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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평신도 교회사: 조선 교우들을 위한 앵베르 주교의 사목적 배려와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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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9-07 ㅣ No.991

한국 평신도 교회사 (8) 조선 교우들을 위한 앵베르 주교의 사목적 배려와 노력

 

 

앵베르 주교가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에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조선의 첫 주교가 조선 교우들의 처지를 얼마나 잘 이해하며 사목적 배려와 노력을 다했는지 엿볼 수 있다. 103위 한국순교성인화에서 김대건 신부(맨 가운데) 옆에 자리한 앵베르 주교.(103위 한국순교성인화, 문학진作.)

 

 

평신도들로 시작하여 성직자를 영입하고 신유박해(1801)로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은 목자 없는 교우촌(敎友村)을 이루어가며, 향후 공소(公所)라는 교회단위로 성장하게 된다. ‘교우들이 모여 촌락을 이루었다’는 뜻의 ‘교우촌’은 신해진산사건(1791) 이후 신앙생활을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한 신자들에 의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신유박해 이후 살아남은 신자들이 전국 곳곳 산간지역에 ‘교우촌’을 이루며 퍼지기 시작하였다. 교우들은 자체적인 신앙교육인 부전자습(父傳子習), 모전여습(母傳女習) 방식으로 가족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기도문을 외우며 신앙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 명의 해외 선교사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들어오면서 성사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로 성장해나갔다. 봄, 가을로 사목방문을 하던 박해시기의 전통은 오늘날 판공성사의 관습으로 발전하였고, 사제의 부족으로 정기적인 사목방문만 이루어지던 공소(公所)는 개항기 이후에 본당(本堂)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앵베르 주교 시대의 업적은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이번에는 그가 조선 교우들을 위해 특별히 사목적으로 어떠한 면에 신경을 썼는지 소개하고 싶다. 앵베르 주교는 첫째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중국 유학을 보낸 세 명의 소년(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이외에 정하상, 이재의 등 네 명의 신학생을 직접 교육하여 조선 내에서 서품식을 거행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둘째로, 한문발음식의 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외울 수 있는 ‘공동기도문’으로 만들어 배포하였다. 그 외에도 한글서적을 보급하여 교리 및 성사생활을 돕고자 하였다. 이처럼 사제양성이나 신자들을 위한 기본적인 성무활동 이외에도 앵베르 주교가 조선 신자들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부분이 있다. 그가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에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조선의 첫 주교가 신자들의 처지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수원교회사연구소에서 발행한 『앵베르주교 서한』과 최근 「앵베르 주교의 조선선교 방략」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쓴 수원교회사연구소 부소장 강버들 신부의 글을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신자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과 가장 부담스러운 장애물은 제사에 참여하는 일과 제물입니다. …제사상에 올리지 않은 음식은 종들을 시켜 인근 이웃들에게 보내서 나누어 먹는데, 이를 받지 않는다면 큰 모욕이나 적의의 표시가 됩니다. …제 생각에는 신자들이 제물(祭物)이란 말을 명백히 들었어도 받아서 항의의 표시로 돌려주거나 숨겨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받는 행위가 제물이 아니라 이웃 양반의 자비로운 은혜의 표시로 생각하면 하는 판단입니다.”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 1일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제사음식을 받지 않을 경우 신자들이 천주교 신자임이 드러나 곤경에 처할 수 있음을 보고하면서, 그 음식을 은혜의 표시로 해석해주기를 청하고 있다. 이미 2년 전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원칙대로 제사음식을 받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지 않는 ‘기절벌棄絕罰’(‘파문벌’과 같은 의미로 성사생활을 끊는다는 뜻에서 ‘기절(棄絶)’이라는 한자어를 쓴 것 같다)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같은 편지에서 당시 조선의 민간 풍습에 따라 혼인식 때 기러기를 사용하는 것이 미신이 아니라 혼인의 본뜻을 되새기는 의례일 뿐이니 신자들에게 허용할 수 있도록 청원하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바로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처음 행하는 ‘전안례(奠雁禮)’에 대한 앵베르 주교의 설명이다.

