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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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뮈텔 주교의 사목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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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7 ㅣ No.823

뮈텔 주교의 사목활동

 

 

1. 머리말

 

1854년 프랑스 랑그르에서 출생한 뮈텔 주교는 1876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선교사로 파견된 이래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885년 그는 신학교 교수로 임명됨에 따라 프랑스로 귀국하였으나 1890년 조선 대목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됨으로써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뮈텔 주교가 주교로서 활동한 기간(1890~1933)은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43년으로 조선시대의 박해가 끝난 이후 신자가 급속히 증가하고 새로운 틀을 잡아가는 중요한 시기였다.

 

뮈텔 주교는 한국 교회가 기존의 것들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거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필요한 것들을 도입하거나 창조해야 하는 전환기에서 최고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천주교회의 교계적 특성상 교구장 주교로서 그가 이끌어간 방향은 당대의 한국 교회가 틀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현대의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들도 뮈텔 주교의 시대를 거치면서 정착된 것들이 상당하다. 대표적인 예로 판공성사 제도와 한국 교회의 교구장들이 활발히 행하는 사목 방문과 견진성사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박해시대에도 그 원형이 있었으나 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전환기를 거치면서 정착되었는데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뮈텔 주교였다. 따라서 그가 주교로서 행한 사목활동을 고찰하는 것은 당대의 한국 교회에 대한 이해를 넘어 현대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다.

 

뮈텔 주교는 14년간은 신부로서, 43년간은 주교로서 천주교 성직자가 수행해야 하는 사목활동에 무엇보다 충실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연구에서는 그의 대외적인 측면이나 사목활동 외의 측면에 초점을 두어 연구가 진행되어 성직자로서의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1) 사전적인 의미에서 사목활동(司牧活動)이란 천주교의 성직자가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행하는 활동 전체를 말하지만,2) 성직자로서의 뮈텔 주교가 기본적으로 행한 신자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나 성무활동에 대해서는 그간 연구가 소홀하였다.

 

성직자로서의 뮈텔 주교를 보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그가 주교로 활동하는 동안 남긴 사목 교서와 그가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행한 사목 방문에 주목하였다. 신자들에게 공적으로 발표된 사목 교서는 뮈텔 주교가 지향하는 사목방침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뮈텔 주교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사목 방문은 그의 사목방침이 실천되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사목 교서에 나타나지 않은 것들이 그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뮈텔 주교의 사목활동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그것이 당대와 현대의 한국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가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2. 사목 교서

 

사목 교서는 교구장 주교가 천주교의 교리 · 신앙 · 규정 등에 관하여 교구 내의 모든 신자들(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에게 내리는 서한 형식의 공식 문서를 말한다.3) 주교의 공식 문서로는 주교 명의의 공문이나 담화문이 있으며, 개별적으로는 연설이나 미사 강론이 있을 수 있다. 형식면에서 사목 교서는 교구장 개인의 명의로 발표되는 개별 교서와 여러 교구장들이 함께 발표하는 공동 교서가 있다.4)

 

뮈텔 주교의 시대에도 사목 교서는 있었으나 오늘날과 같은 형식을 갖춘 것도, 시기마다 정기적으로 발표되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 교회가 1960년대 이후 정형화된 형식을 갖춘 현대적 공식 문서의 생성ㆍ보관 · 발송 등의 체계가 세워짐에 따라 사목 교서도 일정한 형식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전례시기에 따라 정기적으로 발표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5)

 

뮈텔 주교가 주교로 활동하는 동안 발표된 사목 교서들은 현대와 같은 공문서의 형식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 교구장의 결정사항은 연중 한두 차례 이뤄지는 사제 피정이나 특별한 행사 때에 구두로 선포되거나 개별적인 편지 형식의 서한이 회람처럼 돌려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회람을 누군가 전사해 놓은 것이 발견되거나 당시의 교회 출판물에 실려 있는 것들을 통해 사목 교서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형식은 다르지만 뮈텔 주교가 남긴 공적인 교서로 볼 수 있는 개별 교서와 공동 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6)

 

  

 

1) 공동 교서

 

총 28개의 사목 교서 중 공동 교서가 21개, 개별 교서가 7개이다. 공동 교서는 1911년에 대구 대목구가 분리된 이후부터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공동 교서 중에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9)에 관련된 것과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것이 각각 4개로 가장 많다. 세계대전으로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징집됨에 따라 큰 곤란을 겪어야 했던 한국 천주교회로서는 전쟁의 빠른 종식이 무엇보다도 절실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이 함께 기도할 것을 권고하였다. 순교자들에 대한 교서는 1925년을 전후하여 발표되었는데,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것과 그들에 대한 공경에 만전을 기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세계 교회의 규정이나 권고에 관련된 공동 교서가 6개 있다. 1917년의 교서는 단식재와 금육재에 관한 것으로 세계 교회의 규정에 따라 한국 교회의 규정도 완화되어 발표되었다. 이 교서가 반포되기 전의 단식과 금육재 규정은 매우 엄격하여 사순 시기의 주일 외의 모든 날, 사계절[四季]에 각각 정해진 날에 3일씩, 성령 강림 전날과 성모 승천 전날, 모든 성인의 날 전날과 예수 성탄 전야 때 등 한 해에 60일 정도 단식재를 지켜야 했다.7)

 

박해시대에는 이 엄격한 규정이 신자들의 신분을 드러나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기 때문에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드리는 편지(신미년 편지)에는 이 단식재와 금육재 규정을 관면해 달라고 청원한 바 있었다.8) 하지만 이 규정은 일반적인 관면 없이 고수되어 오다가 191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울 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의 공동 교서를 통해 조선 신자들 전체에게 관면이 선포되었다. 이는 1918년 성령 강림 대축일부터 세계의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보편 교회법의 규정이 한국 교회에 조금 빨리 적용된 것뿐이었다.

