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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박종구 신부가 쓰는 다시보는 천주실의 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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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3-13 ㅣ No.421

[다시 보는 천주실의] (31) 리치의 윤회설(輪廻說) 비판

 

 

리치는 천주실의 상권(1~4편)에서 성리학자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 일부를 하느님과 관련시켜 논증하려고 애썼다. 이제 개략적이나마 그리스도교 교리를 설명한 리치는 하권을 시작하면서 유학과 상치된다고 본 불교를 다룬다. 특별히 윤회(輪廻)와 육도(六道: 업에 따라 살아가야 할 여섯 가지 삶의 길) 등 사상을 다루면서 인간 실존의 의미를 새롭게 논의한다.

 

여기서 리치는 인생관(人生觀)을 세 가지 관점으로 요약하여 제시한다.

 

첫째 관점은 오직 현재만 인정하는 인생관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의 삶만 인정한다. 둘째 관점은 과거·현재·미래를 인정하되 현세의 행복과 불행은 전생에서 행한 선악의 결과라고 본다. 내세의 삶도 현생에서 행한 업보로 결정된다. 셋째 관점은 현생에 잠시 머무는 인간의 삶이 내세의 영생을 결정짓는다고 본다. 둘째 관점이 불교의 윤회교리를 말한다면, 셋째 관점은 천주교의 교리이다. 두 관점에 관통하는 공통점은 현생의 삶이 내세의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미래를 지향하지만 과거의 삶을 언급하는 전생(前生)에 관한 불교의 교리, 곧 윤회설은 우리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주장일 것인가?(前世之論將亦有從來乎) 우리는 천주실의를 통해 리치의 불교 교리 이해가 얼마나 일방적인지 그리고 부족한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윤회설(輪廻之說)의 개념을 리치가 어떻게 비판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만약 사람의 영혼이 다른 몸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면, 그 영혼은 본래 가지고 있던 지능(靈, 혹은 靈能)을 발휘하게 된다. 즉 전생에서 있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이런 기억을 확인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어본 바가 없다. 그렇다면, 불교나 도교에서 전하는 전생 이야기들은 어찌된 일인가? 리치는 이런 예의 이야기들은 마귀들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전생의 일(선과 악)을 기억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현세의 행복과 불행이 전생의 인연에서 유래한다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권선징악을 행하시는 하느님께서 윤회의 변화를 만드셨다면, 윤회설은 결국 무엇에 유익하단 말인가?

 

둘째, 하느님께서 인간과 짐승을 창조하실 때에 죄지은 이를 짐승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다. 사람이나 짐승에게 각각의 영혼을 부여하셨기 때문에, 옛날 사람의 영혼이 지금의 짐승 혼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지금의 짐승이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의 짐승 혼과 옛날의 짐승 혼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짐승의 혼에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

 

셋째, 혼(魂)에는 생혼(生魂), 각혼(覺魂), 영혼(靈魂)의 세 종류가 있다. 생혼은 초목들의 혼으로서 이것을 부여받은 존재를 살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각혼은 짐승들의 혼(魂)으로서 이를 부여받은 존재를 생장(生長)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목구비(耳目口鼻)를 통해 주변상황을 지각하게 한다. 인간의 영혼은 생혼과 각혼의 기능을 포함하며, 이를 부여받은 존재들이 추론(推論)과 이치(理致) 등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본래의 혼(魂)이 존재한 뒤에 본성이 생기고, 본성 뒤에 종(種, species)이 결정되니, 본성의 같고 다름(同異)은 혼(魂)의 같고 다름에서 유래하고, 종의 같고 다름은 본성의 같고 다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나 짐승의 모습이 사람과 다르다면, 종(種), 본성(性), 그리고 혼(魂)이 어찌 다르지 않겠는가? [가톨릭신문, 2011년 3월 6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32) 세상의 해로운 것들 인간이 자초한 결과

 

 