 

“…기러기를 가지고 신랑이 말을 타고 장인의 집으로 가서 아내를 맞이합니다. 신랑은 말에서 내려 안마당에 펴 놓은 멍석에 기러기를 놓고 거기 꿇어 머리가 땅에 닿게 세 번 하늘을 향하여 경배합니다. …예절서에 기러기는 한 쌍이 서로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며 절대로 갈라지지 않으며 한쪽이 죽으면 영원히 정절을 지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자들도 혼인할 때 이런 민간 예식을 따를 수 있게 허락하시도록 간절히 청합니다.”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이 비신자들 사이에서 신자임이 탄로 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조선사회 풍습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사목을 이끌었다. 앵베르 주교 시대의 교회 모습을 보면 바오로가 활동하던 초기 로마 사도시기가 떠오른다.

 

 

이처럼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이 비신자들 사이에서 신자임이 탄로 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조선사회 풍습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사목을 이끌고 있었다. 그 외에 사천대목구에서 함께 사목했던 베롤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병풍’을 이용하면 칸막이가 쉽게 생겨서 미사 때 ‘남녀유별’의 원칙을 적은 비용으로 지킬 수 있다고 자랑하면서, 중국에서도 좋은 용도로 사용하도록 권고하였다.

 

앵베르 주교 시대에 조선 교우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는 혼인법을 적용하는 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박해시기와 조선의 전통사회라는 배경 속에서 앵베르 주교는 이른바 ‘바오로 특전’을 적용할 때 이전 배우자에게 질문하는 것을 관면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제 이 신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성 비오 5세 교황께서 인도인들에게 허락하신 것 같이, 저들의 배우자가 첫째 아내나 남편에게 질문을 하지 않고도 함께 영세할 수 있도록 사면하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혼은 양반들에게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어떤 때 아내가 도망가서 다른 남자와 살게 되는 경우 남편은 그 아내를 발견하면 즉시 살해합니다. …이런 여자들이 혹 신앙을 받아들인 경우에 자기 생명이나 교회에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교회가 명하는 대로 질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위의 편지 내용 역시 1838년 12월 1일 앵베르 주교가 포교성성에 질의하는 것인데, 조선의 실제 혼인제도와는 상관없이 앵베르가 맞닥뜨리고 있던 조선사회에서는 남성 중심의 혼인관습과 신분에 따른 처첩(妻妾)제도를 극복해야 했다. ‘바오로 특전’이란 비신자 부부 가운데 어느 한쪽이 교인이 될 때, 세례받지 않은 상대방이 평화로운 동거생활을 거부할 경우 이전 혼인을 무효화시키는 제도이다. 앵베르 주교 시대에 이러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전 배우자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하는데 첫째, 세례를 받을 의향이 있는지 둘째, 천주를 모욕하지 않고 세례받은 이와 평화롭게 동거하기를 원하는지 물어야 한다. 이 두 질문에 대해 모두 부정적이어야만 이 특전이 적용된다. 그러나 문제는 박해시대에 이 질문을 한다면, 바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세례받은 당사자와 교회 공동체가 위험에 직면하게 되기에 그 질문을 가능하면 면제해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다. 교황청에서는 혼인법에 대한 여러 특전이 남용되는 것을 막으려고 선교지역에서 그 기한과 횟수를 자주 제한하고 있었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 신자들을 위해 조선의 혼인풍습을 자세히 설명한 후 그러한 관면을 얻을 수 있도록 강력하게 청하고 있었다.

 

이렇게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1세대인 앵베르 주교 시대의 교회 모습을 보면 바오로가 활동하던 초기 로마 사도시기가 떠오른다. 바오로 역시 전교여행 중에 이방인 문화를 경험하고 나서 유다인의 풍습을 고집하지 않고, 이방인 풍습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다. 때로는 베드로의 위선적인 행동을 비난하기도 했고(갈라 2,11-14),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매우 담대한 입장을 가졌음에도 이웃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줄 바에는 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주장하였다(1코린 8,5-13). 그리고 바오로 특전 역시 코린토1서 7장 11-15절의 내용에서 유래한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전파의 노력이 수백 년이 지나 멀리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던 해에 약 4천 명가량이던 신자는 1838년 말 약 9천 명으로 증가했다. 앵베르 주교의 마지막 업적은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그 수난기를 기록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후에 『기해일기』로 발전한 ‘1839년 서울 박해 보고서’ 기록이다. 다음 호는 기해박해로 시작하고자 한다.

 

* 조한건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 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으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다.

 

[월간 생활성서, 2018년 9월호, 조한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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