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박종구 신부가 쓰는 다시보는 천주실의 21-29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1-16 ㅣ No.416

[다시 보는 천주실의] (21) 유형한 것(물질)과 무형한 것(정신)의 차이

 

 

앞에서 보았다시피, 생혼(生魂)이나 각혼(覺魂)은 몸에 의지하기 때문에 소멸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이 정신적(영원성을 가리킴)이라는 사실과 동물의 각혼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논증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리치가 제시하는 영혼의 정신성(精神性) 논제는 과연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마태오 리치의 첫 번째 논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형체가 있는 혼(魂)은 몸의 주재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적 욕망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이치나 규범을 따를 수 있다. 

 

리치의 두 번째 논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동물적 마음(獸心)과 인간다운 마음(人心)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한가지 일을 당해서 서로 모순된 감정을 일으키지만, 정신성의 인심은 도리를 따르는 행위를 낳을 수 있다. 

 

셋째,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은 각각의 본성에 따라 호오(好惡)가 분명하게 나뉜다. 인간은 식욕(食慾), 성욕(性慾), 몸의 편안함(安逸) 등의 동물적인 것과, 선(善)을 덕으로 여기고 악(惡)을 죄스러워하는 태도 등의 정신적인 것을 구비하고 있다. 여기서 영혼은 정신적인 것이다. 

 

네 번째로, 사물을 수용하는 능력은 정신적인 행위이다. 예를 들면, 물그릇이 물을 받아들일 때, 그릇의 모양대로 물의 모습이 결정된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형체를 추상화하여 혹은 관념화하여 마음에 수용하는 것이다. 형태를 지닌 사물들을 관념화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정신적인 것이다. 

 

다섯 번째로, 사람에게 이목구비(耳目口鼻)는 형체 있는 것들에서 비롯되는 색깔, 소리, 냄새, 맛 등과 연관되어 있다. 반면, 인간의 의지와 이성은 무형한 선(善)과 참(眞)에 속하여 유형한 것들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무형한 인간의 의지와 이성은 정신적인 것이어서 유형한 이목구비와 그에 관련된 성질들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섯 째, 감각적인 지식과 동물적 지식은 유한해서 유형한 것들의 사정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유형한 지식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반성적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영(靈)은 정신적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그 안에 숨어 있는 실체까지 밝힐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시한 리치의 논제들은 유형한 것들과 무형한 것들 사이에 존재의 차이를 계급화시킴으로써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리치에게 정신적인 것은 물질 적인 것과 차원이 다른 존재질서에 속한다. 이런 주장은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유(有)개념과 존재질서를 상정하면 쉽게 떠오르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영역에 속한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순간부터 소멸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리치의 설명이다.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만 아니라, 사실상 이런 이치가 인간이 수도(修道)하지 않을 수 없는 토대이다.(因有此理, 實爲修道基焉) 

 

그렇다면, 과연 불멸의 정신성을 획득하기 위해 인간은 도를 닦는 수고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리치는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긍정하거나 현상적으로 증명할 수 있기 위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가톨릭신문, 2010년 11월 21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2) 내세의 참된 복을 추구하는 인간 영혼

 

 

인간 영혼이 정신성을 추구하는 이치와 관련하여 리치의 질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인간은 어째서 육신이 소멸되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죽어서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애쓰는가? 아주 당연해 보이지만, 어째서 인간은, 사후(死後)에 좋은 이름, 좋은 평판을 남기거나, 의(義)를 위해 한 몸의 생명을 바치기도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인간 영혼의 정신적 차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리치의 설명은 단순명쾌하다.