 

1918년에 발표된 공동 교서는 세계 천주교회법의 규정들을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동안 사용된 한국천주교회의 법, 즉 1857년에 선포된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와 1887년에 공포된 《한국 교회 지도서》는 세계 천주교회법에 근거하여 작성된 것이었지만 박해시대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의 특수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8년에 이르러 공동 교서를 통해 한국 천주교회도 세계 천주교회의 법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선포되었다. 이는 한국이 더 이상 예외를 인정받아야 할 만한 조건에 놓여 있지 않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1921년과 1922년 3월의 교서는 성인(聖人)들의 기념 축제를 맞이하여 함께 기도하기를 권고하는 교황의 교서를 한국 교구장들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고, 1926년과 1929년의 공동 교서 역시 교황이 내린 전대사를 그들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가 세계 천주교회의 흐름 안에서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1912년과 1926년 12월의 교서는 죽은 일본 천황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다. 이런 조치는 고종이 사망했을 때에도 취해졌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사망하자 뮈텔 주교는 자신이 직접 궁궐로 찾아가 애도의 뜻을 표했고,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 학생들이 궁궐로 조문가는 것을 허락한 바 있다.9) 천주교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 것을 교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10)

 

1931년에 발표된 교서는 서울에서 열리는 주교회의를 위해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밖의 다른 공동 교서들은 세계 천주교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내용을 한국의 교구장들이 현실에 맞게 규정하여 발표한 것들이다. 1914년의 교서는 이듬해의 첫날이 할손례(아기 예수가 할례를 받은 날) 축일로 금육재를 지켜야 하는 날이지만 양력 설날이므로 금육재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1918년의 교서는 이전의 미사예물 액수가 너무 적으니 현실에 맞도록 조정한다는 내용이다. 1922년 10월의 교서는 일요일이나 대축일 미사에 빠졌을 경우 어떻게 대신할 것인가를 규정하고 있고, 1926년 11월의 것은 새로 개정된 교리문답을 사용한다는 교서이다.

 

2) 개별 교서

 

뮈텔 주교의 개별 교서 7개는 공동 교서와 맥락을 함께 하면서도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1890년에 뮈텔 주교가 발표한 첫 번째 개별 교서는 주교품을 받은 직후인 9월 29일에 작성되었다. 이 교서에서 뮈텔 주교는 한국의 신자들을 축복하고 나서 하느님의 자비와 한국 순교자들의 전구를 간구하였다. 이후 교구장으로서의 표어를 ‘순교자들의 꽃을 피어나게 하라’로 정했다고 밝히면서 주교 문장(紋章)에 담겨 있는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다.

 

사목 교서는 아니지만 뮈텔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첫 번째 편지는 그의 사목방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뮈텔 주교는 한국에 입국한 지 20일 후인 1891년 3월 12일에 이 편지를 썼다.11) 서울에 도착했을 때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놀랐다고 말하며 몇 가지 어려운 점들을 언급하였다. 한국에 부임한 지 보름 만에 겪은 대구 본당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의 추방 사건 소식을 자세히 언급한 후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8명의 선교사를 청했으나 3명만을 보내주었다고 걱정하였다. 또한 순교자들의 사적을 조사하던 신부가 다른 일에 바쁘기 때문에 그를 대신할 적임자를 추천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뮈텔 주교는 교구장으로 부임해 오자 곧바로 순교자들의 시복을 적극 추진할 것임을 이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첫 개별 교서와 한국에 재입국한 후 파리로 보낸 첫 번째 편지에 나타나듯이 뮈텔 주교는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추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뮈텔 주교의 두 번째 개별 교서는 1893년 8월 12일에 발표된 성가회(聖家會)의 창립에 관한 것이다. 1872년에 교황 레오 13세는 성가회를 천주교의 신심단체로 승격시켰다. 교황은 사회주의 같은 새로운 사조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가족 관계가 위협받을 수 있음을 염려하며 많은 신자들이 성가회에 가입할 것을 권장하였다.12) 그러나 뮈텔 주교는 성가회의 도입을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었다. 그는 성가회를 한국 천주교회에 도입하는 취지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이 회에 가장 요긴한 것은 부모의 본분과 자녀의 직책을 다함이니, 이는 회중(會中) 회외(會外)를 막론하고 한 가지로 힘쓸 바이라. 매양 보니, 무릇 부모 되는 이 자식을 사랑하되, 잘 가르치지 못하는 고로 자식의 수계가 타당하지 못할뿐더러 필경 가도(家道)가 문란하여 영육이 걱정되는 일이 많으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요? 이번 성가회 윤음은 더욱 이런 교우(敎友)들을 위함인 듯싶도다. 교우들은 이 성가의 거룩한 표양을 힘써 본받아 가도(家道)를 세우며, 자식을 훈계하는 범절을 일절 성가(聖家)를 모범으로 하여 영육의 큰 이익 받게 함이 나의 바람이로다.”13)

 

이는 뮈텔 주교가 평소 한국의 가정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의식의 반영이기도 하다. 부모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뮈텔 주교는 한국의 가정교육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굴레 벗은 말과 같이 방임하여 기르는 것을 염려하기도 하였다.14) 뮈텔 주교는 성가회의 도입을 통해 신자들의 가정교육을 개선시켜 보고자 하였다.

