 선비 마태오 리치

 

 

리치가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삼가(三家)는 노자를 주종(主宗)으로 하는 도가(道家)와 인도에서 전파되어 온 불가(佛家), 중국 본래의 유가(儒家)였다. 노자의 도덕경엔 무(無)와 도(道)가, 불교의 반야사상 계열 경전엔 공사상(空思想)이, 공자를 종조(宗祖)로 받드는 유가에서는 유(有)를 종(宗)으로 삼는 태극사상(太極思想)이 주류였다. 이 중에서 리치는 당시 유럽의 중세적 사유에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도가와 불가는 처음부터 문제 삼지 않았다. 게다가 도가와 불가는 유학의 본류가 송명이학(宋明理學)으로 불리던 시기엔 중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도 방외에 머물렀다. 리치도 처음 승복을 입고 중국사회에 접근했다가, 불가가 지식인 사회의 주류가 아님을 알고 유가의 선비 옷으로 바꿔 입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마태오 리치, 즉 이마두(利瑪竇)의 초상이 전형적인 유가의 선비란 사실은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리치가 불가와 도가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까’란 질문은 논외로 할 수밖에 없다. 종교적 이상과 역사적 상황이 전혀 다르게 전개되어온 동양의 사상을 통섭할 수 있기엔 아직 시기상조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리치는 도가나 불가를 형제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이치로 깨우쳐 주어야 한다는 열정적 주장을 감행했다. 유교는 이들의 주장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미워하거나 오랑캐들처럼 배척하고, 이단으로 물리치기만 했다고 지적했다. 리치의 주장에 따르면, 논리적 오류를 지적해 설득하는 것이 잘못을 비판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더 유효했던 것이다. 

 

리치는 서양의 유가처럼 도가와 불가의 기본 개념인 ‘무(無)’와 ‘공(空)’을 비판하지만, 이해의 한계만을 드러낼 뿐이다. 아직 설익은 동양사상에 대한 비판의 밑바닥에는 앞서 언급했던 서양 중세의 철학적 지식이 자리한다. 

 

‘이제 공(空)이니 무(無)니 하는 것은 절대로 자체 속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게 없다. 어떻게 형상(性, form)과 질료(形, matter)를 부여하여 물체가 되게 할 수 있는가?’(今曰 ‘空’, 曰, ‘無’者 絶無所有於己者也, 則胡能施有 ‘性’ ‘形’ 以爲物體哉). 리치에게는 문자 그대로 없는 것(無)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더구나 존재하지 않는 것의 내용은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공(空)’과 ‘무(無)’는 개체들의 운동인(作者), 형상인(模者), 질료인(質者), 목적인(爲者)이 될 수 없다”(旣謂之‘空’‘無’ 則不能爲物之作者, 模者, 質者, 爲者)는 주장이 성립한다. 

 

리치는 도가의 무(無)와 불가의 공(空)을 사상적 기반 위에서 이해하기보다 문자적 이해의 차원에 머물렀다. 리치가 도덕경의 사유와 반야심경의 드넓은 세계를 한 구절이라도 열린 마음과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면, 일방적인 유가적 시선만을 고집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리치의 한계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에 선다면, 리치의 설득 대상이 유가의 선비였기 때문에 다른 사유세계는 돌아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8월 1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12) 많은 어려움 남아있는 그리스도교 신학 논의

 

 