 

첫째로, 인간은 누구나 좋은 평판이나 큰 영예를 구하며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어 비록 생명을 잃더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죽은 다음에 남는 평판은 소멸하는 육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상존(常存)하는 영혼이 명성의 좋고 나쁨을 아는 것이다. 만약 영혼이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진다면, 인간이 어찌 수고를 하면서 명예를 추구하겠는가? 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아름다운 그림을 걸어놓고 눈이 멀게 되었을 때 보겠다는 것과 같다. 또 아름다운 음악을 갖추어 놓고도 자신의 귀가 먹게 되었을 때 듣겠다는 것과 같으니,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효성스런 자식은 때가 되면 돌아가신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린다. 그런데 육신이 사라진 부모의 혼령(魂靈)들이 후손의 애도뿐만 아니라, 부모를 섬기는 마음과 모습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은 헛된 놀이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평판과 명성을 추구하며 죽기까지 쉼이 없는 것이다.(人人求之至死不休)

 

둘째로, 유물유칙(有物有則, 詩經, 大雅, 蒸民).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자연세계의 구조를 정신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으로 나누어 보는 리치에게, 사물의 세계는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의 법칙은 사물이 욕구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달성된다. 동물은 동물성을 추구하고, 인간의 영혼은 정신적인 것을 욕구하기 때문에 하느님은 창조계의 욕구를 달성토록 허락한다. 이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법칙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현세의 편안함을 뒤로 하고 군자(君子)의 수행생활(修行生活)에 몰두하는 것은 내세의 진복(眞福)을 소망하는 인간 영혼의 참 모습이다. 그러니 영혼이 육신처럼 소멸된다면 참된 복을 추구하는 것이 헛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셋째로, 세상의 사물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 자연 상태에서 동물들은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다가 배를 채우게 되면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동물들의 욕구는 물질적이어서 이 세상에 한정되어 있다. 이와 달리, 인간의 욕망은 현세에서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것- 예를 들면, 의식주와 재화에 대한 욕망이나, 혹은 세상살이에서 원하던 벼슬과 명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취하더라도 인간의 욕망은 끝내 잠재워지지 않는다. 리치의 표현에 따르면, 이런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성정(性情)이나 욕구는 본래 경계가 없고 무한하기 때문이다.(天主所稟情欲. 原乃無疆之壽無限之樂) 그러니 정신성의 최고 실존인 하느님만이 인간의 끝없는 욕구를 채워주실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가톨릭신문, 2010년 11월 28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3) 사후에도 지속되는 상선벌악(賞善罰惡)

 

 

넷째로, 리치는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현상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적한다. 사람도 무서워하는 맹수가 죽으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사람이 죽으면 사람은 그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맹수가 죽으면 동물의 혼은 흩어져 사라지지만, 인간의 혼은 남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인 영혼은 양각(良覺), 곧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고유한 인식능력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발생한다.

 

다섯째로, 하느님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하느님으로 인간이 살아 있을 때 받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은 죽은 다음에도 지속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육신의 사후에도 지속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공의(公義)는 사후에도 진행된다. 악한 영혼이 사후에도 벌을 받게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설은 중국인의 사고와 달리 작지만 근본적인 큰 차이를 드러낸다. 중국인에게도 육신의 죽음은 군자(君子)이건 소인(小人)이건 동일하다. 그러나 군자의 일생이 소인의 일생과 다른 까닭에 군자의 죽음은 소인의 죽음과 다르게 수용된다. 소인은 죽음으로써 인간적인 모든 게 사라지지만, 군자의 일생은 도(道)를 닦은 까닭에 군자의 본심(本心)은 흩어지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다. 이러한 설명, 곧 인간에 대한 중국인의 도덕적 윤리적 설명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해설하기에 아직 부족하다.