 

1908년 1월에 발표된 세 번째 개별 교서는 혼인에 관한 것이다. 뮈텔 주교는 이 교서를 통해 한국 천주교회도 세계 천주교회법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전에는 각 지방의 상거(相距)가 멀고 각국의 풍속이 달라 혼배성사의 규식도 대동소이하여 여일치 못하더니, 이제는 천하 시세가 점점 변하여… 전에 서로 모르던 나라 사람들이 지금 서로 통상하여 사귀니, 이로 인하여 성교회 혼배의 규식을 마련하여 온 천하에 일체(一體)되게 하심은 교우들로 하여금 혼배성사의 은혜를 더욱 얻어 입기 쉽게 하고 또한 혼배 사정에 미심(未審)한 연유를 없게 하심이라.”15)

 

1908년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 교회 최초의 시노드라 불리는 1857년의 성직자회의 이후 발표된 <장주교윤시제우서>와 이를 계승한 1887년의 《한국 교회 지도서》의 규정을 따랐다.16) 두 법령은 1803년 중국 사천교구에서 열린 시노드의 결과에 바탕을 둔 것으로 중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법령집이었다. 뮈텔 주교가 1908년에 이르러 세계 천주교회의 법을 따른다고 밝힌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예외를 인정받아야 할 만한 조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의 규정들을 세계 천주교회와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1911년에 발표된 뮈텔 주교의 네 번째 개별 교서 역시 세계 천주교회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내용이다. 그해 7월 교황 비오 10세가 의무 대축일에는 단식재와 금육재를 관면한다는 칙령을 발표함에 따라 한국 교회도 12월 8일 성모 무염시태 축일에 금육재를 관면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뮈텔 주교는 1908년에 한국 교회의 혼인 규정을 세계 교회의 그것과 일치시킨 이후 세계 교회의 흐름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며 교회를 이끌어 갔다.

 

1920년의 다섯 번째 개별 교서는 부교구장 주교를 임명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나의 나이 이미 쇠로하고 기력이 점점 감함으로”라고 시작되는 이 교서는 교구의 일을 뮈텔 주교가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워 부교구장 주교를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뮈텔 주교는 환갑을 맞은 1914년부터 부교구장 주교를 임명할 뜻을 두고 있었으나 신부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17) 뮈텔 주교는 66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발표된 이 교서는 사실상의 은퇴 선언이나 마찬가지였고, 이후 그는 실질적인 모든 권한을 부교구장인 드브레 주교에게 물려주었다.

 

1928년의 여섯 번째 교서는 황해도 지역을 감목 대리구(監牧代理區)18)로 분리시키며 그 취지를 밝힌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를 장차 한국인들 스스로 이끌어가는 교회로 성장시키기 위해 한국인 신부를 감목 대리로 임명하여 맡긴다는 내용이다. 이 교서는 1920년의 교서와 함께 뮈텔에게 맡겨진 권한이 이양되어 가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뮈텔 주교는 이런 권한 이양이 종국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자립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마지막 교서는 1933년에 발표된 뮈텔 주교의 유언장이다. 이 유언장은 다른 신부들이 남겨 놓은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신부들의 유언장은 대개 재산의 처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19) 그러나 뮈텔 주교의 유언장에는 재산에 대한 내용은 없고 신자들에게 공적으로 용서를 청하고 당부하는 사목 교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뮈텔 주교는 유언장에서 자신이 천주교의 신앙을 받들다가 죽기를 원했으며 그 신앙을 간직한 채 죽게 되었다고 밝힌다. 자신의 희망은 한국인을 구원하기 위해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었는데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한국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바라며, 사랑으로 서로 뭉쳐 살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기를 청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목 교서의 내용들을 정리해 볼 때, 공동 교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세계 천주교회의 흐름에 한국 천주교회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1908년과 1917년에 발표된 뮈텔 주교의 개별 교서도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세계 천주교회의 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한국 천주교회가 박해시대처럼 예외를 인정받아야 할 만한 조건 속에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뮈텔 주교의 개별 교서는 공동 교서와 맥락을 같이하면서도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1890년 주교 서품 후에 보낸 첫 번째 교서를 통해 자신이 할 일은 한국 순교자들이 이룩해 놓은 바탕 위에서 신앙의 꽃을 피워나가는 것임을 밝혔다. 이것은 뮈텔 주교의 마지막 교서인 유언장과 맥을 같이한다. 뮈텔 주교가 지향하는 사목활동의 최종 목표는 한국에 천주교를 전파하여 한국인들을 구원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자들이 박해시대부터 남겨놓은 업적들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1893년의 성가회 도입 교서는 뮈텔 주교가 선교를 단순히 신앙의 전파로만 생각한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뮈텔 주교는 한국의 가정교육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성가회의 도입이 가정교육의 개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1928년의 황해도 감목 대리구 신설 교서는 뮈텔 주교의 사목방침이 한국 천주교회의 자립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선교지의 신자들 중에서 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이 이끌어 가는 교회로 성장시키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았다. 뮈텔 주교 역시 이를 지향하고 있었고 감목 대리구의 설치와 더불어 그것을 분명히 밝혔다.