넷째, 사람의 모습이 여타 짐승과 준수하게 다르다면, 혼(魂) 또한 그럴 것이다. 예를 들면, 목수가 목재나 쇠를 가지고 기물을 만들 때, 의자나 탁자를 만들려고 한다면 나무를 사용하겠고, 예리한 기물을 만들려고 하면 쇠를 사용한다. 그러니 사람의 몸이 짐승과 다르면, 사람의 혼이 짐승의 혼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혼은 자기 몸과 합할 뿐이지 남의 몸과 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섯째, 윤회를 설명하는 인혼변수(人魂變獸: 사람의 혼이 짐승으로 변한다)는 특별한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생에) 저지른 부정한 행위가 어떤 짐승을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의심일 뿐이다. 사특한 성정은 타고난 인륜도덕을 파괴하며 마음속에 쌓아둔 악행을 멋대로 하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얼굴을 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횡포하고 잔악한 자가 살인에 습관이 들었다면, 그리고 오만불손한 자가 속임수에 익숙하고 겸양을 모르고 남을 해치고 도둑질로 남을 해치면서 생활을 한다면, 오히려 윤회의 결과로 짐승이 되고 악인이 되어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욱 더 용이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는 게 형벌이라면, 이 형벌을 이용하여 악행을 더 크게 저지를 것이다. 이들은 사람으로 살아 있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짐승의 성정으로 멋대로 행동하는 존재들이다. 오직 수치를 아는 이들만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섯째, 불교의 살생금지는 도살당하는 소나 말이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환생이라 여겨서 차마 죽일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나 말을 농사에 사용하는 예를 들어 논밭을 갈게 하거나 수레를 끌게 하는 행위를 어찌 견딜 수 있는가? 부모를 죽인 것과 짐을 지우고 저자 거리에서 채찍으로 욕보이는 것도 동일한 죄가 되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이 짐승으로 변할 수 있다(人變禽獸)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리치는 단언한다.(V-4)

 

만약 윤회한 뒤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같은 부류(사람)로서 아무 상관없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현세의 인간이 과거에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던 사람인지 모르는데 과연 아무런 거리낌 없이 결혼할 수 있겠는가? 전생에 가족의 일원이, 혹은 종이 후세에 환생하여 자신의 배우자가 되리라고 누가 알겠는가? 성리학에서 말하듯이 인륜을 크게 어지럽히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고 결혼을 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불교의 윤회설은 이에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축생의 살생금지 비판은 충분한 설명이 되었는가? 혹시 이는 유학에서 말하는 인(仁)에 가깝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자비 실천은 아닌가? 그러나 리치는 윤회설에 따라 불교를 따르는 이들의 육식습관을 비판하면서, 초하루와 보름에만 금육을 지킨다면 이것은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의 무용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하느님은 세상의 만물이 다 쓰일 곳이 있게끔 창조하였다. 세상에 쓰일 곳이 없이 창조된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무익하거나 인간을 해치는 독충이나 동물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 지식의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하느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만물을 인간이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제공했고, 이것들은 해로운 것들이 아니었다.(天主初立世界.. 皆以供事我輩, 原不爲害)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거역하면서 사물들 또한 인간을 거역하게 되었을 뿐이다.(自我?逆上帝, 物始亦?逆我) 그러므로 이런 해로움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자초한 결과일 뿐이다.(則此害非天主初旨, 乃我自招之耳) (V-8) [가톨릭신문, 2011년 3월 13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33) 불교의 살생금지와 그리스도교의 금육재계

 

 

한편, 리치가 하느님의 창조신앙을 통해 인간을 포함하여 동식물의 존재론적 차별을 강화한 불편함을 준다면, 윤회설의 생명사상은 그리스도인이 수긍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생명의 차별상을 지양하려는 불교의 논리는 그리스도교의 창조사상 안으로 개방적으로 통섭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육식(肉食)을 금하는 윤회설의 이유를 모두 살펴볼 수 없지만, 윤회의 고통이라는 관점만 강조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사슬 속에 있는 게 아닌가? 리치는 윤회설의 관점에서 식물도 동물도 먹을 수 없다는 논리를 유도하면서, 오히려 하느님께서 창조한 개별 존재들의 유용성이 윤회의 살생금지를 무효화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주장은 한 시대의 이해와 해석에 제한될 이야기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오해와 오류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살생금지와 관련해서 그리스도교가 허용하는 금육(禁肉)과 재계(齋戒)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가적(佛家的) 금육과 그리스도교적 금육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리치는 금육재계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V-11)

 

첫째, 과거의 잘못, 곧 도리(道理)를 지키지 못했음을 때때로 기억하며 부끄러워하고 후회한다는 의미에서 금욕재계를 행한다. 이 도리(道理)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준 것이요 성현군자가 글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기에 일반인은 물론이고 성인일지라도 스스로 몸을 낮추고 낮추어 자신의 잘못이 씻어지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은 그를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시어 죄를 사면할 것이다.