 

영혼의 선악은 영혼의 불멸성을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다. 영혼 자체가 정신이요 한 몸의 주인이며 육신 활동의 근원이다.(魂乃神也, 一身之主, 四肢之動宗焉) 창조주는 선악에 따라 존재자들의 본성을 바꾸지 않는다.(造物者, 因其善否 不易其性) 영혼은 악하건 선하건 영구히 존재하는 것으로 악행 때문에 소멸하지 않는다. 만약 영혼이 잘못 때문에 소멸된다면, 무화(無化)되는 것이니 환난도, 고통도, 형벌도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은 악한 영혼이 죄에서 해방되는 사태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느님의 공의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인간의 악행은 더욱 커질 뿐이다. 그래서 리치는 중국인의 수행생활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선한 이들의 마음과 악한 이들의 마음은 흩어지거나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착한 사람은 마음속에 덕을 갈무리하고 악한 사람은 죄를 갈무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공의는 여전히 사후에도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과 영혼은 오직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소멸하고 영속하는 것이니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육신의 소멸성으로 인간은 육체적으로 영구히 살 수 없으며, 영혼의 상존성으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소멸시킬 수 없다. 다만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품성을 가지고 하느님께 바치는 술잔이 될 수도 있고, 오물을 담는 쟁반이 될 수 있다.(吾或以造祭神之爵, 或以之造藏穢之盤) 제사에 쓰일 귀한 술잔이 되든지 오물을 담는 쟁반이 되든지 하느님에게서 받은 인간의 귀한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천상 광명으로 빛날 수 있고, 지하의 큰 어둠이 될 수도 있다. 인간에게 두 본성의 가능성이 있어 동물처럼 될 수도 있고, 현명한 인간이 되어 고명한 인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5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4) 눈에 보이진 않아도 존재하는 인간 영혼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설명하기 위해, 리치는 구체적인 예를 중국인들이 조상의 영혼들을 섬기는 의식에서 찾는다. 동시에 불멸성을 설명하기에는 우회적인 방법이지만, 인간의 영혼을 귀신의 범주에 넣는다. 사실상 리치가 인용하는 고대 경전의 이야기들은 정치적 통치 차원에서 언급된 이야기들이지만, 리치는 교묘하게 인간의 영혼과 귀신 존재의 실재성 차원으로 이야기를 해설해 나간다.

 

예를 들면, 리치의 해설은 이러하다. 옛날에 천자(天子)나 제후(諸侯)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마치 그들이 위에 있는 듯이, 좌우에 있는 듯이 공경했으니(敬之如在其上 如在其左右) 어찌 이런 일을 거짓으로 꾸며 속였겠는가? 또 세상을 떠난 이들을 섬기거나 기억하는 의례적(儀禮的) 행위는 종교적 차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의미 있게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리치의 주장은 세상을 떠난 선조들의 영혼이 후손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육체적 소멸을 넘어 산 자나 죽은 자들의 영혼은 완벽한 소통 혹은 친교의 차원은 아닐지라도 살아 있는 이들과 관계를 유지한다.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주자(朱子)나 그 선배인 정호(程顥)도 귀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다만 설명방식이 서사(西士)인 리치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주자학은 인간의 기(氣)가 사라지면,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理)나 기(氣)를 혼(魂)의 기운과 백(魄)의 기운으로 이해한 주자학과 달리, 리치는 이것들을 영(靈)의 실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귀신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면 없고, 있으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보 같은 태도가 아니겠는가? 귀신은 색깔도 형체도 없는 존재인데 어찌 육신의 눈으로 보려고 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어리석지 아니한가? 누가 세속의 눈으로 추상적인 오상(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유교의 다섯 가지 덕목)을 볼 수 있겠는가? 또 누가 산 사람의 영혼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으며 바람을 볼 수 있겠는가?(誰能以俗眼見五常乎? 誰見生者之魂乎? 誰見風乎?) 눈으로 볼 수 없으니 확인할 수 없고, 눈의 확인은 이치로 따지는 것만 못한 게 분명하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눈에 태양은 옹기바닥만할 뿐이며, 곧은 나무 막대기를 물속에 넣고 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치로 생각한다면, 태양의 크기는 세상보다 더욱 크고, 나무 막대기는 여전히 곧을 뿐이다. 인간의 이치(理致)는 감추어져 있는 것을 추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지붕 꼭대기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면 집 안에 반드시 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천지만물이 눈앞에 펼쳐 있는 것을 보면서 천지만물의 주재자(主宰者)를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가 충분히 설명되었거나 증명되었는가?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12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5) 인간의 죽음은 영혼의 해방을 의미