 

사목 교서 전체를 통해 볼 때 뮈텔 주교가 추구하는 사목방침은 첫째, 한국 천주교회가 세계 천주교회의 흐름과 함께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 박해시대부터 신자들이 남겨 놓은 업적들을 이어받아 신앙의 꽃을 피워가는 것이며 셋째, 한국인들이 천주교를 믿게 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하고 나아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국 천주교회를 한국인 신자들이 이끌어 가는 교회로 성장시키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

 

 

3. 사목 방문

 

1) 방문 현황

 

교구장이나 준교구장이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가 정확히 존중되도록 감독하고 또 그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돌아보는 것을 사목 방문이라 한다.20) 뮈텔 주교가 교구장으로 있을 때에는 사목 방문을 ‘주교 순시’라 하여 그 목적을 다음의 네 가지로 보았다.21) 첫째, 견진성사를 주기 위해서이다. 둘째, 신자들의 신앙 상태를 살피고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지역 본당에서 하는 사업을 살피고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넷째, 살아 있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죽은 신자들까지도 기도로써 돌보기 위해서이다. 뮈텔 주교의 사목 방문은 일차적으로 이 네 가지를 지향하였지만 보다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해시대에도 교구장의 사목 방문은 있었으나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다. 공개적인 형태로 진행된 사목 방문은 한불조약 이후 개항장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도 선교사들의 여행이 허용된 후에야 실현될 수 있었다. 결국 한불조약 이후의 첫 교구장인 블랑(Gustave-Marie-Jean Blanc, 白圭三, 1844~1890) 주교 때부터 공개적으로 사목 방문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에도 많은 제약이 있었다. 선교사들의 내지 여행이 허용되기는 했으나 한국의 민중들이 천주교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자유로운 사목방문은 어려웠다. 뮈텔 주교 역시 교구장으로 재임한 초기에는 다소 제약을 받은 듯하다. 1891년과 1892년에는 서울 인근의 지역을 짧은 기간 동안만 방문하였고 189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장기간의 사목 방문을 할 수 있었다.

 

  

 

뮈텔 주교는 1914년 이후에는 사목 방문을 하지 않았는데, 주된 이유는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많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징집되자 이전과 같이 한 신부가 한 본당을 담당하고, 주교가 정기적으로 사목 방문을 하는 형태의 활동이 불가능해졌다.22) 1919년에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복귀하여 예전과 같은 수준으로 환원되었으나 1920년에 부교구장으로 드브레 주교가 임명되고 대부분의 권한이 그에게 위임되었기 때문에 뮈텔 주교의 사목 방문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4년 이전에 뮈텔 주교는 1895 · 1898 · 1904 · 1908 · 1909 · 1911년을 제외하고 매년 사목 방문을 하였다. 1895년 가을에는 본래 전라도 지역의 사목방문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한국의 불안한 사정으로 취소되었다.23)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 이후 미래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교구장인 자신이 서울을 떠나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898년에는 뮈텔 주교가 이질로 인한 설사병 때문에 두 달 동안 홍콩에서 요양을 했으므로 그해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목 방문을 하지 못한 듯하다. 1904년은 러일전쟁 때문이었고 1908년은 뮈텔 주교가 교육을 담당할 수도회를 물색하기 위해 유럽을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1909년 역시 유럽 방문의 여파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11년에도 사목 방문을 하지 않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건강상의 문제인 듯하다. 1년 전인 1910년의 사목 방문 중에 뮈텔 주교는 원주로 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졌다.24) 이로 인한 부상과 통증으로 간신히 사목 방문을 마칠 수 있었다. 이상의 6년을 제외하고 1891~1913년까지 26년에 걸쳐 전국의 신자들을 방문하였다.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지역은 10일 이내의 단기간으로 방문을 하거나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도중에 들렀고, 경기도 외의 지역은 적게는 한 달에서 많게는 네 달이 넘는 시간을 할애하였다.

