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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분단 70주년 특집: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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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22 ㅣ No.841

[분단 70주년 특집]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여정


분열 · 대립의 역사 안에서 화해의 길 앞장서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1995년 설립 당시부터 봉헌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미사’가 올해 1월 6일 1000차를 맞았다. 이기헌 주교, 염수정 추기경, 최창무 대주교(오른쪽부터) 등 관계자들이 기념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광복 70년을 맞았지만 민족 분단의 아픔은 더해가고 절망이 깊어지고 있다.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6월 21일)을 맞아 한국교회가 개척해오고 있는 민족화해의 여정을 되짚어본다. 이를 통해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역사에 새로운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길 기대한다.


민족화해, 예언자적 소명

“7·4 성명의 진의는 무엇인가. 참으로 사상과 이념과 제도를 초월하여 한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고 조국의 자유, 평화, 통일을 모색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허울 좋은 간판이요, 그 저의는 민족의 양단을 영구적으로 동결하는 것인가. 진정 5000만 민족의 염원에 보답하기 위한 진지한 남북대화가 7·4 성명으로 시작될 것인가. 아니면 이 성명은 남북한 집권자들이 정권 연장을 위한 권력 정치의 술수인가.”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 최초로 남과 북이 통일의 길을 모색하며 함께 내놓은 ‘7·4 남북공동성명’.

이와 관련해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8월 15일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교회를 이끄는 목자의 혜안과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교회의 우려는 머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공동성명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72년 10월 남한에선 유신체제가 시작됐다. 같은 해 12월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해 분단 고착화의 길로 들어선다.

교회는 이처럼 민족화해를 향한 여정에서 예언자적 모습을 보이며 민족의 아픔에 함께 해오고 있다.

 

- 1949년 덕원수도원 폐쇄 폐쇄 다음해 발발한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덕원수도원. 갈곳을 잃은 피란민들.

 

 

박해 속에서 잉태된 민족화해의 씨앗

민족화해를 위한 씨앗은 이미 해방 공간에서 잉태되기 시작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교회는 북녘 땅에서 모진 박해와 맞닥뜨려야 했다. 1945년 8월 연길교구 유 셀바시오 신부와 고(高) 보니파시오 신부가 총살당했다. 이듬해 6월 보테헤르 백 주교를 비롯한 사제 18명, 수사 17명, 수녀 3명이 체포됐다.

북한 정권은 1946년 토지개혁을 하면서 박해를 전역으로 확대했다.

교회 소유 토지를 몰수하고, 1948년 초부터 성직자와 수도자 체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49년 5월에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북한은 1949년 5월 끝내 협력을 거부하던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와 덕원수도원장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도 납치한다. 이 밖에도 평양·강계·신의주본당 등에서 활동하던 7명의 사제가 잡혀갔고, 많은 성당이 문을 닫아야만 했다. 30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있던 평양에는 단 1명의 사제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핍박은 더욱 거세졌다. 해방 당시 교세가 5만 7000여 명에 이르던 북녘 교회는 공산 통치 5년여 만에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이 시기 150여 명의 성직·수도자·신학생이 체포되거나 살해됐다. 이들 순교의 피는 고스란히 민족의 제단에 바쳐져 화해의 씨앗으로 잉태된다.

민족화해의 씨앗은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과의 나눔으로 피어났다.

교회는 피란민에 대한 사목과 함께 구호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군사목과 함께 군 병원 의료 봉사(제5 육군병원)가 이뤄졌다. 거제도·광주·논산·부산 포로수용소 등지에서 1만 5827명의 영세자를 배출한 것은 기적으로 여겨질 만했다.

미국 가톨릭사회복지협의회(NCWC) 지원을 받아 대구교구 주도로 피란민 구호에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과 더불어 교회 내적으로는 성모 신심과 함께 순교 신심을 강화, ‘기도의 십자군 운동’을 전개했다. ‘파티마의 푸른군대 운동’이 소개된 것도 이 시기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한국교회 입장을 전달하는 모습. 이후 남한은 유신체제를,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 분단 고착화의 길로 들어서며 이 메시지에 담긴 우려가 현실화됐다. (1972년 김수환 추기경, 시국 메시지 발표)



민족화해 여정

“국토 통일과 평화 건설을 위한 역사적 과업이다.”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주교는 6·25전쟁을 ‘성전’으로 받아들였다. 1950년 8월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대구교구 김동한 신부 등 사제 10여 명은 ‘가톨릭 청년 결사대’ 결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무기 조달의 어려움으로 좌절되고 만다.

그해 9월 지학순, 김창렬, 김옥균 등 신학생 30여 명은 서울대신학교 학장 정규만 신부 인솔 아래 육군에 자원입대한다. 또 1950년 9월 군종제도가 도입돼 1951년 2월 신부 11명이 최초로 육군 군종장교로 입대해 민족의 하나됨을 위한 밑거름 만들기에 나선다.

