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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내 삶을 흔든 작품: 본회퍼의 옥중서한집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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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97

[내 삶을 흔든 작품] 여기서 지금, 남을 위한 삶

‘본회퍼의 옥중서한집’과 만나다


‘삶을 흔든 작품’에 관한 기고문 집필 요청을 받았습니다. 어언 73세가 되고 사제 수품 41년째 되는 해를 보내면서 어쩌다 보니 그동안 줄곧 연구와 교육 부문에 머물러 있었기에 접하게 된 작품들이 꽤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42년 전 읽은 책 한 권으로부터 받은 감동은 유독 오늘날까지도 전혀 사그라지지 않은 채 여운이 이어오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이 책이 제 삶을 흔든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고는 어느새 그동안 걸어온 삶의 도정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듯합니다.


내세에서 영혼 구원을 추구하던 신앙

저는 영혼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요리문답서(要理問答書)」로 교리를 배운 세대에 속합니다. 그리고 1955년부터 1967년까지 지속된 신학생 때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늘 마귀와 세속, 그리고 육신 등 영혼의 세 원수의 유혹을 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형성되면서, 영혼 구원을 위해 내세 지향적 자세가 부지불식간에 몸에 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1968년부터 시작된 유럽 유학생 시절 초기까지 내내 교회 중심적 자세로 내세 지향적 삶을 산 셈입니다. 현실 세계 상황의 개선 또는 변혁을 위해 투신하는 삶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교회 안에서 성사 집행에 충실하며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전념하는 사제를 목표로 삼고 나날을 살았다고 기억됩니다.


나치 시절 순교한 독일 신학자와 만남

그런데 1970년 1월 초 유학 중이던 독일 뮌스터 교구 소속 신학생들과 함께 부제 서품 피정에 참가하던 첫날 시작에 앞선 휴식시간에, 한 독일인 동료로부터 틈나는 대로 읽어보라고 건네받은 책 한 권이 제 의식에 엄청난 변화를 일게 할 줄을 그 당시에는 전혀 짐작조차 못하였습니다. 그 책이 바로 「저항과 복종」이라는 제명의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한집이었습니다.

사후 간행된 유고집을 통하여 그가 걸었던 인생 역정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24세 되던 1930년에 교수 자격을 취득하여 전도유망한 신학자로 각광받았으나, 1933년에 일어난 히틀러의 정권 장악으로 험난한 길이 그의 앞을 가로막게 됩니다.

당시 그는 미국 뉴욕 연수 체류에 이어 1935년까지 영국 런던에서 독일인 교회 목사로 봉직하고 있었는데, 고난이 닥칠 것을 예감하면서도 귀국길에 오르고, 나치 정권의 반인륜적 통치 이념에 굴종하여 호응하던 대다수 교회 지도층과는 달리 참 예수 제자의 길을 걷고자 노력합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노선 투쟁에 뛰어들며, ‘고백’과 ‘순명’, 그리고 ‘뒤따름’ 등이 교회 신앙의 진정성을 구성한다고 갈파하였습니다.

그는 1935년부터 공동체 생활로 이루어지는 ‘고백교회신학교’ 학장으로 취임하여 참 예수 제자 양성을 위한 훈련을 밀도 짙게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당국에 의해 1937년부터 고백교회신학교 폐쇄, 교수 자격 박탈, 설교와 집필 금지 등의 조치들이 연이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938년 이래 교회 영역 밖에서 활동하던 지하 저항 운동가들과 접촉하고 동참하던 중 1943년 체포되고, 1945년 4월 9일 39세의 나이로 처형당하기 직전까지 일기를 남기고 외부인들에게 서한을 보냄으로써 사후에 그의 상념들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남을 위한 삶’으로서 현세적 신앙

그 옥중서한집 안에서 본회퍼가 걸었던 사상적 도정을 일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30년대 초에는 경험적 교회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육화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목회자의 사명이란 인류 구원을 위해서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청중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이룩하도록 교회 안으로 부단히 호출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는 복음 선포의 설교에 귀 기울이며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면서도, 밖에서는 복음과 상반되는 권력자의 지배 논리와 행동 양식에 다른 이들과 별반 다름없이 순응하며 사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상반되는 두 세계 안에서 별다른 갈등 없이 살아가는 저들에게 작용하는 은총을 ‘값싼 은총’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주저하고 번민하면서도 결국은 예수를 뒤따라 고난의 길을 택하는 데에서 작용하는 ‘값비싼 은총’으로 생활하는 참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역설하기에 이릅니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교회 영역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속화된 성숙한 세계 안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물으며 해답을 찾고자 고심하였습니다. 그는 이 해답을 예수님의 ‘남을 위한 삶’에서 드러나는 현실적 행업 안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현실 세계 안에서 ‘남을 위한 삶’을 통하여 발생하는 현세적 사건이라고 갈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창조 세계 안에서 ‘남’을 위해 친히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신 하느님을 예수님 안에서 뵈면서 ‘여기서 지금’ 그분처럼 현실 속에서 ‘남을 위한 존재’로 살아갈 때에만 참 신앙인으로서 살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현실 속에서 진실하게 ‘남을 위한 존재’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순교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본회퍼가 죽음을 예감하던 시기에 도달했던 상념이 담긴 그 책을 읽고 형언할 수 없이 깊은 감동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며, 그 여운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 ‘여기서 지금’ 이루어지는 ‘남을 위한 삶’이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성사적인 표지가 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죽음을 앞두고 깊은 고뇌 끝에 이른 그의 통찰이 내용 면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 안에서도 발견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본회퍼의 유고집은, 그리스도인이란 ‘남을 위한 삶’으로 현세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투신하는 사람이란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제 삶의 자세를 바꾸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작품인 셈입니다.

1979년 이래 고 김정훈 베드로 부제의 자당이신 김자선 엘리사벳 회장님 일행과 함께 결핵요양원을 일구고, 나중에는 공부방까지 운영하게 되는 사회복지단체 ‘희망의 집’ 가족으로 참여하게 된 데에는 이 책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아마 이 책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생각마저 들면서 노년기의 하루하루를 맞는 중입니다.

* 심상태 세례자 요한 - 몬시뇰. 수원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심상태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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