이와 같이 도가와 불가의 주장에 대한 리치의 이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리치는 동양사상의 심오한 이해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 아닌,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선교적 열정이 컸다. 사실 리치가 무(無)와 공(空)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도가와 불가를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유가의 교리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도가와 불가를 언급했다고 보는 게 더 나은 표현이다. 유가의 위상을 높이고 도가와 불가를 격하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유가와 대화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사(中士)의 질문 속에는 동양식 사유의 특징을 드러내며 도(道)의 의의를 드러낸다. 그리스도교의 창조개념이 미비한 동양식 사유에서 도(道) 혹은 이치(理致)는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처음에 없었다가 나중에 있게 되는 게(物者先無而後有) 사물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중국에서는 그걸 일컬어서 도(道)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에서 창조와 창조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 설명은 아주 단순할 수 있지만, 신학적 의의를 드러내는 단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피조물을 ‘시작이 있는 존재’(有始之物)라고 말한다면, 창조주는 ‘시작이 없는 존재(無始之物)’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작이 없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기 때문에 창조주 ‘이전의 없음’(先無)은 생각할 수 없다(無始者 無始不有 何時先無焉).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신앙체계임을 말해야만 한다. 리치는 아마도 그리스도교 고유의 신앙을 논하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4~5세기 고대교회(古代敎會)에서 격렬한 논쟁을 거쳐 정립된 신앙교의를 이해하기가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리치도 마지막 장에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 왔는지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고대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신앙이 신학적 정식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던 시절에도 하느님 존재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앞에서 들은 바와 같이 가능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존재론적 사유에 익숙했던 헬레니즘은 유일신 신앙에 늘 문제가 되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하느님 존재의 유일성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하고 고백하기엔 너무 힘들었던 주제였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신의 속성을 유일하신 하느님 아버지에게만 돌리고, 그리스도의 피조성을 강력히 주장한 이론들이 등장했다. 그 중 전형적인 주장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시작이 있는 존재’(有始之物)라고 말했던 것이다. 인간의 눈에 시작이 있는 존재인 그리스도(한 여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존재, 공관복음서)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고, 창조계가 그분 안에서 존재하기 시작했다(요한 1,1~3)는 주장은 일견 모순이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8월 15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13) 인격주의에 기초한 하느님 존재 이해

 

 

유럽의 중세신학에 익숙한 리치가 창조주를 말할 때 ‘하느님은 만물의 기원이며 최종원인’으로 소개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하느님 됨은 창조의 행위를 통해서 그 존재가 드러남을 의미했다. 게다가 앞에서 보았다시피, 요한복음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을 납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리치는 ‘하느님께서 꼴을 갖추지 못하고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던 카오스(chaos) 한가운데서 만물의 기원을 열었던 것’(至其渾無一物之初 是必有天主 開其原也 창세 1,1 참조)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인격주의에 기초한 하느님 존재에 대한 리치의 이해는 도가의 무(無)나 불가의 공(空)을 비판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중국선비는 이 점에 관해 ‘공(空)과 무(無)가 문자 그대로 공(空-비어 있다)과 무(無-없다)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空無者 非眞空無之謂)라고 지적하면서, ‘정신적인 요소가 아닐까’(乃神之無形無聲者耳)라고 묻는다. 그렇다면 정신적 차원에서 공(空)과 무(無)가 하느님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은 인격주의에 기초한 하느님의 이해를 넘어서는 답변을 기대할 수 없다. 유가의 태극사상(太極思想)에 대해서도 공과 무에 대한 태도에서 보는 것처럼 리치의 답변은 인격주의에 근거하면서 흔들림이 없다.

 

사상적 차원에서 태극(太極)의 연원을 깊이 탐구할 바는 아니지만, 역경(易經)의 계사전(繫辭傳)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이 표현은 도교적 관념의 유가적 변용이라 주장할 수 있겠지만(周敦?, 1017~1073), 리치는 태극(太極)이 비인격적이라는 사실 하나로 아주 간단하게 다룬다(太極非생天地之實 可知耳). 그리고 리치는 중국선비의 입을 빌려 태극은 이치(理)일 뿐으로 만물을 창조한 근원이 되지 못한다고 논증한다.

