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본당에서의 레지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0 ㅣ No.258

[레지오의 영성] Allocutio - July, 2011


본당에서의 레지오



교본에서 제일 긴 장(章) 중의 하나인 제37장 ‘활동의 예와 방법’은 레지오 단원들이 쁘레시디움에서 실행하고 있든, 실행하지 않고 있든 가능한 사도직 활동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유용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첫 번째 예로 본당에서의 사도직 활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쁘레시디움이 어떤 일이 진정으로 본당에 기여가 되며 어떤 일이 본당을 위해 꼭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경우, 이 예가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쁘레시디움이 본당에서 참으로 누룩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드러나지 않게 후미진 곳에 있는 별개의 단체입니까? 쁘레시디움은 과연 사제에게 짐이 됩니까, 아니면 축복입니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본당은 레지오의 정상적이고 당연한 활동 환경이고 본당 사제와의 일치와 협조는 레지오 생활에 있어 필연적입니다. 본당에서의 레지오의 역할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그 역할이 본당과 사제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파악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세미나의 한 참석자가 프랭크 더프에게 “당신이 생각하기에 어떤 사제가 이상적인 사제인지 간단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프랭크 더프는 이에 대한 대답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그렇게 전체적인 그림을 모두 놓고 본다면 하느님께서 사제 안에서, 사제를 통하여 역사하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란 주님의 육화肉化와 비슷한 개념으로 간주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제 표현대로 하자면 사제는 ‘현장의 그리스도’, 즉 한 지역의 그리스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사제란 교회의 머리이신 부활하신 주님의 성스러운 현존입니다.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사제를 대하는 프랭크 더프의 근본적인 태도와 협조적인 자세의 뿌리이고, 레지오가 항상 염두에 두기를 바랐던 생각입니다.

그리고 본당이란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특정한 사람들의 보편적 교회의 실체입니다. 본당은 사제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현존입니다. 레지오의 쁘레시디움은 그리스도 신비체인 본당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 레지오가 제대로 이해되고 있다면 이런 배경을 근거로 그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단 하나의 기본적인 특성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특성은 보편성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명 한 명의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누구든지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하찮은 사랑이 아니라 무한하고 열정적이며 대단히 인간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 사랑의 성스러운 표징이 되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당신의 의지가 실제로 현존하도록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이 기쁜 소식(복음)을 나누는 복음화 활동을 배제하고서는 아무런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모든 영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보편적입니다. 이제 본당은 어느 특정 지역에서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며 따라서 보편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본당은 의무를 실천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떠나간 형제들인 냉담교우, 비非신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역주 : 신이나 초경험적인 것들의 존재나 본질은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정상적인 사람, 장애인 등 관할 구역 내 모든 사람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프랭크 더프가 전망한 레지오의 미래는 가톨릭교회, 즉 본당의 이러한 보편성의 표지를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레지오는 어떤 이유로든 또는 어느 정도이든 교회에 관심이 없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을 본당으로 이끌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교본에 인용된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씀을 재인용하려 합니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평신도들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비신자들 및 신앙을 포기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향한 공동체적 선교 열정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 각자의 본당에서 참다운 친교의 성장에 매우 힘써야 한다.”(평신도 그리스도인 27, 교본 제10장 5항)

우리 모두는 프랭크 더프가 복자 요한 23세 교황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얼마나 큰 용기를 얻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교본 부록 1)

제가 묻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본당에 있는 모든 쁘레시디움이 교회의 본질인 선교 사명을 입증하고 있습니까? 쁘레시디움 단원 중에 몇 명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 또는 냉담 교우나 비신자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다른 방식으로 물어 보겠습니다. 방방곡곡에 있는 레지오가 전통적으로 헌신했듯이 지금 새 복음화에도 참여하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레지오의 본질인 선교를 강조하는 레지오 마리애 2011년 중점 과제인 ‘프랭크 더프와 레지오의 카리스마(성령께서 내려주신 은총과 자질)’를 올해 내내 계속 상기하여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면 이는 가톨릭교회에 대단한 축복이 될 것입니다.

레지오는 사제가 실제로 진정한 가톨릭 사제가 되고 본당이 진정한 가톨릭 본당이 되도록 사제를 돕는 커다란 역할을 갖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프랭크 더프가 꽤 자주 인용했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글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항상 강하게 자극을 받습니다. “영혼들! 영혼들! 영혼들! 온 세상을 계속 돌아다니며 모든 고통을 겪고 나니 그 결과로 한 사람의 영혼을 구했습니다. 이 얼마나 값진 승리입니까!” 그리고 우리의 창설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한 영혼, 한 영혼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이상적인 목표의 최소치는 우리 모두가 적어도 한 명의 영혼은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모든 본당이 선교 본당이 되도록 어떻든 움직여야 하며 레지오는 이를 달성하는데 중요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새 복음화에 매진합시다. 모든 영혼, 특히 성모님의 모성적 마음을 느끼고 싶어 목말라하는 영혼들에게 성모님이 어머니의 역할을 하시는데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성모님께 은총을 간구합시다. 아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1년 10월호, 글 비드 맥그리거(꼰칠리움 영적 지도신부), 역 하성환(서울 se. 국제서기)]