 

둘째, 인간은 대체로 정의(正義)를 따르지 못하고 인욕(人慾)에 따라 행동한다. 의로움(義)과 달리 사욕(私慾)은 인간의 본래 성품을 해치며 도리(道理)를 망친다. 사욕을 막으려면 인간 자신의 혈기(血氣)를 제어해야 하니, 도(道)를 닦고자 하는 이는 먼저 육체(肉體)를 도적이나 원수처럼 노엽게 보아야 한다(怒視是身若寇讐). 또한 마음과 육체는 주종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으니, 종이 너무 건장하면 주인에게 거슬러 대항할 수 있고, 혈기가 지나치게 강하면 마음의 의지를 위태롭게 한다. 따라서 소식(素食)을 하고 재(齋)를 지키는 까닭은 인간의 오욕(五慾: 귀, 눈, 입, 코, 마음(耳目口鼻心)에서 발생하는 다섯 가지 욕망, 혹은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제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세상은 하느님의 도리를 추구해야 할 잠깐 머무는 장소이다. 군자는 언제나 자기 마음을 닦고 덕을 행하니, 덕을 실천하는 즐거움은 영혼의 본래 즐거움이요 하늘의 천사들과 같아지는 길이다(德行之樂, 乃靈魂之本樂也. 吾以玆與天神俟矣). 반대로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그것이 심하면 심할수록 짐승과 같아지는 것이다. 인의(仁義)는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해 주고, 오미(五味)는 사람의 입맛을 시원하게 한다(仁義令人心明, 五味令人口爽). 그러나 풍성한 음식의 쾌락은 몸과 마음 모두를 크게 상하게 할(豊膳之樂繁而身心俱見深傷矣) 위험이 있다. 세상 사람의 재앙은 바로 마음에 병이 들어 덕행의 아름다운 맛을 모르는 것이니(世人之? 無他也, 心病而不知德之嘉味耳), 하느님의 도리를 따르기 위해서 소식(素食)과 재(齋)를 준행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신문, 2011년 3월 20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34) 유가(儒家)에 대한 리치의 오해

 

 

리치에게 불가의 윤회설이 심각한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면, 현실적 인의(仁義)의 실천을 중시하는 유가(儒家)의 인생관은 훌륭한 논의의 주제이다. 유가(儒家)에게 군자의 길은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이다. 그 길의 종착점이 그리스도인에게 천국과 지옥이라면 유가에겐 인의(仁義)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로움(利) 때문에, 혹은 해로움(害) 때문에 인의(仁義)를 선택한다면, 혹시 그것은 공리주의적 타산에 의거한 것은 아닌가? 이로움 때문에 인의를 실천하라고 권고하지 않는 유가의 주장에 대해 리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유가적 이상주의(理想主義)의 질문에 천당과 지옥의 상벌론(賞罰論)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위적 혹은 가식적 의도(意)를 경시하는 유가의 질문이 리치에게는 도덕적 의지 내지는 자유의지의 무시로 잘못 이해된다. 이 점에서 동일한 언어를 다르게 이해하는 의미의 불일치가 나타난다. 이런 불일치를 염두에 두고 리치의 설명을 따라가면, 리치는 <대학(大學)>의 첫머리를 선악의 윤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대학(大學)은 본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표방함으로써 개인의 수행차원에서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차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그래서 수신(修身)의 내면적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말들이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 등의 개념어들이다. 선악을 설명하는 리치의 논리는 유가(儒家)의 수신(修身)을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유가의 수신이 정치적 이상인 평천하를 형이상학적 주제와 연결시킨다면, 리치는 윤리적 주제를 종교적 이상으로 승화시키려 한다.

 

리치가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전제하고 윤리적 차원에서 인간의 의지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유가는 인본주의적 태도에서 출발한다. 유가에게 지선(至善)은 인간이 도달해야 할 지고(至高)의 경계이지만, 초월적 가치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지선의 가치는 대학의 3강령(주자의 이해)-명명덕(明明德), 친민(親民), 지선(至善)-의 하나로 제시되며, 대학(大學)은 이를 인간의 길로써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천국이 그리스도교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경계라면 종교적 의미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리치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지향적인 의지와 의지를 실천하는 덕목, 그리고 그 원천인 하느님의 존재이다.

