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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3: 하느님의 백성, 그리고 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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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1-19 ㅣ No.410

[신앙의 해 특집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 (3) 하느님의 백성, 그리고 친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요한 바오로 6세 교황은 교회를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가시적인 계획”으로 칭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드러난 하느님 구원계획이며,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로 선언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어서 이렇게 이해된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서 드러나는지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1. 세상에 드러난 교회의 내부 모습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특히 중세 시대에 세상에 드러난 교회의 모습은 수직적인 피라미드식 계급사회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는 역사 안에 점철된 수많은 요인들의 영향에서 교회도 예외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는 소명을 어느 한 순간도 저버린 적이 없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세상의 권력과 섞이고 또 분열하는 가운데 ‘신앙의 진리’를 수호하고 관리하는 가시적인 조직체(‘완전한 사회’ Societas perfecta)로 자신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라는 엄격한 신분상의 ‘차이와 구분’만이 부각되는 3등분적 사고의 고착화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전례와 성사’를 거행하고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소명을 가진 성직자들은 세상에 살아가는 평신도들과는 다르게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는 특권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아울러 복음의 권고를 따르는 수도자들마저 세상과는 다른 완덕을 추구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하면서 평신도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특별한 영성을 가진 자들로 정체성을 찾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평신도들은 이들과는 동떨어진 ‘세상 안에서’ 이들의 모범과 가르침에 의지하고 순종해야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자신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는 제한적 시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자신과 자신이 서 있는 세상의 의미를 근원에서부터 재고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근원에서 보고자 했던 이런 시각은 한발 더 나아가 교회 내부를 성찰하는 시도로 당연히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공의회는 가장 먼저 또 쉽게 눈에 띄는 교계제도보다 그 교계제도를 포함한 모든 교회의 구성원 전부에게 주어져 있는 우선적인 특성, 바로 공통성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가시적인 어떤 것보다 인간을 창조하셨으나 자신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하는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이 우선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는 우리 구원을 위해 부족한(‘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기까지!’) 것까지 포함됩니다.


2. 교회는 하느님 백성 - 친교와 ‘신앙감’

교회는 인간이 전면에 나서는 어떤 기관이나 높고 낮음이라는 신분으로 짜인 조직체와는 다른 무엇입니다. 이런 연유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오로지 하느님께 속해 있는 ‘하느님 백성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는 구원의 신비가 드러나는 곳은 세상이고, 그 세상에는 그 구원의 신비에로 불린 하느님의 백성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예수님을 준비하는 구약적 하느님의 백성으로 드러났듯이, 예수님을 통해 선택된 제자들과 함께 교회도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구체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왕국이 지상적인 모습으로 주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보다 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친교(Communio)’의 방식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자, 그리고 당신이 누리고 계신 ‘성부와 성령과의 친교’에로 우리 인간을 모으시고자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교회의 존재방식은 ‘친교에로의 봉사’ 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단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세상에 당신의 일을 시작하시고자 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유로운 구원의지와 주도권, 바로 진실로 하느님만이 백성의 주인이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당위성과 명령이 교회의 존재방식에는 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 어느 누구도 자연적이고 생물적인 출생만으로는 이 구원으로 불린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세례성사를 통해야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는 ‘장소나 시간’이라는 ‘현실적 요건’과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라는 ‘구분과 분리’를 뛰어넘어, 그 이전에 우리에게 세례로 주어진 ‘보편적 세례은총의 결과’입니다. 실제로 세례성사의 은총은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세례 받은 자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성별되게 해 주고 나아가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되게 함으로써 마침내 친교에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줍니다. 교회는 이를 세례를 받는 모든 자가 받게 되는 ‘성령의 은사’와 더불어 ‘신앙감(Sensus fidelium)’이라 부르는데, 이 ‘성령의 은사’와 ‘신앙감’은 우리 모두가 구체적인 교회의 존재방식(‘친교에로의 봉사’)으로 살아가도록 해주는 기반을 마련해줍니다.


3. 친교에 봉사하는 교계제도 - 은사의 장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교회의 존재방식을 재고하면서 역사 안에서 피라미드식 구조로 오해되기도 했던 교회의 내부모습을 다시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 결과 ‘교계제도(Hierarchia)’가 ‘차이와 구분’을 위한 인간적이고 법적인 제도만이 아님을 깨닫기에 이릅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살아가시면서 보여주고자 했던 ‘하느님과의 친교’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예수님 고민의 흔적이요 배려의 도구’라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질그릇’(2코린 4,7참조) 같이 현세적이고 가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마지막 날까지 부족한 인간이 당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의 선택’이었고, 아울러 우리 인간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그것을 행하시기 위한 ‘선물’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 가능하게 된 것은 세례를 통해서 주어져 있는 ‘성령의 은사’와 ‘신앙감’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계제도(성직자-수도자-평신도)는 교회의 존재방식인 ‘친교에로의 봉사’를 위해 주어진 ‘순례복’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령 가시적인 것 안에 ‘차이와 구별’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오히려 보다 효과적으로 ‘친교에 봉사’하기 위한 하느님의 주도권이 드러나는 장소, 바로 은사의 장소임을 나타내는 의도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4. 구체적인 친교 - 친교의 성사인 교회

교회 안에서 ‘친교’라는 말을 듣게 될 경우 우리는 이를 지나치게 추상적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친교는 ‘교회의 존재방식’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것’이지 ‘머릿속으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머무르는’ 관념적 이상향과 같은 목표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친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을 실제로 이루셨고, 이와 함께 지금 이순간도 구원을 이루시며 살아가신다는 점을 드러내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그 친교의 모습을 ‘성체성사의 신비’를 통해 실제로 매일 체험하고 거기서 다시 힘을 얻습니다. 지면상 성체성사의 신학을 다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부족하기만 한 우리이지만 감히 그 ‘친교’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누리고 계신 ‘성부와 성령과의 친교(Communio)’에 참여함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성체성사의 은총을 통해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머리로 한 신비로운 “몸”처럼 드러나는 교회에 “한 지체로” 결합하게 되고, 그렇게 주어진 일치는 세상에 우리가 누리는 친교를 드러내게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줍니다.

“주님의 집으로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 122,1)


5. 우리는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

그러나 이렇게 제도와 성사적 형식을 통해 우리 교회는 하느님 친교의 신비에 참여하기 시작하지만 우리 교회는 항상 정화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지금 그 신비를 체험하고 있지만, 그 신비에 오히려 우리가 소유될 때 결정적으로 우리는 완성을 이룰 수 있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2베드 3,13참조) 완전한 그분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는 그곳을 향해 순례의 길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느님 앞에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하는 ‘나그네인 교회(Ecclesia viatorum)’는 현재의 시련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마지막 시대를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약속에 대한 희망’을 선취하며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월간빛, 2013년 1월호, 최석환 요셉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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