 

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範疇論)에 근거해 사물을 실체와 속성으로 이해한다. 소략하게 말한다면, 실체는 자립성(自立性)을 의미하고 속성(屬性)은 의존성(依存性)을 가리킨다. 흰말(白馬)을 예로 들면, 말은 실체이고 흰색은 속성이다. 따라서 실체성이 하나를 의미한다면 속성은 무수하게 많을 수 있다. 털의 색깔은 무수히 많아서 말(馬)을 구별할 수 있지만, 말(馬)이란 사실에는 구분이 없다. 태극이 천지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태극을 이치(理)로 해석할 때, 이(理)는 자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理)가 ‘사람의 마음에 있다’(在人心-육상산(陸象山), 1139-1192)고 하든, ‘사물에 있다’(在事物 주희(朱熹), 1130~1200)고 하든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의거하여 이치(理)를 속성이라고 설명했다. 실체와 속성의 존재를 시간적 선후 관념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리치로서는 아주 당연한 판단이고 해석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우주의 발생 초기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속성에 불과한 이(理)가 존재의 자립성이나 독립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가톨릭신문, 2010년 8월 22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14) 자연철학에 기초한 ‘이(理) · 기(氣)’ 이해

 

 

리치의 생각에 ‘이(理)’는 경험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개념일 뿐이다. 이(理)는 이치(理致)이며 관념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리치는 이렇게 설명한다.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수레를 예로 들어, 수레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속에 이(理)가 있다고 해도 이(理) 자체가 수레를 만들지는 못한다. 이(理)는 수레를 완성하기 위해 나무와 같은 재료나 도구와 같은 질료(이를 일컬어 질료인)와 기술자의 노동(노동인)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理)는 하느님 존재와 같이 창조주도 아니고, 만물의 최종 원인이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태극사상에 따르면, 이(理)는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을 낳고 오행은 천지만물을 낳는다. 리치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동양의 사유세계를 심각하게 통찰했을 것이다. 아마도 언어와 사유의 틀이 다른 두 세계가 부드럽게 만나기 위해 파괴적 충격을 피할 방법을 찾고자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도 그러하지만, 이(理)와 기(氣)의 세계로 표현되는 동양적 사유세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기초해서 분석한다는 것은 그렇게 분명한 일이 아니었다.

 

리치가 “이(理)는 이성능력과 지성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 리치는 서양식 이성과 지성의 발휘를 전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있는 이 능력들은 이 능력들을 초월하는 신(神) 존재를 전제하고, 이 토대 위에서 창조계의 질서를 생각하고 있다. 이(理)를 존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면, 리치는 실존적 차원에서 이(理)를 다루고 있었다. 존재의 차원에서 언급되어야 할 이(理)를 현실세계의 차원에서 언급하는 것은 사실 의미부여하기가 어렵다. 이(理)는 자연세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선택된 표현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자연세계의 배후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개념인 것이다. 

 

그리스 철학의 커다란 갈래를 이룬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철학적)범주론에 기초하고 있다. 범주론은 긴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쳐 왔지만 근본적으로 ‘사물의 일반적 분류’라는 뜻을 함축하고, 이(理)에서 여러 방법적 인식론이 제시되었다. 인식론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 방법이지만, 인간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 그리고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한 최종근거 내지 초월적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사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만큼 그 표현도 다르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두 세계가 전개하는 논리는 만나는 것 자체를 꺼리기도 한다. ‘이(理)가 움직여서 양(陽)을 낳았다(理動而生陽)’를 근거로 양(陽)을 이성능력이나 지성능력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빗나간 논리가 될 것이다. 양(陽)을 사물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음양(陰陽)은 사물의 실존 차원에서 출발한 개념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현상을 이원론적 대립 구조에서 파악하려는 언어인 것이다. 이런 개념어가 리치에게 자연세상을 이해하는 언어로 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익숙한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경험세계를 이해하는 언어가 경험세계를 포함하되 그것을 초월하는 세계를 쉽게 다룰 수는 없다. [가톨릭신문, 2010년 9월 12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15) 추상적 관념으로 이해한 태극(太極) 개념

 

 

마태오 리치와 중국 선비가 서로 오해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을 느낀다면 두 개의 사유가 제대로 만나지 못한 이유가 해소되어야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태극(太極)이 하느님이요 천지 만물의 시조라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신(神) 존재의 고대 중국식 이름이거나 다른 관용어로 매김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시기엔 인문학적 사유가 극도로 진행된 성리학의 사유에서 종교적 요소는 많이 탈색해 있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적 신(神)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당연히 최고의 존재를 설명하는 생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던 세상에서 이 질문은 다른 추상적 답변을 가져올 뿐이다. 