 

 

사후의 세계와 영혼의 관계가 분명치 않은 중국선비의 생각에 질문이 떠오른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불멸성을 지니며 살아 있는 사람의 능력을 월등히 초월하는가? 춘추전(春秋傳)의 기록에 의하면, 정(鄭) 나라의 백유(伯有)가 죽은 뒤에 여(勵)라는 귀신이 되어 나타났다고 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죽음 이후 영혼은 형체가 없다고 말하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질문에 직답을 피하면서 리치는 오히려 백유(伯有)의 예에서 춘추(春秋) 시대에도 혼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았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죽음이 곧 혼(魂)의 소멸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설명한다. 사람의 죽음은 오직 백(魄)이 사라지는 것이고 육신이 소멸하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영혼(靈魂)은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을 뿐, 죽음은 영혼에게 해방이다. 군자는 이러함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흉하거나 두렵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기쁘고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에 영혼이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긴다.(君子知其然, 不以死爲凶 而欣然安之, 爲之歸于本鄕) (IV-3) 창조주 하느님은 창조계의 모든 존재에게 제 자리를 주시고 질서를 확립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영혼은 사람이 죽게 되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리학(性理學)에 의하면, 사람의 정신이나 혼은 기(氣)의 일종이니 음양이기(陰陽二氣)의 기운이 응축된 것이다. 그러나 리치는 성리학의 영기론(靈氣論)을 반대하며 단호하게 말한다. 귀신들에게 제사 지낸 적은 있었지만, 기(氣)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有祭鬼神者矣未聞有祭氣者)(IV-4) 귀신이 ‘만물을 몸으로 삼으니 아무것도 빠뜨릴 수 없다(體物而不可遺)’(中庸, 16장)는 말은 귀신의 능력이 성대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따라서 리치의 주장은 인간의 영혼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혹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근거한 존재론에 의해 설명되지 않음을 확인할 뿐이다. 귀신과 기(氣)는 관념상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리치의 주장인 것이다. 리치는 그 대신에 고대 헬라철학을 수용한 체계를 적용하여 영혼의 수월성을 제시한다.

 

영혼의 수월성은 다른 사물 존재나 귀신과 분명히 다를 터인데, 기(氣), 물(物), 영혼(靈魂)의 본질적 차이를 분류방식이 있는가? 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범주론에 의거하여 실체와 속성 개념을 바탕으로 만물을 9종류(九宗)로 분류하는 도표를 제시한다(物宗類圖).(IV-5) 여기서 도표가 가리키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사람과 사람 이외의 사물 존재는 각기 다른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리치는 여러 기준을 설정하여 존재하는 것들을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옳고 그름, 길고 짧음, 크고 작음 등 인간의 가치나 외형에서 비롯되는 요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존재자의 내재적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이런 분류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오직 내재적 본성을 가리키는 ‘있음(有)과 없음(無)’만이 서로 다른 부류들로 변별할 수 있다. 리치는 아주 장황하게 이 점에 대해 긴 논의를 시도하지만(IV-5), 요점은 간단하다. 새나 짐승들은 그들이 행동하는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이성적 의지(靈志)’의 인간은 행동의 이유를 알며, 일을 시행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19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6) 무형한 존재인 귀신도 천주 아래의 존재일 뿐

 

 