 

뮈텔 주교의 사목 방문은 형태상 독특한 면이 있었다. 우선 한국 전역은 물론이고 국경을 넘어 간도까지 방문하였다는 점이다. 1892년경에 김영렬의 세례로 시작된 간도 지역의 천주교 전파는 한국인들이 이주해 감에 따라 빠르게 진행되었다.25) 간도 지역은 원산 본당 관할이었기 때문에 1897년에 주임 신부인 브레(Louis Eusebe Armand Bret, 白類斯, 1858~1908)가 최초로 이곳을 방문하였다.26) 간도 지역 신자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이주해 간 사람들이었다. 뮈텔 주교는 만주 교구장에게 이 지역의 관할권을 조선 대목구에 넘겨주기를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국경을 넘나드는 사목 방문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것은 만주와 조선 대목구장 간의 합의에 의한 것으로 경계는 그대로 두되 관할은 조선 대목구에서 하는 형태였다. 뮈텔 주교는 정해진 경계보다는 사목활동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추구하였다. 이것은 1911년에 대구 대목구가 분리되었을 때 논산 지역에 대한 사목을 대구 대목구가 관할하도록 한 조치에서도 나타난다.27) 논산 지역은 서울 대목구의 관할이었으나 사목활동이 편리한 대구 대목구에서 맡도록 하였다. 후에 두 교구 참사회 사이의 대립으로 서울 대목구로 귀속되었지만 뮈텔 주교는 사목활동이 원활한 지역에서 신자들을 관할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뮈텔 주교의 사목 방문이 가지는 형태상의 두 번째 특징은 본당뿐만 아니라 공소까지도 방문을 하였다는 점이다. 뮈텔 주교가 모든 공소를 다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중간 거점이 될 만한 공소에 머무르며 신자들을 만났다.28)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성직자의 부족으로 한 본당 신부가 관할하는 지역이 광범위하였고, 도로와 교통의 미발달로 오늘날과 같이 본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목 방문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중간 거점이 될 만한 곳으로 뮈텔 주교가 이동해 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신자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판공성사를 위해 본당 신부가 공소를 방문할 경우 하루에 고해성사와 교리문답(찰고)을 할 수 있는 인원과 머무르는 시간이 규정되어 있었다.29) 너무 많은 신자들을 짧은 시간에 만나게 되면 신자들의 신앙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취해진 조치였다. 뮈텔 주교 역시 신자들의 신앙 상태와 지역의 특성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 이 규정을 지켜나간 것으로 보인다.

 

2) 방문 중의 활동

 

뮈텔 주교가 사목 방문 중에 하는 주된 일은 고해성사와 견진성사, 그리고 교리문답이었다.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교리문답을 하는 것은 프랑스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교육 방법이었다. 전문가들은 19세기의 프랑스를 고해성사의 황금기로 규정하기도 한다.30) 산업화에 따른 가정 도덕의 문란 방지, 사회주의의 대두에 따른 사회질서 수호의지 등이 고해성사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고해성사 열풍의 중심에는 비안네(Jean Baptiste Marie Vianney, 1786~1859) 신부가 있었다. 흔히 ‘아르스의 본당 신부’(cure d’Ars)로 알려진 비안네는 거의 매일 12시간 이상 고해성사를 주었다.31) 그는 또한 교리문답을 통해서 신자들을 교육시켰다. 비안네가 사용한 방법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오래된 종교교육 방법이 강화된 것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져 한국에 적용되었다. 판공성사 때마다 신부들은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교리문답을 철저히 시행하였다. 뮈텔 주교 역시 이런 전통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여 사목 방문을 통해 실천해 나갔다.

 

뮈텔 주교는 사목 방문의 본래 업무 외에도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수행해 나갔다. 그중 하나가 지방 관리들을 방문하거나 방문을 받는 일이었다.32) 지방 관리들과의 교류는 1905년 이전에는 활발히 이루어지다가 이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뮈텔 주교가 지방 관리들과 교류를 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각 본당이 지역 사회 안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1893년에 있었던 뮈텔 주교와 대구 관찰사의 만남은 이를 대표할 만하다. 뮈텔 주교는 이 만남을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 두었다.

 

“73세나 되었지만 아직 매우 정정한 감사 이용직이 판관 신학휴, 그리고 현풍의 김 현감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수명의 비장(裨將)들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집사(執事), 군로(軍奴)들도 거기에 있었다. 그 군중의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33)

 

이 방문이 있은 후에 대구 본당의 주임 신부인 로베르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뮈텔 주교에게 보냈다.

 

“주교님의 이곳 방문은 저희들을 위한 착하신 하느님의 참된 강복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예비자가 벌써 60여 명에 이릅니다. …관찰사가 불어를 배울 결심을 해서 벌써 제 복사가 여러 번 그에게 가서 라틴어 알파벳과 함께 불어를 가르쳤는데, 저는 흥겨울 따름입니다.”34)

 

뮈텔 주교와 지방 관리들 사이의 교류는 이렇게 한 지역에 즉시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뮈텔 주교는 지방의 관찰사뿐만 아니라 현감을 비롯하여 지역의 유지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1886년 한불조약 이후 조선 정부에서 주도하는 박해는 종식되었으나 민중들의 천주교에 대한 거부가 여전히 팽배해 있었던 때의 이러한 교류는 천주교회가 각 지방에 자리를 잡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뮈텔 주교의 사목 방문은 그를 맞이하는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뮈텔 주교의 방문 차례가 오면 신자들은 때로는 20리 밖까지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1896년에 뮈텔 주교가 전주를 방문할 때의 광경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민 주교께서 순시하실 때에 정 회장의 주선으로 환영 절차를 성대히 했는데, 주교는 사인교를 타시게 하고 앞에는 포군 한 쌍, 다음에 전배(前陪) 한 쌍, 다음에 동자 한 쌍, 뒤에 후배(後陪) 한 쌍, 윤 신부와 구 신부에게는 포군은 없고 전 · 후배 동자 한 쌍씩을 같이하고, 신부 뒤에는 보교가 수십 틀이요, 말과 나귀 5, 60필이라. 시종하는 사람들은 수가 없어 가르내와 전주 10리 사이에 사람이 연속부절하여 그날 그길로는 내왕하는 행인이 없더라.”35)

