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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축일의 의미: 해롤드 래미스 감독 사랑의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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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10 ㅣ No.611

[서석희 신부의 영화 속 복음여행] (5) 영화 속 축일의 의미 - 주님 봉헌 축일, 해롤드 래미스 감독 '사랑의 블랙홀'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 봉헌의 삶으로 희망 찾아


1. 해마다 전례시기는 반복된다. 일상의 달력이 그러하듯, 교회력도 세속적 일상 안에서 언제나 그 나름의 고귀한 의미를 담고 우리 삶의 중심에 있다. 대림 - 연중 - 사순 - 부활 - 연중으로 이어지는 1년의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를 기념하고 하느님 은총을 구하며 자기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전례시기나 성인들의 축일을 직접 주제로 해서 내용을 다루지는 않더라도 은근히 그 의미나 주제를 함축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영화들이 있다. '40 데이즈 40 나이트'(40 Days And 40 Nights, 2002)처럼 사순시기 40일 동안 금욕생활을 하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코믹하게 다룬 영화나, 성탄시기를 배경으로 한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 같은 영화가 그것이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그 안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영화를 영적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 가운데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3)은 전례와 문화를 함께 이해해야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는 영화다.
 

미국의 경칩 '그라운드호그 데이'

2. 우선 영화 제목부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 제목은 '그라운드호그 데이'인데, 우리말 제목은 '사랑의 블랙홀'이다.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매년 2월 2일에 열리는 봄을 예언하는 축제일로서 그라운드호그(Groundhog) 혹은 마멋(marmot)이라는, 다람쥐를 닮은 모습에 몸집은 토끼만한 동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겨울이 얼마 남았는지 점치는 날이라고 한다. 이 축제는 지겨운 겨울이 빨리 끝나고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축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경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 진심을 담아 정성스럽게 리타 얼굴을 얼음 조각하는 필.


원래 2월 2일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날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날은 성모 마리아가 모세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고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한 것(루카 2,22-38)을 기념하는 날로 '주님 봉헌 축일'이라 불린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이날을 초 축복 날로 정해 초를 축복하고 촛불행렬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에게 구원의 빛이 되신 것을 기념한다고 해서 성촉절(聖燭節, Candlema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통적인 '주님 봉헌 축일'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봄을 기다리는 행사 의미가 더해지면서 '그라운드호그 데이'라는 모두가 기념하는 축제가 된 것이다.
 
우리말 제목 '사랑의 블랙홀'은 원래 제목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서양 문화와 그리스도교에 낯선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짤막하게 줄여서 제목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제목은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시간의 블랙홀에 빠지게 돼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가 원래 영어제목과 결합하면서 영화를 더욱 전례적이고 영성적으로 해석하게 하는 묘한 아이러니를 지닌다.


시간의 블랙홀에 빠져든 '성촉절'

변화된 필 모습에 감격해 '가치 있는 사람' 경매에 자신의 지갑을 통째로 거는 리타.


3. 기상 캐스터인 필 코너스는 나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일상세계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늘 냉소적인 표정으로 살아간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한 흥미나 애착도 없으면서 동시에 직장동료들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으로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느 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펑추토니(Punxsutawney)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성촉절 축제를 취재하게 되는데, 그것마저도 내키지 않아서 프로듀서 리타, 카메라맨 래리와 그곳에 도착한 후 건성으로 취재를 마치고 빨리 되돌아오려고 한다. 그런데 그만 폭설에 고속도로가 막혀 어쩔 수 없이 모텔에서 하룻밤 더 지내게 된다.

다음날 눈을 뜨는데 어제가 반복된다. 마치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의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다음날 아침 6시가 되면 어김없이 자동으로 라디오가 켜지면서 아나운서가 성촉절 축제날이라고 알리는 똑같은 방송이 나오고, 식당에서 늘 같은 사람을 만나고, 자신에게 구걸하는 노숙자와 늘 나타나는 고교동창인 보험외판원에게 바쁘다고 거절하고 길을 건너는 도중 깨진 보도에 발을 빠트려서 바지를 버리는 것까지 똑같이 반복되고, 축제에 참여해 방송을 해도, 그 다음날 아침이 되면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적으로 다시 시작된다.

 

매일 아침 똑같이 반복되는 시간.