교회는 해방 정국부터 이어진 아픈 역사로 인해 반공주의 등 시대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북녘의 교회가 사라질 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일제강점기 교회가 범한 지난 날에 대한 참회와 속죄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 싸움 속에서, 한 형제로서 함께 살아왔던 기억은 차츰 희미해지고 세속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흘러가게 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이미 뿌려진 민족화해의 씨앗은 꾸준히 자라났다. 서슬 퍼런 정국 한 가운데서도 민족화해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을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일치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후 상처 극복에 매달리던 교회가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65년 6월 주교회의가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를 바치기로 결정하면서부터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 대북선교 활동의 결과로 건립된 장충성당에서 당시 서울 민화위 위원장 최창무 대주교 주례로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1998년, 북한 장충성당에서 미사 봉헌)

 

 

하나됨을 위한 여정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과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은 목마름에 지쳐 스러져가던 민족화해 여정에 마중물이 되어주었다. 이 기념해를 계기로 교회는 민족화해 문제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1982년 2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북한선교부’가 신설되고 1985년에는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가 출범한다. 1989년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교회는 물론 온 겨레가 통일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평을 열어놓았다.

6·25전쟁 이후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처음 북한과 접촉하게 된 것은 1987년 서울대교구 장익 신부(전 춘천교구장)가 바티칸 대표단 일원으로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력에 관한 비동맹국가 각료회의’에 참석하면서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북한에서는 조선천주교인협회(현 조선카톨릭교협회) 결성, 장충성당 건립 등이 이뤄졌다. 이어 북미주 교포 신자들의 방북도 이뤄지면서 전환점을 맞게 됐다.

광복 50돌이던 1995년 3월 서울대교구에 민족화해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민족화해운동은 새 국면으로 접어든다. 특히 그 해 북한에 큰물 피해와 가뭄으로 인한 기아가 만연하면서 민족화해 여정은 결정적 분수령을 맞이한다.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에 첫 지원금 8000만 원을 전달하고 본격적인 대북 지원에 나섰다.

그 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서울 민화위 대표단과 조선천주교인협회 관계자들이 만나 ‘조국 통일을 위한 천주교인의 연대 강화’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면서 남북 교류에 새로운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

1996년 4월에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평화통일 기원미사’가 남북한에서 동시에 봉헌되기도 했다. 이어 1997년부터 남북 종교교류를 주도해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를 구성, 3·1 민족대회를 이끌어내는 등 민족화해의 길에서 늘 선두에 서 있었다.

1996년 사랑의 국수나누기운동으로 본격화하기 시작한 한국교회의 몸짓은 평양 국수공장 건립(1996년), 북한동포를 위한 국제 단식 모금운동(1997년), 북녘 형제 돕기 국수나누기운동(1998∼2000년), 겨울 옷 보내기운동(1998년 12월) 등으로 다채롭게 전개되며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한반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2004년 북한 룡천역 열차 사고 때에도 교회는 특별모금운동을 실시했으며, 2005년 대북농업 개발사업 ‘씨감자 무균종자 배양시설’ 건축을 도우며 통일 기반 마련에 힘을 쏟았다.

2006년에는 국제 카리타스 대북지원 사업대표 실무기구로 위임되고 2007년에는 통일부 대북지원 사업단체로 지정돼 민족화해를 위한 민족의 여정을 이끌어오고 있다.

 

- 의정부교구는 통일사목의 새 전진기지가 될 민족화해센터를 경기도 파주시에 10년만에 완공, 2014년 7월 봉헌식을 가졌다. (2014년, ‘민족화해센터’ 봉헌)



화해의 길을 잇는 여정

남북 관계는 극도로 경색돼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래 최악이라는 말도 나온다. 2000년 이후 유지돼 온 이른바 ‘6·15 체제’는 가동 불능 상태에 빠져있다. 민족화해를 위한 교회의 걸음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화해의 흐름을 이끌며 순간순간 새로운 물꼬를 트던 모습은 사라지고 정부 정책에 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꽁꽁 얼어붙은 민족화해의 여정에도 화해의 씨앗은 자라나고 있다. 춘천교구는 2009년 5월 북강원도 온정리에 연탄 5만장을 전달해 2008년 이후 1년여 만에 대북지원에 성공했다. 의정부교구는 2014년 7월 5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에서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한 새로운 교두보가 될 민족화해센터를 봉헌했다. 센터 봉헌은 통일사목의 새로운 분수령이 되고 있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설립된 직후인 지난 1995년 3월 7일 당시 서울대교구장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첫 미사를 집전한 이래 매주 화요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봉헌돼 온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미사’가 올 1월 6일로 1000차를 맞기도 했다.

분단 70주년을 맞은 올해 드디어 한국교회는 그간의 무기력을 털어내고 새로운 장도에 나섰다.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전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올해 말까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도운동에 돌입한 것이다.

이렇게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져 온 민족화해의 여정에는 주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심어주신 사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

주님께서 유언처럼 남기신 기도를 온몸으로 살아갈 때 우리 민족과 교회에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릴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6월 21일, 서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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