리치가 제시한 만물의 분류표는 인간과 여타 동물 존재들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 차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사상에서 언급된 기(氣)는 만물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요소이나 형상은 모두 눈에 다르게 보인다. 그렇다면, 기(氣)에 근거한 만물은 형상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 하나로 만물의 존재를 모두 분류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생물의 분류법은 19세기 찰스 다윈 이후 진화론적 세계상을 확인하게 되었다. 더구나 진화론을 선행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범주론은 생물의 모습과 본성의 차이를 구별한다. 모습으로 사물을 구분하는 것은 본성으로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以像分物, 不以性分物). 만약 겉모습으로만 분류한다면, 개의 본성과 소의 본성이 같고, 개와 소의 본성은 사람의 본성과 같다고 할 것인가?(犬之性 猶牛之性, 犬牛之性, 猶人之性歟) 이 논리는 맹자(孟子)의 고자지변(告子之辯 고자 11)에 등장한다. 인간 고유의 오상(五常-仁義禮智信)을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하는 맹자와 자연적 본능을 인간의 본성으로 주장한 고자(告子)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논변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맹자의 주장에서 비판되었던 내용에 한하지만, 요점은 고자가 인간의 본성을 동물적 본능과 동일시하는 오류, 곧 인성과 동물의 본성을 동등시하는 잘못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습이나 형태는 외적 차이를 나타내지만, 그렇다고 본성이나 본질의 차이를 말해 주는 게 아니다. 진흙 호랑이와 진흙 인간은 비록 겉모습은 다르나 본질상 진흙일 뿐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물질적인 기(氣)일 것인가? 만약 기(氣)를 정신으로 보고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주장한다면 살아 있는 것은 어째서 죽는가? 기(氣)는 사물의 안팎으로 가득한데 기(氣)가 죽는다고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리치는 이렇게 되물으며 기(氣)는 그저 지(地), 수(水), 화(火)의 요소들과 더불어 사물을 이루는 원소라고 주장한다. 기(氣)는 귀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게 아니다. 무형을 특성으로 하는 귀신은 어떤 존재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리치에게 귀신은 천주의 명령을 받는 무형한 존재일 뿐이다. 귀신은 천주의 명을 받고 창조계의 일을 관리할 뿐이지, 세상의 복록(福祿)을 주는 일이나, 죄를 용서하는 일은 천주만이 하실 수 있다. 리치는 공자(孔子)의 말을 빌려 무형한 존재인 귀신과 천주(天主)의 차이를 드러낸다. 귀신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라’(敬鬼神而遠之, 논어 옹야편). 또 천주의 존재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 논어 팔일편)는 말 등이다. 이와 같이 리치는 중용(中庸)이나 논어(論語)에서 귀신과 천주의 존재를 암시하는 구절들을 인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한 하느님의 존재와 대비시킨다. 물론 이런 인용 방식은 심층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지만, 모든 문화에 나타나는 종교현상을 고려한다면 그리스도교의 계시 이해와 동양 경전의 신(神) 표상 방식의 관계는 충분히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9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7) 귀신과 천주의 관계는?

 

 

귀신과 천주의 관계는 어떠할까?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조합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넘어서 무형적으로 존재하는 귀신과 모든 존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사물과 귀신의 창조자인 하느님은 피조물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 관계는 존재 차원에서 언급되어야 할 것이지만, 리치는 창조사상의 언저리에서 논술한다.

 