 

주돈이(周敦 ·1017~1073)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해석하는 논의조차 중국학자들의 일치는 거의 불가능했다.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을 동일 명칭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태극의 본원을 무극으로 이해할 것인지 일치된 견해를 찾을 수 없다. 더구나 사상적 논의를 단순히 자연철학에 근거하여 이해하고자 할 때 얼마나 커다란 오해를 가져올 것인가? 리치에게 태극(太極)은 그저 추상적 관념 혹은 허망한 생각(虛象)이며 실제적 내용이 없고 믿을 만한 이치(理)가 아니었다. 어찌하여 태극(太極)은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다시 한 번 사물의 범주를 실체(自立者·substantia)와 속성(依賴者·accidentia)으로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생각해 보자. 범주론에 따르면, 실체는 고정적이며 자립적이고 속성은 가변적이며 임시적이다. 따라서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은 다른 개체의 도움 없이 실재하는 것으로 1차적이며, 속성은 실체에 의탁하여 성질을 밝혀주기 때문에 2차적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중국학자들이 이(理)를 마음과 동일시하거나(陸九淵·1139~1192, 王守仁·1472~1528) 사물 속에 내재한다는 사실(程 1033~1107, 朱熹·1130~1200)은 이(理)의 속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사물이 있고 난 뒤에 이(理)의 존재를 말하게 된 것이니, 자연철학적 사유에 익숙한 리치에게 이(理)는 속성에 불과할 뿐이다. 존재에 있어 1차적인 것을 앞서지 못하는 2차적인 이(理)는 실체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리치는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理)가 존재하지 않으면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無其理則無其物).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理)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理)가 만물의 근원(理爲物之原也)이라고 주장했다면(周敦?), 리치가 이해하는 기반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해석은 유효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이해는 이(理)를 관념에 머물게 하고 자연사물의 실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존재물의 생성에 대해 동양식 해설은 먼저 형이상학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자연사물에 이른다. 말하자면 이(理)가 먼저 음양과 오행을 낳고 연후에 천지만물을 조화 생성시킨다(理者先生陰陽五行, 然後化生天地萬物). 그렇다면 자연세계의 창조주를 염두에 둔 그리스도교적 창조사상과 이(理)를 천지만물의 발생근원으로 보는 생각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가톨릭신문, 2010년 9월 19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16) 이(理) · 태극(太極)과 본질적으로 다른 천주

 

 