 

 

처음에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의심도 하고 마구 짜증을 내기도 하던 필은 마침내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를 즐기는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 어차피 반복되는 것이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책임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펑추토니라는 마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였기에 그는 현금우송차량에서 몰래 거액의 돈을 탈취해 마음껏 쓰기도 하고, 매일매일 반복해서 같은 여자에게 접근해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결혼까지 약속하고 하룻밤을 보낸다. 그렇게 해도 어차피 내일이면 모르는 사이가 될 테니까 마음껏 막가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다 그는 평소 마음에 두었던 프로듀서 리타를 정복(?)하기로 결심하고 매일같이 똑같은 작업을 건 결과 데이트까지는 성공하지만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데는 끝내 실패한다. 마침내 필은 자신에게 내린 이 저주가 바로 마멋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멋을 훔쳐내 함께 차를 타고 절벽으로 떨어져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눈을 떠보면 여전히 아침 6시가 되어 자동으로 라디오가 켜지고 성촉절 축제날이라는 아나운서의 입담은 여전하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루는 계속되고,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었던 그는 이제 자신의 태도를 새롭게 바꾸기 시작한다. 거액의 피아노 과외를 받고, 얼음 조각도 배운다. 자신을 불평꾼으로만 생각하며 바라보는 리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필은 점차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실제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을 이미 알고 있기에 거리에서 죽어가는 할아버지에게 따스한 음식을 대접하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구하기도 한다. 식당에서 급체한 환자를 구해주고 구걸하는 노숙자를 도와주며 보험외판원인 동창이 권하는 보험에도 기꺼이 가입한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필 코너스는 저녁 쯤 돼서는 마을에서 꽤 유명해질 만큼 영웅이 된다. 헤아릴 수 없는 오늘의 반복 속에서 필은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법, 마음을 진심으로 나누는 법을 알게 되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얼음 위에 정성스럽게 조각한 리타의 얼굴을 리타에게 선물한다. 이에 감동한 리타는 그날 밤 필의 곁에 함께 있어 준다. 그 다음날, 지겹게 끝도 없이 혼자만 맞이해야 했던 2월 2일이 가고 필은 2월 3일을 리타와 함께 맞이한다.

취재 현장의 필.
 

4. 참으로 기발한 착상과 발상에서 비롯된 '사랑의 블랙홀'은 그 뛰어난 재기와 기막힌 익살이 조화를 잘 이루면서도 이만큼 완벽한 코미디는 찾기가 쉽지 않을 만큼 내용의 깊이도 수준급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주어진 그토록 무거운 우리 일상과 운명의 의미를 이렇게 코믹하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 것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영화 속 필 코너스는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급기야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태도를 취한다. 그러다가 그에게 변화의 계기가 주어지는데, 그는 프로듀서 리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 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자신이 변화돼 가는 것을 느끼고, 그때부터 표정이 밝아지며 웃음이 머물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저 시험 삼아 리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돼보자고 시도했으나 차츰 진심으로 리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영화는 필이 얼마나 가치 있게 변했는지를 파티장에서 '가치 있는 사람 뽑기' 경매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변화된 필의 모습에 감격한 리타는 자신의지갑에 있는 전부를 배팅한다. 전부를 걸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 제목은 영화의 표피적 상황을 그대로 제목으로 옮긴 것이지만, 원제목이 지닌 전례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진정한 봉헌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성촉절'과 '주님 봉헌 축일'이 그 의미를 강조하면서 영화 이야기의 심층에 자리하고 있다.
 
필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수많은 반복을 통한 깨달음을 통해서다. 매사에 불평불만에 차고 늘 자기중심적인 그의 하루가 2월 2일에 봉헌되지만 접수되지는 않는다. 그 다음날이 전날과 똑같이 지속되지 않는 것이 그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변모돼 하루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이웃을 위한 사람으로 자신의 하루를 봉헌했을 때, 이제 그의 일상은 더 이상 블랙홀에 빠지지 않는다. 그의 봉헌이 접수된 것이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원 제목에 담겨진, '주님 봉헌 축일'의 의미가 되살아난다. 이렇게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봉헌의 가치에 대한 전례적 의미를 심층 깊숙이에 간직하면서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는 따스한 헌신, 분명한 한계 속에서도 자기 시간과 능력과 물질을 나누려는 겸손한 자세가 권태로운 일상을 희망 가득한 삶으로, 유한한 인생을 무한한 의미로 확장시키는 것임을 멋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평화신문, 2012년 4월 1일, 서석희 신부(전주교구, 서강대 영상대학원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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