동양식 사고에 따르면, 우주 만물의 본성은 모두 선(善)하며 하나의 몸(一體)이다. 그리고 천주이신 상제는 개개의 사물에 내재하여 만물과 하나가 된다고 했다(天主上帝 卽在各物之內而與物爲一). 그러므로 악행을 저질러 본래의 선함을 더럽히지 말며, 의를 어기어서 본연의 도리를 범하지 말고, 만물을 해쳐서 내심의 하느님(上帝)을 모독하지 말라(勿爲惡, 以?己之本善焉 勿違義, 以犯己之本然之理焉 勿害物, 以侮其內心之上帝焉!)고 했다. 영혼의 불멸하는 본성은 교화되어 천주께 돌아간다(不滅本性而化歸于天主)고 했다.(IV-7) 이것 또한 영혼의 불멸성을 언명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천주(天主)는 아직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하느님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동양식 언명(言明)들이 리치의 하느님과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동양의 하느님 이해를 염두에 둘 때, 리치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창조주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창조계의 온갖 창조물들뿐만 아니라 여타 신(神)들의 창조주이시다. 귀신의 영역에 속하는 악귀들도 창조계의 일부를 차지하지만, 이들은 하느님을 거슬러 지옥에 떨어진 존재들이다. 사물(氣) 존재와 귀신은 차원이 다른 존재이지만 하느님의 피조물이란 사실에서 동일하다. 존재의 차원은 구분되기 위해서 다시 윤리적 차원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덕은 인륜지덕(人倫之德)의 차원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성인들은 역사적으로 보면 인륜지덕(人倫之德)을 제시하여 온갖 사회적 문제에 대응해 왔다. 가르침을 세우고 인륜을 밝혔으니(立敎明倫), 성인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기틀을 만들었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큰 지혜를 내려서 온 세상을 영원토록 편안하게 했다(其肇基經世, 垂萬世不易之鴻猷, 而天下永賴以安).(IV-8) 중국인들의 생각에는 성인들의 공적이 없이 하느님 홀로 세상을 통치했다고 주장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덕(德)의 차원에서 이렇게 인식한다면, 유심론(唯心論)의 차원에서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동양의 세계에서 부처는 마음(心)의 위대한 묘용(妙用)을 알려준 인물이다. 성리학의 큰 가지를 이루는 육상산과 왕양명의 심학 전통에도 마음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의 몸도 만물들과 더불어 모두 마음속에 포함되어 있다(是身也與天地萬物, 咸蘊乎心). 이 마음은 아무리 멀어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아무리 높아도 올라가지 못할 곳이 없다. 또한 아무리 넓어도 둘러싸지 못할 것이 없고, 아무리 작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으며, 아무리 딱딱하여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 없다(是心無遠無逮, 無高乎升, 無廣不括, 無細不入, 無堅不度).(IV-8) 마음의 묘용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천주(天主)께서 마음속에 내재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은 불교와 성리학의 심학 전통에서 묘사된 마음의 묘용이 그리스도교적 존재론의 어법과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리치는 창조론의 실존적 차원에 서서 불교의 인식론적 이해를 시도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16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8) 피조물은 하느님의 흔적

 

 

리치가 자주 언급하는 그리스도교의 창조사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엇보다도 하느님(天主)의 만물 창조는 없는 것에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若夫天主造物, 則以無而爲有). 달리 말하면, 창조의 첫 번째 의미는 무(無)에서 만물을 창조하는 것(creatio ex nihilo, 창세 1장)을 가리킨다.

 

창조는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을 가리키며, 하느님이 인간과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는 표현이다. 사람과 만물의 이치는 모두 하느님의 흔적(人物之理, 皆天主蹟也)일 뿐이다. 슬기로운 이의 마음은 천지를 포함하고 만물의 이치를 갖추고 있지만, 진짜 천지만물의 몸체는 아닌 것이다(智者之心, 含天地具萬物, 非眞天地萬物之體也). 인간은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살펴서 형체를 비추어보고 그 관념을 파악하고 근본을 추구하며 그 쓰임을 이룰 수 있을 뿐이다(惟仰觀俯察, 鑑其形而達其里, 求其本而遂其用耳).

 

그러나 인식론의 범주에서 존재론의 차원을 논증하려는 리치의 논증 방식은 재논의가 필요하다.

 

리치의 표현 중에서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고요한 물과 밝은 거울 같은 것이 만물을 비춘다고 하여 곧 바로 밝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이 모두 그 안에 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요 그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한다면 옳겠는가?”(若止水, 若明鏡, 影諸萬物, 乃謂: 明鏡止水, 均有天地, 卽能造作之, 豈可乎?) 그러나 참 나를 일컫는 ‘천주’와 인간의 ‘나’가 일치된다는 표현은 사실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수행론의 입장에서 참구해야 할 말이다. 하늘의 주인과 지상의 인간 ‘나(我)’가 일치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다루려 한다면, 리치의 논의방식은 여전히 동양적 사유방식을 따라감에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리치의 주장은 아주 과감하다. 우리와 하느님이 하나가 아닌 것을 어찌 증명하지 못할 것인가? (則吾於天主 非共爲一體, 豈不驗乎?)(IV-9)

 

이 증명을 위해 리치는 세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해 나간다.