 

 

[레지오의 영성] Allocutio - August, 2011


본당에서의 레지오



어린이 가톨릭 교리 지도

어떤 객관적 기준으로 보더라도 교본의 제37장 ‘활동의 예와 방법’은 매우 인상적이고 도전해볼만한 내용입니다. 어느 주교나 본당 사제가 읽더라도 레지오에게 약간의 기회나 격려만 준다면 레지오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랄 것입니다. 이들 활동 중 많은 것들이 오늘날 대부분의 가톨릭 세계에 보편적으로 적절하고 긴급히 필요한 활동입니다. ‘어린이 가톨릭 교리 지도’는 그 중 특별히 중요한 항목입니다. 레지오는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이 분야에 좋은 성과를 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 교리문답 지도는 더프 형제가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행했던 활동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이 사도직 활동이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및 이웃들을 위해서도 대단한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교본에서 이 사도직 활동을 “최고로 가치 있는(매우 중요한) 활동”으로 표현한 것도 의외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활동이 왜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일까요? 기본적으로 교리문답 지도는 어린이를 예수님께 가장 귀중한 친구로 또 삶에 있어 진정한 의미가 있는 존재로 소개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숭고한 활동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같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는 것이 마리아의 소명이자 사명이었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확실히 교리문답 지도는 레지오 마리애에서 특별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 경이를 느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분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분과 맺은 친교에 관해 이야기해 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 미사 강론, 2005년 4월 24일)

프랭크 더프는 수년간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일원으로 더블린의 암울한 빈민가에서의 활동을 통해 또 후에 그가 시작한 호스텔에서 다른 많은 가난의 모습을 일상적으로 겪으면서 물질적인 빈곤의 구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물질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활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부분의 책임을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창설자는 절대적 확신 하에 가장 커다란 가난은 영혼이 가난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특히 어린이에게 가장 심각한 박탈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해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은 가톨릭 신앙이라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가톨릭 신앙보다 더 귀중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런 확신이 모든 가톨릭 교리 지도의 이면에 우선적이고 불변적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교리 지도의 가치는 일시적으로 그치지 않고 영구적으로 지속되어야 합니다.

물론 레지오 단원에게는 가톨릭 교리를 지도하는데 또 다른 근본적인 태도와 접근 방식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교본에서 훌륭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활동 중에 ‘성모님이시라면 당신의 어린이들을 어떻게 보살피실까’를 늘 생각해야 한다. 특히 주일학교를 돕는 활동을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어른들은 어린이를 대할 때 대체로 참을성이 모자라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어린이들에게 단지 사무적이고 세속적인 분위기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린이는 교리 수업을 단지 학교 공부의 연장 정도로밖에는 여기지 않게 되며, 결국 예상된 수확의 10분의 9는 놓치고 만다. 그러므로 한 번 더 생각하라. ‘이 어린이들 하나하나 안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보시는 성모님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실까?’”

“교리 교재를 선택할 때에는 교회의 가르침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을 고르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쓸 수 있는 훌륭한 교재가 있어 다행입니다. 가능하다면 우선 레지오 단원은 스스로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차근차근 공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럴 환경이나 기회를 만들기가 매우 어렵다면 교리서보다 짧고 아마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교리서 요약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이들 자료를 구할 수 없더라도 많은 지역의 주교회의에서 어린이를 지도하는데 꼭 맞도록 제작한 교리문답집이 있습니다. 또한 꽤 많은 수의 진취적인 주교들이 독자적으로 제작한 교리문답집이 있는데 대단히 훌륭한 것들이 많습니다. 여하튼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레지오 단원이 교리문답을 지도하려 한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르며 그 지역의 문화와 언어에 맞게 쓰인 유명한 교리문답집에 대한 최신의 기본적인 지식을 갖춰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리문답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명백히 그 교육 과정이 매우 유용하기는 하겠지만 교육 과정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규 과정 이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런 교육 과정을 이수할 기회도 없고 시간도 없지만 그럼에도 가톨릭교회는 부모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첫 번째 스승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가톨릭 교리를 참되게 지도하는 것은 단순히 신앙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특히 모범을 보임으로써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리문답을 지도해야 한다면 근본적인 관점은 우리 주님이 나에게는 실제로 어떤 의미로 인식되는 분이신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만일 온 세상의 레지오 단원들이 교본의 이 항목에 대해 새로이 논의하고 각 쁘레시디움에서 그들이 어린이들에게 신앙을 지도하는 “최고로 가치 있는 활동”에 어떻게 참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를 깨닫게 된다면, 이는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어린이들을 구원하는 사업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1년 11월호, 글 비드 맥그리거(꼰칠리움 영적 지도신부), 역 하성환(서울 se. 국제서기)]



1,80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