 

논어(論語)는 의(意)와 관련하여 공자께서 네 가지 병폐를 끊었다고 하였다. 첫째는 인의적인 의도를 하지 않았다(毋意). 둘째는 꼭 그렇다고 단정하지 않았고(毋必), 셋째는 억지로 고집하지 않았으며(毋固), 넷째는 오직 자기만이 옳다고 하지 않았다(無我).(子罕 9,4). 리치는 이를 유가의 입을 빌려 3가지로 요약하여 무의(毋意), 무선(毋善), 무악(毋惡)이라고 고쳐 말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의미의 오해는 여기서도 계속된다. 리치는 공자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며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없는 것이라면, 궁극적 의미를 실천하도록 요청하는 하느님을 무의미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것을 경계하는 태도와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얼마나 다른 영역인가?

 

유가에게는 도리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선이요 덕행이며, 도리를 어기는 것은 악이 되고 못난이가 되는 것이다(夫順理者卽爲善, 而稱之德行 犯理者卽爲惡, 而稱之不才). 그렇다면 인의와 덕의 실천은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의 의지와 어떤 관계인가? 이 관계는 리치에게 너무도 분명하다. 의지는 행동에 선행한다는 논리적 선후관계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의지가 선악의 근원이다(意爲善惡之原明著矣)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3월 27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35) 인의(仁義)의 실천은 결과 아닌 덕을 닦는 것

 

 

‘인의(仁義)를 실천하라’는 유가(儒家)의 본래 뜻은 무엇일까? 인의의 실천이 유가(儒家)의 의지에 가깝다고 할 것인가? 성인의 가르침은 일의 공로나 결과에 두지 말고 오로지 덕을 닦는 데만 두라(聖人之敎…而其意不在功效, 只在修德)고 한다. 그리고 선(善)을 권면하되 덕(德)의 아름다움을 보고 보상을 논하지 말라(勸善而指德之美, 不指賞)는 게 전통적인 유가의 태도다. 그렇다면, 실제적 차원에서 유가적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유가의 경전을 상당히 습득했음을 알려주듯이 리치는 중국의 고대 이야기를 모아 놓은 <상서(尙書)>와 맹자(孟子)와 주역(周易) 등에서 인용한다. 여기서 유가적 형이상학이 제기하는 질문이 리치에게는 정치 경제적 차원의 질의응답이 된다.

 

리치의 해석은 공자의 저술인 <춘추(春秋)>가 사실들의 시비(是非)를 가리되, 시비의 원인을 말해주는 이해(利害)를 언급하지 않은 까닭을 말해준다. 세속의 이해(利害)는 육신 상의 이해(利害), 재물에 대한 이해(利害), 명예와 평판에 대한 이해(利害) 등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리치는 명예와 평판에 대한 이해는 다른 두 가지 이해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맹자의 인의론(仁義論)은 인정(仁政)을 베풀면서 천하의 왕이 되지 못한 예가 없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양혜왕梁惠王, 上 참조) 천하의 왕이 되는 일은 사회적 차원에서 모든 이에게 이해가 관련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해(利害)는 세상에 속한 것으로 내세(來世)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의 내세의 이해득실은 매우 크고 실질적이어서 현세의 이해득실과 비교할 수 없다.

 

한편, 내세의 걱정이 미래와 관련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농부가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의 수확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나무는 심은 지 수십 년이 지나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 일국의 군주도 먼 곳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갓 당장 눈앞의 일만 돌본다면, 나라를 잃고 천하를 잃을 수밖에 없다. 죽은 다음의 일이나 내세에 대한 염려가 필요한 일인가? 그렇다. 리치는 춘추(春秋)와 중용(中庸) 같은 경전들은 후대를 위한 염려에서 편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현세에서 이로움(利)을 추구하거나 해로움(害)을 멀리하는 것과 내세(來世)에서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멀리하는 것을 같은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겠는가? 리치는 아주 단호하게 말한다. 흉하기도 하고 길하기도(或凶或吉) 한 세상의 일은 내세와 비교할 수 없다. 세상의 이야기는 그저 내세(來世)의 그림자일 뿐,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마치 배우들이 극장에 있는 것과 같다(人生世間, 如俳優在劇場). 배역은 감독-주인에게 달려 있고, 배우들은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연극이 완성된다. 또한 세상의 소유나 역할은 한 번 왔다가 떠나야 하는 우리에게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알몸과 빈손으로 왔다가 가는 것이다(不論君子小人, 咸赤身空出, 赤身空返).