 

모든 지역의 신자들이 전주에서처럼 뮈텔 주교를 맞이한 것은 아니었으나 주교를 맞이하는 성대한 행렬은 어느 곳에서나 있었다.36) 이것은 교구장을 맞이하는 예우에서 비롯되었으나 박해시대를 벗어나 자유롭게 주교를 맞이할 수 있는 기쁨도 한몫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오래된 교우촌에 갈수록 주교에 대한 환영은 더욱 열렬하였다.

 

여기에는 다소 의도적인 면도 있었다. 성대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천주교가 이제 아무런 제약 없이 믿을 수 있는 종교라는 것을 지역 사회에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한말의 불안한 상황 속에서의 이러한 세력 과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고, 그것은 신자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뮈텔 주교의 사목 방문은 이렇게 천주교회가 지역 사회 안에 정착하는 것을 돕는 역할도 하였다.

 

사목 방문에서 뮈텔 주교가 행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일은 기록을 남겨두고 증언을 청취하는 일이었다. 뮈텔 주교는 주임 신부가 상주하는 본당을 방문한 경우에는 그 성당과 사제관의 약도를 그려 두었으며,37) 각 신자 마을이나 공소가 위치해 있는 장소도 지형과 함께 약도의 형식으로 그려 두었다.38) 또한 박해 때에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 혹은 기억할 만한 사건이 있었던 장소를 지날 때면 직접 찾아가 보거나 그에 대한 간단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39) 실례로, 1892년의 경기도 지역 사목 방문 중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1821~1846)의 묘소를 방문하여 조사하였다.40) 이날의 일기에는 정조(正祖)의 능을 그린 간단한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도 적어 두었다.41) 1893년의 사목 방문 중에는 대원군이 세워 놓은 척화비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적어 두었고,42) 1896년에는 조조(Moyse Jozeau, 趙得夏, 1866~1894) 신부가 동학농민운동 때 청나라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장소를 자세히 둘러보았다.43)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기억될 만한 인물들을 만나 보는 것도 중요한 활동이었다. 1893년에 경상남도 언양을 방문했을 때 병인박해 당시에 순교한 남종삼의 딸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것44)과, 간도 지역을 방문하던 중에 그곳의 첫 번째 신자인 김영렬을 만나 본 일은 대표적인 사례이다.45) 때때로 병인박해를 체험한 신자들을 만나는 것은 뮈텔 주교에게 큰 감동을 주기도 하였다.46) 뮈텔 주교는 사목 방문 중에 본당과 공소의 상태를 파악하고, 동시에 한국 순교자들과 천주교회의 역사에 관련된 자료 수집도 병행하였다. 이는 신부가 될 때에 뮈텔 주교에게 부여된 임무인 순교자들의 시복과, 자신이 주교가 되면서 밝힌 ‘순교자들의 꽃을 피어나게 하라’는 표어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4. 맺음말

 

본 연구는 성직자로서의 뮈텔 주교가 기본적으로 행한 사목활동을 보기 위해 그가 주교로서 남긴 사목 교서와 그가 가장 역점을 두고 행한 사목 방문에 초점을 두었다. 뮈텔 주교가 남긴 사목 교서들을 통해볼 때 그가 추구하던 최종 목표는 한국 안에 천주교를 확산시켜 한국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이의 실현을 위해 그는 천주교회가 각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사목 교서의 내용으로 본다면 적어도 1908년 이후에는 천주교회가 지역 사회 안에 정착되었다는 판단 아래 세계 천주교회와의 일치에 역점을 두었다. 이것은 더 이상 한국 천주교회를 조선후기 박해시대와 같은 특수한 형태의 교회로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뮈텔 주교는 이런 인식 속에서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성사 생활을 중심으로 천주교회를 이끌어 가며 교육을 통해 신앙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 하였다. 이외에도 뮈텔 주교가 중점을 둔 것은 신앙의 유산을 이어나가는 것,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를 한국인 신자들이 이끌어 가는 교회로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뮈텔 주교가 역점을 두고 행한 사목 방문은 그의 교서에서 드러나는 최종 목표가 실현되는 또 하나의 장이었다. 사목 방문에서 뮈텔 주교가 강조한 것은 첫째가 성사생활이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와 견진성사를 주고 미사를 집전하는 일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 사목 방문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신자들의 성사 생활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였는데 이것은 병자성사에 대한 그의 태도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47) 뮈텔 주교는 누군가 병자성사를 청해 오면 어떤 경우에도 거절하지 않았고 다른 신부들도 그렇게 하도록 배려하였다. 뮈텔 주교에게 성사 생활은 곧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성사를 집전하는 일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다.