 

첫째로, 하느님의 존재를 개개의 사물이라고 주장한다면, 하느님과 사물의 본성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물들에도 각각의 본성이 있는데 천주와 피조물 사이엔 분명히 본성의 구별이 있지 않은가? 더구나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의 몸이라고 주장한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자신을 섬기는 꼴이 된다. 둘째로, 하느님을 사물의 내면적 성격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리치는 이 주장이 하느님의 존재를 사물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무릇 전체는 부분보다 크고, 밖은 안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사물 속에 내재하며 사물의 본연적 성분이라면, 사물은 하느님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 셋째로, 하느님과 만물의 몸체는 동일한가? 만약 하느님이 만물을 사용하는 주체라고 말한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만물과 동일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비유를 들면 석공은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고, 어부는 어부가 사용하는 그물이나 배가 아니다. 오히려 농부는 쟁기를 사용하여 밭을 갈고, 나무꾼은 도끼를 이용하여 나무를 벤다. 도구인 쟁기나 도끼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이용하는 인간이 일하는 것이다. 또한 사물은 소멸하여 그것과 연관된 부류로 돌아갈 뿐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사물이 소멸하여 천주께 돌아간다면,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태고 사람을 온전하게 해 줄 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을 행하면 벌을 받고, 선을 행하면 상을 받아 하느님께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창조물을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흔적’(天主之迹)이라고 말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23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29) 만물에 내재해 있는 하느님

 

 

하느님의 흔적(天主之迹). 이 개념은 창조계를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존재론적으로 추구하는 사유의 산물이다. 성리학(性理學)이 그리스도교의 창조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사물이 존재하게 된 연유를 묻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사물이 있게 된 까닭(所以然)을 사물에 내재하는 이치로 이해하고자 한다. 반면, 리치는 사물의 존재를 중국인의 사유에 익숙한 개념인 음양(陰陽)의 구성으로 설명하지만, 음양은 물질적 개념이 아니다. 이렇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리치의 해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근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 밖에 있는 존재의 원인을 운동인(the efficient cause)과 목적인(the final cause)으로 이해한다. 이에 근거하면, 하느님은 창조계를 지어낸 보편적 운동인이며, 창조계 밖에 존재하는 목적인이다.

 

만약 하느님이 창조계의 사물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이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계시는 것이며, 마치 손과 발이 몸에 붙어 있는 것과 같다. 마치 흼(百)이 말(馬)에 있어 흰 말(白馬)이 되고, 차가움(寒)이 얼음에 속해 있어 차가운 얼음(寒氷)이 되는 이치와 같다. 또한 햇빛이 수정 속에 있는 것과 같고, 달구어진 붉은 쇠에서 빛나는 것과 같다. 즉 원인(所以然)이 결과(已然)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如所以然之在其已然, IV, 9) 끝(결과)으로써 발단(원인)을 추론하여 하느님께서 사물 속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수정에서 빛이 떠나고, 쇠에서 빛이 떠날 수 있으나, 하느님은 만물을 떠날 수 없고 만물과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는다(不雜不離)는 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흔적’(天主之迹)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표현은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이후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했던 치열한 노력에 기인한다. 하느님과 세상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초월의 하느님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인간과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시는가? 더구나 세계 내적 경험에 한정된 인간의 언어를 생각한다면, 초월의 하느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교의 신관을 설명해 주는 삼위일체의 하느님관은 나자렛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계시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을 인간의 언어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년)는 처음으로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을 언급했다. 물론 이 근거는 하느님의 모습(Imago Dei)에 따른 인간의 창조(창세 1,26)를 토대로 하지만, 그리스도 사건을 더욱 깊이 통찰하기 위한 길이기도 했다.