 

그렇다면, 세상을 선하게 살며 천국을 지향하는 이들은 어떤 의지를 가지는가? 리치는 선행을 하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올바른 의지를 세 형태(凡善行者有正意三狀)로 분류한다. 1) 천당에 오르고 지옥을 면하려는 의지(因登天堂,免地獄之意), 2) 천주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의지(因報答所重蒙天主恩德之意), 3) 천주의 거룩한 뜻에 화합 순응하려는 의지(因翕順天主聖旨之意). 물론 리치는 세 번째 의지를 가진 이의 태도를 최고로 이해한다. 첫 번째 의지는 지옥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교훈적인 기능을 한다. 악인이 악을 싫어하는 것은 형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선인이 악을 싫어하는 것은 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惡者惡惡, 因懼刑也, 善者惡惡, 因愛德也).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3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다시 보는 천주실의] (36)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실재인가, 개념인가?

 

 

그런데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은 실재인가, 개념인가?

 

리치는 관념으로 이해될 두 단어를 하느님께 순응하는 세 번째 지혜로운 태도로 어떤 수도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VI-10)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와 그의 제자 유니페루스(Juniperus)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사악한 마귀가 유니페루스를 시기 질투하여 스승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 이렇게 예고했다. “유니페루스의 덕은 진실로 크지만, 천당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 이는 하느님의 엄명이니 바꾸지 못한다.” 프란치스코는 매우 놀랐지만, 이 말을 누설할 수 없어서 제자를 볼 때마다 심히 애통하여 눈물을 흘리곤 했다. 스승의 태도가 의아한 제자는 어느 날 스승에게 나아가 물었다. “저는 날마다 열심히 하느님을 공경하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저를 보시는 눈이 예전과 다르고, 또 자주 눈물을 보이시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스승이 제자의 요청에 어렵게 답을 하니 제자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어찌 근심할 일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사물을 주재하시니 그 뜻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제가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천당이나 지옥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극히 존귀하시고 지극히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을 마땅히 공경하고 사랑할 따름입니다. 지금 비록 저를 버린다 해도 제가 어찌 조금이라도 게으를 수 있겠습니까? 더욱 더 하느님을 공경하고 섬길 따름입니다. 지옥에 있게 될 때에 곧 바로 하느님을 섬기려 하여도 그렇게 하지 못할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홀연히 깨닫고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내가 앞서 들은 바가 틀렸다! 도리를 배움이 이와 같다면 지옥의 재앙을 받는 일이 어찌 생길 수 있겠는가?(?哉, 前者所聞! 有學道如斯, 而應受地獄殃者乎)”

 

리치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천당이나 지옥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인(仁)과 의(義)를 수련하기 위해 빌려온 개념으로 이해한다. 단순히 즐거움과 고통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문자적 의미에서만 그렇다. 천당에 오르는 사람은 이미 마음을 선에 두고 있으니 편안함이 바뀔 수 없고, 지옥에 내려가는 사람은 악에 지향을 두고 있으니 그 또한 어둠이 바뀔 수 없다. 천당과 지옥은 사람이 덕을 추구하며 불선한 곳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하는 데 있고, 죄악에 물든 소인배들과 멀어지도록 하는 데 있다. 천당과 지옥은 실재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는 상징적 은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도록 초대한다. 그러나 선과 악의 응보를 현실적 개념으로 보려는 유가(儒家)는 자신이나 자손(子孫)에 국한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즉 현실에서 보상과 응징을 받는다는 유가적 관점에서 사후의 천당과 지옥의 개념을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일반 민중에게 천당과 지옥 논쟁은 사실 종교적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주제이다. 지상의 인간이 영원한 삶을 바라는 존재라면 이것이 곧 종교적 형이상학의 주제가 될 것이나, 일차적으로 세상은 천당과 지옥을 상정할 수 있는 인간의 사유가 전개되는 곳이다. 인간이 천당에 속할 존재라면 그는 어떤 존재일 것이며, 지옥에 떨어질 존재라면 그는 어떤 존재일 것인가? 이 논쟁은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영역으로 확장되지 않을 수 없으며(VII), 인간 본성의 완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본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고, 덕을 온전히 닦을(修德)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강생이 언급되지 않을 수 없다(VIII).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궁극적 관심은 세상에 태어난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박종구 신부(예수회 · 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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