이(理)를 관념적 개념으로 치부하는 리치의 해석에 중국선비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리치가 관념적 이(理)를 해설하기 위해 예시한 수레바퀴의 제작여부에 대해 중국선비는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리치는 이의에 대해 다시 수레의 이(理)를 자연적 실체 개념에 빗대어 수레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를 들어 이(理)가 헛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리치가 생각하는 자연철학적 사유가 중국의 형이상학적 사유와 어긋남을 보게 된다. 자연철학적 사유 틀에서 볼 때 이(理)는 절대로 이에 상응하는 개념을 찾을 수도 없고 해설도 불가능하다. 창조주 사상은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언급될 수 있는 것이지 자연과학적 차원에서 언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곧 출간될 자신의 저서 「거대한 설계(The Grand Design)」에서 우주창조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무신론적 태도를 보였다. 창조는 신(神)과 관계없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발생한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과학적 태도는 호킹의 말대로 경험세계에 대한 관찰과 인간 이성에 기초한 성격에서 출발한다. 완전한 물리학 이론을 발견하는 순간 신(神)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여기서 출발했다. 사실 물리세계에서 확인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종교의 신앙고백은 자연과학적 관찰에 갇힐 수 없다. 이론은 늘 보강되어야 할 이론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리치가 이(理)의 성격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삼혼설(三魂說)에 근거해 규정하는 사실을 들어보자. 생혼(生魂-식물혼), 각혼(覺魂-동물혼), 영혼(靈魂)을 분류해 인간은 영혼을 지니고 있으니 인간만이 인간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이(理)는 이성능력도 지각능력도 없으니 이성능력이나 지각능력을 만들어 낼 수 없다(理無靈無覺, 則不能生靈生覺). 이(理)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무형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理)에 이성능력이나 지각능력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중국선비의 입을 빌려 질문을 던지게 하지만, 태극(太極)이나 이(理)를 자연철학적 범주에 가두고 있다면 여전히 어긋난 질문과 답변으로 진행될 뿐이다.

 

리치의 생각을 좀 더 들어보자. 천주는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으나 형체와 소리가 있는 천지만물을 만들 수 있다(天主無形無聲 而能施萬象有形有聲). 그러나 천주는 이(理)나 태극(太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다름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의지해 리치는 설명을 계속한다. 이 설명에 따를 때, 천주와 이(理)의 차이는 아마도 이(理)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이(理)가 천지만물에 내재해 있다고 한다면, 천주는 천지만물이 헤아릴 수 없는 고귀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다. 하느님의 초월성을 이해하고 있던 세상에서 이(理)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에 따르면 속성에 준할 뿐이고, 천주는 실체의 범주에 속한다. 천주는 오직 한 분으로 천지만물에 깃들어 있는 수많은 이(理)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위에 리치는 천주의 유일성을 상서(尙書)와 예기(禮記) 등을 인용해 상제(上帝)와 천주를 동일시하여 자신의 주장을 논증한다. [가톨릭신문, 2010년 10월 3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17) 유교의 상제(上帝)와 그리스도교의 천주(天主)

 

 

우리(그리스도교)의 천주(天主)는 옛 경전에서 말하는 상제(上帝)이다(吾天主乃古經所稱上帝也). 이는 리치의 단언이다. 후에 예수회 내에서 논의를 거쳐 상제(上帝)를 버리고 천주(天主)를 택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색채를 강조하고 중국적 전통의 영향을 덜어내기 위한 조치였다.

 

그렇다면 리치가 주장하듯이 상제(上帝)와 천주(天主)는 단지 이름만 다를 뿐인가?

 

눈여겨 읽어보면, 리치가 인용하는 구절들은 상제(上帝)를 창조주로 해설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상제는 인륜지덕(人倫之德)을 베푸는 존재로 나타난다.(II-14) 또 리치는 천주의 유일신론적(唯一神論的) 특성과 무한성을 언급하기 위해 한자(漢字)를 간단하게 파자(跛者)하기도 한다. 천(天)을 상제(上帝)로 해석할 수 있다(如以天解上帝得之矣)고 말하면서 하늘(天)은 하나(一)이며 크다(大)라고 언급하기도 했다(天者一大耳).

 

그렇다면 천(天)을 제(帝)와 동일시하고, 천(天)을 이(理)와 동일시한 성리학자들의 주석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이(程?, 1037-1107년)는, 형체로 말하면 하늘(天)이요, 주재(主宰)의 측면에서 말하면 상제(上帝: 하느님)요, 본성으로 말하면 으뜸(乾)이라고 말했다. (程 更加詳曰 以形體謂天,以主宰謂帝, 以性情謂乾). 정이(程?)는 철학적 체용(體用)의 개념적 틀을 통해 초월적 존재를 해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주자(朱子)는 제(帝)를 하늘(天)로, 하늘을 이(理)로 풀이하기도 했다. 이런 해석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관념을 멀리 하고, 철학적 관념으로 소화했던 생각이 자리한다. 하늘의 존재를 인격적으로 보는가 하면, 만물의 본성적 원인으로 이해하거나, 인간의 눈에 자연천의 개념에서 볼 수 있는 하늘로도 이해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인격적 관점이 강조된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하느님 관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 어떤 어려움이 발생할까? 그 한 가지 예를 서양의 근대사상에 이르러 볼 수가 있다.