 

둘째, 뮈텔 주교는 신자들에 대한 교육과 신앙 상태 확인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각 지역을 방문하여 신자들을 직접 만나서 그들의 신앙 상태를 확인하였다. 교리문답은 이를 대표하는데 신자들에 대한 교육인 동시에 신앙 상태를 확인하는 척도였다. 셋째, 지역 사회 안에 아직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한 천주교회가 정착하는 것을 돕는 일도 사목 방문 중의 중요한 일이었다. 넷째, 박해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앙의 유산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 역시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 뮈텔 주교는 사목 방문 중에 물적 자산을 비롯하여 순교자들과 관련된 것들, 그리고 천주교회사에 기억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 두었다.

 

뮈텔 주교는 주교로서 자신이 교서를 통해 밝힌 내용들을 스스로 실천하고, 자기 관할의 신자들도 거기에 동참하도록 직접 방문하여 독려하며 신앙생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던 성직자였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이래 중점을 두어 활동했던 성사 생활의 강조와 사목 방문에 열중하였다. 한국 교회가 박해시대와 그 영향을 벗어나 새로운 틀을 잡아가던 시기에 43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최고 지도자로 활동한 뮈텔 주교가 선배들의 전통들을 그대로 계승하여 정착시킴으로써 한국 교회의 큰 틀이 정착되었다. 한국 교회의 고유한 풍습으로 자리 잡은 판공성사 제도와, 현대의 교구장들이 각 본당을 방문하며 활발하게 행하는 견진성사의 집전은 뮈텔 주교의 시대를 거치면서 정착된 것이었다.

 

뮈텔 주교의 사목 교서와 사목 방문을 통해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의 활동은 현대의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틀의 원형과 같은 것이었다. 뮈텔 주교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가지는 장점과 한계를 알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보다 진전된 연구가 이루어져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초석으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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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뮈텔 주교에 관련된 연구사는 김정환, <귀스타브 뮈텔의 사목활동>, 충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4, 1~3쪽에 정리되어 있다. 2004년 이후의 연구로는 조광, <고종 황제와 뮈텔 주교 :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 《경향잡지》 163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 조광, <고종 황제와 뮈텔 주교 : 조약문서의 원본을 지켜라>, 《경향잡지》 1633, 2004 ; 조광, <뮈텔 주교와 민비 시해사건 : 그의 전망은 정확했다>, 《경향잡지》 1634, 2004 ;최종고, <구한말의 주한프랑스인 사회 - 《뮈텔 주교 일기》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27,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등이 있다.

 

2) 사목활동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역, 《가톨릭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의 857 · 886 · 896 · 927 · 1526 · 1560항과 정진석, <사목>, 《한국가톨릭대사전》 6,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3913~3914쪽을 참조하였다.

 

3) 송열섭, <사목 교서>, 《한국가톨릭대사전》 6, 1998, 3915쪽.

 

4) 한국 교회 교구장들의 사목 교서에 대한 연구는 빈약한 편이다. 대표적인 연구로 신치구, 《한국 천주교 교구장 연두 사목교서의 역할》, 가톨릭신앙생활연구소, 1995 ; 장동하, <현대 한국 천주교회와 주교단의 공동가르침>, 《교회사연구》 6,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 김정환, <대전교구장들의 교서 해제>, 《교우들에게 - 대전 교구장들의 교서》, 천주교 대전교구, 2007을 들 수 있다.

 

5)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대전교구에서는 1970년대 초에 비로소 현대화된 공식 문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교우들에게 - 대전교구장들의 교서》, 434~435쪽).

 

6) 사목 교서의 출처는 <뮈텔 전기>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 《경향잡지》이다.

7) 르 장드르 지음, 이영춘 역주, 《회장직분》, 가톨릭출판사, 1999, 77~78쪽.

 

8) 윤민구 역주, <신미년에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260쪽.

 

9) 《뮈텔 주교 일기》 1919년 1월 23 · 29일(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45 · 247쪽). 이하에서는 책의 제목과 일기의 날짜만을 기록한다.

 

10) 옛 교리서인 《천주교 요리문답》 129조목은 국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국민이 국가에 할 본분은 무엇이뇨?” “국민이 국가에 할 본분은 존경하며 정당한 국법을 지키며 세납을 바침이니라”(내포교회사연구소, 《천주교 요리문답》, 2010, 49~50쪽).

 

11) 영남교회사연구소, 《대구의 사도 김보록(로베르) 신부 서한집》 1, 1995, 104~109쪽.

12) 방상근, <성가회>, 《한국가톨릭대사전》 7, 4515쪽.

13) 뮈텔, <민 주교의 사목서한>, 374쪽.

14) 《경향잡지》 759, 1933, 260~261쪽.

15) 뮈텔, <민 주교의 사목서한>, 378쪽.

16) <한국 교회 지도서>, 《교회와 역사》 42, 1쪽.

17) 《뮈텔 주교 일기》 1914년 5월 1일.

 

18) 감목 대리구는 교구의 사목활동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교구 내의 여러 본당을 하나의 연합으로 결합시킨 지구(地區)를 말한다(최석우, <감목 대리구>, 《한국가톨릭대사전》 1, 253쪽). 여기서는 서울 대목구의 감목인 뮈텔이 교구의 일부를 한 성직자에게 맡겨 대신 관할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교황청의 허락을 얻어야 하는 교구의 분할과는 달리 감목 대리구의 설정은 교구장의 권한에 따라 취해질 수 있는 조치였다.