 

‘하느님의 흔적’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체험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간의 언어 문제로 귀속된다. 그리스도교는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유비이론을 제시했고,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존재의 유비는 하느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창조계 안에서 유비될 것을 찾는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창조계 안에서 하느님은 ‘무엇에도 비교될 수 없는 더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에 귀착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느님은 필설로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말을 해야 하는 모순에 처한다. 이 모순의 극복에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신비로 주어진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이해하려면 삼위일체 하느님을 언급해야 되고, 표현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말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11년 2월 20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30) 하느님과 만물은 구별된다

 

 

‘삼위일체의 흔적’은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리치가 성리학자들에게 신학적 관점에서 이 개념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었겠지만, 기본적인 창조의 개념을 통해 하느님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일체설을 의미하는 ‘인간은 만물과 모두 하나’라는 말(有謂人於天下之萬物皆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말을 현대인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인간이 속한 창조계의 혼연일체성을 떠올릴 것이다. 환경의 중요성이 더해진 21세기에 이 말은 더욱 실감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을 인간중심적 사고 위에서 생각하면, 창조계의 정점에 존재하는 인간이 자연세계와 구별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분류법에 근거하여 인간과 다른 자연실체들을 구별한다. 만물에는 성격이 비슷한 사물들이 있어 같은 무리를 이루고, 서로 다른 무리들은 ‘같은 성격’과 ‘다른 성격’으로 구별되고 모아진다. 성격이 다른 무리와 무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어서 종(種, genus)과 류(類, species)에 따라 ‘같은 종류(種類)’와 ‘다른 종류(種類)’가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리치가 설명하는 만물의 구별은 인간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과 만물의 관계를 존재론적 차이에서 보고자 한다. 인간과 만물의 일체성을 주장하는 성리학적 사고가 도덕적 형이상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리치의 해설은 자연철학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인간과 만물의 일체성, 더 나아가 하느님과 만물의 일체성을 거부한다. 따라서 리치는 만물, 곧 창조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 이론을 해설하면서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된 창조계의 구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창조계가 창조주의 존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리치는 만물이 한 몸이라는 이론(萬物一體之說)을 만물이 동일한 근거에서 유래한다(萬物同根)고 해석한다.(IV-11) 만약 만물(萬物)이 한 몸이라고 주장한다면, 리치에겐 만물을 구성하는 사물들의 차이를 부정하는 게 된다. 더 나아가 리치의 생각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곧 성리학이 이해하는 오상(五常)을 행하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구별이 사라진다. 만약 만물의 차이와 구별이 사라진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받드는 인의(仁義)가 될 뿐이니(但以愛己奉己爲仁義) 남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오히려 참된 의미의 인의(仁義)를 해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자기 몸과 남의 몸을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것도 가까운 단계에서 먼 곳으로 확충되어 나간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낳고 기르는 만물은 각자의 본성대로 절실히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뿐이다.(皆天主生養之民物, 卽分當兼切愛恤之)

 

그렇다면, 만물을 한 몸으로 보는 게 인의를 해친다는 게 가능한 말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용에서 언급하고 있는 군신일체(體君臣)의 태도는 무의미한 것인가? 묵자의 겸애(兼愛: 차별없이 모두 사랑하라) 사상마저 거부했던 유학자들의 만물일체의 주장은 리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사실도 따지고 보면,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리치의 해석과 중국적 이해의 범주가 다른 사실에서 비롯된다. 리치가 따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생물계를 종(種)과 류(類)에 따라 형이하학적으로 구별하고 분류하는 게 아닌가? 결과적으로 자연철학에 기반한 형이하학적 해석은 동양사상의 형이상학적 주장을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톨릭신문, 2011년 2월 27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파일첨부

1,48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