 

서양의 계몽주의 이래 근대사상이 발흥하면서 철학은 전통 신학의 주장을 거슬러 자주성을 외쳤고, 그리스도교는 아주 커다란 상실을 경험하였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지난 3세기 동안 서양철학이 선포한 자주성에 대해 방어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아직도 이런 긴장과 갈등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어찌 보면 중국은 서양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공자시대 이후) 점진적으로 이 과정을 진행시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 이후 천 여년이 지난 뒤, 원시유가에서 출발한 성리학은 리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탈종교적 철학화 과정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이 끊임없이 탈종교화의 과정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정이(程?)의 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종교적 특성을 완전하게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늘과 땅 혹은 하늘과 인간의 일치를 중하게 여기는 동양사상에서 수신(修身) 혹은 수행(修行)은 인간이 궁극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취해야 할 근본적 실천태도였기 때문이다. 이런 바탕에서 천지(天地)의 존귀함을 말하거나, 천지를 부모로 존경했다는 말은 사실주의적 언어가 아님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동양에서는 인간의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존재나 현상을 정의가 불가능한 천(天)과 같은 용어로 은유적 혹은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10월 17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18) 인간에 대한 탐구

 

 

마태오 리치는 이(理)가 천지(天地)와 천지간(天地間) 만물의 주재자가 될 수 없음을 강력히 피력했다. 그리하여 최고 정신성을 나타내는 하느님의 본성에 반하는 표현으로 이(理)를 거부한 것이다. 특별히 성리학(性理學)에서 말하는 이(理)를 극력 거부함으로써 이(理)의 위치를 각하시켰다. 이와 같이 리치가 천지(天地)를 형이하학적 존재로 파악할 때(但知事有色之天地)(II-2-16), 그의 비판은 더욱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우리가 충분히 지혜롭다면, 유형의 천지를 보고 ‘형체는 없으나 하늘보다 앞서 있는 존재’(以尊無形之先天)를 받들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물론 리치의 견해는 당대의 신학과 철학적 사유의 기반을 고려하면 당연한 사유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리치는 이 논의를 통해 천주론(天主論)이라 말할 수 있는 논술을 짧게 두 편으로 마감한다. 달리 말하면, 중세신학의 전통에서 의미하는 ‘하느님 개념’을 성리학적 서술방식을 통해 이해시키고자 했던 대화의 산물이 되었다. 

 

리치는 첫 번째 두 편에서 천주(天主)를 논하고 난 뒤, 비로소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창조물인 인간 탐구를 시도한다(상권 3편). 그는 중국 선비의 입을 통해 동양의 사생관(死生觀)을 이렇게 요약 기술한다. 인간의 삶은, ‘군자는 마음을 수고롭게 하며 소인은 몸을 수고롭게 한다(君子勞心, 小人勞力 孟子, 藤文公 上)’로 요약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동양적 인간관의 궁극적 목표가 성인(聖人)이 되는 길이라면, 모든 사람(군자이건 소인이건)은 노심초사(勞心焦思)할 수밖에 없다. 현세의 고통과 번뇌를 극복하여 성인이 되는 길, 곧 ‘마음으로 애쓰고(勞心), 몸을 사용하여 애쓰는 것(勞力)’ 모두 세상의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세상의 삶을 어렵게 살아가는 동안에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니 그 삶은 죽음으로 마감하게 된다. 중국의 선비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현세의 도리도 미처 깨닫지 못한다면, 이런 도리를 초월하는 다른 도리는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然則人之道, 人猶味曉, 況于他道?)(III-1)