 

19) 유언장의 형식과 집행 과정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르 비엘 신부 유언장>,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문》, 천주교 인천교구, 1988, 39쪽 ; <파스키에 신부가 뮈텔에게 보낸 편지>(1894년 8월 6일.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4, 88쪽) ; 《뮈텔 주교 일기》 1910년 2월 2일, 4월 1일, 12월 26일과 1914년 3월 23일을 참조하였다.

 

20) 정진석, <사목 순시>, 《한국가톨릭대사전》 6, 3920쪽.

21) 《경향잡지》 622, 1927, 409~410쪽.

 

22) 1914년 현재 뮈텔 주교가 관할하던 서울 대목구의 성직자 수는 한국인이 13명, 선교사가 33명이었는데 그중 13명이 징집되었다(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86쪽).

 

23) 《뮈텔 주교 일기》 1895년 10월 19일.

24) 《뮈텔 주교 일기》 1910년 11월 15일.

25) 차기진, <간도 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1, 215~218쪽.

 

26) 브레의 간도 지역 방문은 브레, 임충신 역, 《원산에서 북간도까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70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책은 브레 신부가 Missions Catholiques에 기고한 글을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27) 최석우, <대구대목구 경계선의 확정>, 《몬시뇰 김석재 총장 고희기념논총》, 효성여자대학교 총동창회, 1985. 필자는 《한국교회사의 탐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273~300쪽에 재수록된 글을 이용하였다.

 

28) 뮈텔 주교만이 공소까지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뮈텔 주교에게 사목권을 위임받은 부교구장 드브레 주교 역시 공소들을 방문하였다(《뮈텔 주교 일기》 1923년 11월 29일).

 

29) 김진소, 《전주교구사》 1, 천주교 전주교구, 1998, 750~752쪽.

30) 알랭 코르뱅, 전수연 역, 《사생활의 역사》 4, 새물결, 2002, 693~704쪽.

31) <비안네>, 《한국가톨릭대사전》 6, 3765~3766쪽.

 

32) 뮈텔 주교는 서울에서도 정부 관리들과 잦은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사목 방문 중에 이루어지는 지방 관리들과의 교류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교류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33) 《뮈텔 주교 일기》 1893년 11월 15일.

34) <로베르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1894년 2월 7일, 영남교회사연구소, 《대구의 사도 김보록(로베르) 신부 서한집》 1, 176쪽).

35) 박제원, <전라도 전교 약기>, 《전동 본당 100년사 자료집》 1, 천주교 전동교회, 1992, 205쪽.

36) 《뮈텔 주교 일기》 1901년 11월 26일 ; 1902년 11월 16일 ; 1905년 12월 2 · 4일 ; 1912년 10월 25 · 29일, 11월 2일.

 

37) 《뮈텔 주교 일기》 1893년 11월 10일 ; 1896년 10월 26 · 28일, 11월 1일, 12월 3 · 25일 ; 1897년 4월 9일, 10월 21일, 11월 17일 ; 1899년 12월 4 · 16일 ; 1900년 1월 4일, 12월 16일 ; 1901년 11월 28 · 30일 ; 1905년 12월 9일.

 

38) 《뮈텔 주교 일기》 1893년 10월 31일, 11월 2 · 3 · 4 · 6 · 7 · 8 · 9 · 15 · 16 · 18 · 21 · 24 · 27 · 30일, 12월 1 · 3 · 4 · 7 · 8 · 11 · 17 · 18일 ; 1901년 1월 17일.

 

39) 《뮈텔 주교 일기》 1897년 11월 25일 ; 1899년 12월 8 · 15일 ; 1900년 1월 2일, 11월 19일 ; 1907년 10월 26일.

 

40) 《뮈텔 주교 일기》 1892년 10월 23일. 김대건의 묘소는 1902년의 사목 방문 중에 다시 한 번 방문하였다(《뮈텔 주교 일기》 1902년 11월 16일).

 

41) 이날의 일기에는 “맨 처음이 정종(正宗)의 능, 그 다음이 정종의 아버지인 사도(思悼)의 능이다”라고 적혀 있다.

42) 《뮈텔 주교 일기》 1893년 11월 24일.

43) 《뮈텔 주교 일기》 1896년 10월 28일.

44) 《뮈텔 주교 일기》 1893년 10월 31일.

45) 《뮈텔 주교 일기》 1912년 10월 18일.

46)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1900년 보고서>, 《서울 교구 연보》 I, 천주교 명동교회, 1984, 261~262쪽.

 

47) 병자성사에 관한 것은 《뮈텔 주교 일기》 1902년 5월 1 · 12일, 9월 25 · 26 · 28일 ; 1903년 10월 18 · 19일 ; 1907년 12월 11일 ; 1910년 8월 3 · 4일 ; 1911년 2월 18일, 3월 12일, 5월 25일 ; 1912년 2월 9일 ; 1914년 3월 28일 ; 1916년 4월 1일 ; 1918년 11월 9일 ; 1919년 1월 18일 ; 1920년 8월 16일을 참조하였다.

 

[교회사 연구 제35집, 2010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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