 

더구나 한 인간의 삶을 일반적 차원에서 간단히 기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사회적 차원의 삶은 더욱 복잡하다. 이런 문제에 대해 모든 종교가 각자 정도(正道)를 외치고 있지만, 세상은 더욱 혼탁하고 어지럽다. 윗사람들과 아랫사람들이 서로 능멸하며 업신여기고, 군주와 신하, 형과 아우, 부모와 자식, 아비와 어미가 서로 갈리는 세상에서 사람들 모두가 서로 속고 속이니 진실을 회복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이렇듯이 고통이 한 개인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천하를 휩쓸고 있으니, 하느님은 어찌하여 이런 환난의 세상에 인간을 태어나게 했으며, 참으로 하느님의 인간사랑은 짐승사랑보다 못한 것은 아닌가?(不知天主何故生人于此患難之處, 則其愛人, 反似不如禽獸焉) 고통에 대한 종교의 해법은 늘 현실과 모순된 것처럼 보이니 참으로 알 수 없다.

 

중국선비가 고백하듯이 인간의 고통은 실존 차원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질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본질적이어서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각자의 답변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종교의 신앙을 고백하는 어느 누구도 고통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게 우리의 체험이다. 고통은 인간 실존의 모든 차원에서 경험되는 현상으로 특정 종교의 응답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 만큼 인간의 삶에서 고통의 문제는 지극히 심각한 주제이며 대답하기 지난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통에 대해 중국선비가 던진 질문에 리치가 제시한 답변은 어떠한가? [가톨릭신문, 2010년 10월 24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19) 세상의 고통이 상존(常存)하는 이유

 

 

마태오 리치는 세상의 고통이 상존(常存)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세상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니, 세상에 대한 애착이 고통의 근원이 된다. 고통의 근원을 알면서도 인간은 어리석은 마음에 세상을 연모하고 세상에서 그 마음을 떼어내질 못한다(世上有如此患難, 而吾癡心猶戀愛之, 不能割). 한마디로 우리 인간의 마음은 혼미하고 어리석어 고통의 근원인 세상에서 겉으로 위대해 보이는 일을 성취하고 싶어 한다. 세상 가치에 기준을 둔 인간의 일이 모두 위태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리치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흑랍, 黑蠟, 기원전 약 540-480년)와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덕목, 德牧, 기원전 460-370년)의 말을 예로 제시한다. 세상 사람들이 헛된 일을 따르는 것을 두고 헤라클레이토스(‘만물은 유전한다’고 주장: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의미하는 표현)와 데모크리토스는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한쪽은 ‘겔라시노스’(Gelasinos, 웃는 철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늘 웃었고, 다른쪽은 늘 울었다. 웃는 이유는 세상 사람의 헛된 수고를 비웃었기 때문이고, 항상 울었던 까닭은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다. 또 리치는 다른 예를 들면서,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세상에 태어남을 울면서 조문하던 풍습에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축하했다는 고사(故事)를 언급한다. 물론 리치는 이런 예들이 지나치게 한 면만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현세의 실상을 잘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인간이 잠시 살다가 지나가는 곳이니 평안하지도 않고 만족할 수도 없다. 현세는 잠시 머무는 곳이요,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본향은 현세에 있지 않고 내세(天)에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족할 수 있지만,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세를 동물의 세계에 비유한다면, (내세의) 하늘은 인간이 가야 할 곳이다. 달리 말하면, 현세를 인간의 본래적 삶의 터전으로 여기는 것은 (금수의 무리가 취하는) 동물적 태도이니 하느님께서 이런 인간을 각박하게 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以今世爲本處所者 禽獸之徒也. 以天主爲薄於人 固無怪耳) (III-1)

 

그렇다면 리치가 주장하는 내세의 천국론(天國論)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인가? 리치의 말에서 보듯이 유가나 불가에서도 살인을 금지하지만, 이 사실 하나만으로 두 가르침의 동일성을 주장하기에는 다른 교리의 차이가 너무 크다. 게다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불가나 유가의 가르침의 차이를 리치가 설명하는 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불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리치의 발언은 사실 유가를 설득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러하다. 도(道)를 닦는 자는 후세에 천국에 들어가 무한한 복락을 누릴 것이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재앙을 면하게 될 것이다.(修道者後世必登天堂, 受無窮之樂, 免墮地獄受不息之殃) 이와 같은 영복(永福)과 영벌(永罰)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오히려 인간 영혼의 영생과 불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게 낫다. [가톨릭신문, 2010년 10월 31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0) 인간의 영혼은 소멸되지 않는다

 

 

당연히 내세에 대한 개념이 없는 중국선비에게 영원한 생명(常生)과 무한한 복락(無窮之樂)은 낯선 의미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욕망하는 인간의 끝없는 소망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그렇다면 애욕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혼(魂)과 백(魄)의 결합체로 죽으면 백(魄)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魂)은 불멸의 존재로 남는다(常在不滅). 구체적으로 리치는 세상의 혼(魂)을 3품설(品說)-생혼(生魂), 각혼(覺魂), 영혼(靈魂)-에 따라 설명한다. 생혼은 초목의 혼이며, 각혼은 동물의 혼으로 죽으면 모두 소멸된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몸이 죽더라도 혼은 죽지 않는다. 게다가 생혼과 각혼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성장하고 사물의 실상을 자각할 수 있다. 생혼이나 각혼은 몸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사라지는 게 당연하지만, 생각하고 추리하는 능력은 영혼의 특성이므로 몸이 죽더라도 사라질 수 없다. 그러면 소멸의 운명을 의미하는 ‘몸에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인간은 오감(五感)을 몸에 의지한다. 말하자면, 이목구비(耳目口鼻)의 기능은 듣는 것, 보는 것, 맛보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등이다. 이목구비의 작용은 이목구비가 존재할 때에만 작동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대상이 있어도 듣지도, 보지도, 맛보지도, 냄새를 맡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각혼과 같이 몸에 의지해 있으면, 몸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허나 사람은 배고플 때라도 먹는 것이 도의(道義)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먹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몸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소멸되지 않고 상재불멸(常在不滅)하는 까닭이다.

 

리치는 상재불멸의 원칙을 거스르는 현상을 두고 소멸의 원인은 서로 어긋남(常悖)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불, 공기, 물, 흙(火氣水土) 네 원소(四行)로 결합되어 생성소멸의 운명에 놓여 있다. 불과 물(의 기운)은 서로 배치되고, 공기와 흙(의 기운 혹은 성질) 또한 배치된다. 이와 같이 4 원소들은 서로 배치되고 상치하니 필연적으로 서로를 해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네 원소를 가진 사물은 소멸되지 않을 수 없다(故此有四行之物, 無有不泯滅者). 

 

인간 존재에 대한 리치의 설명은 고대 헬라 철학에서 유래한다. 헬라 철학자들은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탈레스(Thales, 기원전 624/40-546년)는 물(水)을 우주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했고,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기원전 ?-525년)는 공기를,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546년)는 비경험적이며 규정하기 어려운 아페이론(Apeiron)을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시칠리아 태생의 헬라 철학자, 기원전 대략 493-433년)에 이르면 만물의 근원을 단수(單數)가 아니라 지수화풍(地水火風, 리치의 표현으로는 火氣水土)의 4원소로 보게 된다. 물론 이런 설명은 고대의 헬라 철학전통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대 상념의 존재론적 표시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와 같이 4원소가 물질이기 때문에 모든 물질 존재가 소멸생성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물질이 아닌 정신으로서 영혼은 존재의 모순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11월 7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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