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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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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4-5: 제1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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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3-13 ㅣ No.422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4) 제1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381년) (상)


다시 분열된 교회, 일치를 위해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개최된 성 이레네 성당. 장방형 십자가 형태의 이레네 성당은 4세기 초까지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가 성당으로 개조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논쟁은 일단락되는 듯 싶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어찌된 일인지 자신이 내쫓았던 아리우스파 주교들을 3년 만인 328년에 다시 측근으로 불러들입니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니코메디우스 주교 에우세비우스입니다.

 

아리우스와 친구였던 에우세비우스 주교는 성자종속설 경향에 기울어져 있던 동방 주교들의 세를 규합해 정통파인 니케아 신경의 옹호자들에게 맞섭니다. 335년 티루스 시노드, 340년 로마 시노드, 341년 안티오키아 시노드와 로마 시노드 등 교회회의들이 잇달아 열리고 친아리우스파와 정통파가 서로 물고 물리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여기에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망은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지요. 제국의 동방은 니케아 공의회 선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주교들을 지지하는 콘스탄티우스가, 정통파 주교들이 주로 있는 서방은 콘스탄스가 각각 다스리게 됩니다. 교리상의 분열이 정치적 분열과 겹쳐져 대립이 심화됩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로마 주교인 교황 율리오 1세는 동방과 서방 주교들이 함께 참석하는 공의회를 사르디카(오늘날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합니다. 342년 혹은 343년에 소집된 사르디카 공의회에는 대략 서방에서 90명의 주교가 동방에서는 80명의 주교가 참석합니다. 하지만 공의회는 참석 주교들의 자격 문제로 삐그덕거리더니 동방 주교들이 불참을 선언하고 맙니다.

 

반쪽이 된 사르디카 공의회에서 서방 주교들은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면서 동방 주교들이 이전에 단죄한 아타나시오 주교를 복권시킵니다. 아타나시오는 니케아 공의회 때 정통파를 이끈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 주교 밑에서 부제로 있으면서 정통파가 승리하는 데 기여한 인물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대주교가 된 후 아리우스파 등 반대파들에 밀려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정통신앙을 끝까지 수호한 성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토대인 '아타나시오 신경' 저자이기도 합니다.

 

한편 동방에서는 성자가 성부에 비해 열등하다는 급진적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니케아 공의회의 선언에 따라 배격하지만 동시에 성자와 성부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니케아 공의회 표현도 반대하는 다른 표현 양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자는 성부와 같은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으로서 본질이 같지 않고 유사하다는 '유사본질'설이 그것입니다. 이 주장을 반(半)아리우스주의(Semi-Arianism)라고 부릅니다. 아리우스 주장을 절반쯤 따른다는 뜻이지요. 이제 성자의 신성을 둘러싼 논쟁은 동일본질(니케아 정통파), 유사본질(반아리우스파), 성자종속(아리우스파)로 삼분됩니다.

 

 

리미니 - 셀레우키아 공의회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세를 규합한 유사본질파 주교들은 제국의 황제 플라비우스 율리우스에게 압력을 가해 다시 한 번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359년 두 곳에서 회의가 열립니다. 서방에서는 이탈리아 리미니, 동방에서는 오늘날 이라크 땅인 셀레우키아에서지요. 리미니에 모인 서방 주교들은 400명이 넘었고, 셀레우키아에 모인 동방 주교들 또한 약 150명이나 됐습니다. 참석자 수로만 본다면 가장 규모가 큰 공의회였습니다.

 

유사본질파 주교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공의회에서 관철될 수 있으리라고 희망을 품지만 황제는 오히려 또 다른 안을 제안합니다. '성자는 성경에 따라 성부와 유사하다'는 정식(定式)을 주교들에게 합의의 초안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전거로 내세우며 두루뭉실한 표현으로 합의에 이르도록 한 것입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단지 제안만 한 것이 아니라 이 안을 따르도록 강요합니다. 교리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교리 일치를 통한 주교들의 화해가 또한 제국 질서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황제는 압력을 행사해 리미니와 셀레우키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 550명 전원의 서명을 받아내고는 360년 1월 1일에 제국에서 마침내 교회 평화가 회복됐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부와 성자의 신성을 둘러싼 논란은 이제 네 파로 나뉘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케아파(정통파), 유사본질파(반아리우스파), 유사파(리미니-셀레우키아 공의회 지지파), 그리고 엄격한 아리우스파로.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성령피조설파

 

한편 3세기 중엽 소아시아 오늘날 터키 고원지대인 카파도키아에는 유명한 교부(敎父, 고대와 중세의 저명한 교회 학자를 '교부'라고 부름) 삼총사가 있었습니다. 카이사리아의 주교 바실리오(329/331~379), 나지안즈의 주교 그레고리오(329/339~389/390) 그리고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오(335/340~394/395)였습니다. 이들에게서 성부와 성자의 신성을 둘러싼 논란을 해소할 수 있는 핵심 개념들이 다듬어져 나왔는데, 본성(본질 또는 본체)과 위격의 구별이 그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신적 본성 또는 본질이 같지만 위격으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지요.

 

이와 함께 삼위일체의 성령에 관한 문제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성령을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설(異說)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른바 성령피조설파(Pneumatomachi)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한 신경에 "또한 성령을 믿나이다"라고만 돼 있어서 성령과 성부 및 성자와의 관계가 확실치 않은데다 아리우스파가 성령 또한 성자와 마찬가지로 피조물로 이해한 것 등이 성령피조설파가 생겨난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피조설파는 마케도니우스파(Macedoniani)라고도 부릅니다. 이 설을 내세우는 이들이 360년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였던 마케도니우스의 추종자들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마케도니우스가 정말로 성령피조설을 내세웠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379년 테오도시우스가 로마제국 황제가 됩니다. 훗날인 392년에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적 종교로 선포하게 되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교리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교회가 분열에서 벗어나 일치를 이루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집된 공의회가 381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최된 두 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3월 6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5) 제1차 콘스탄티노플리스 공의회(381년) (하)


니케아 신경 재확인, 성령의 신성 명시

 

 

공의회 소집과 과정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마침내 381년 5월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성자는 성부와 같은 신성을 지닌다(동일본질)는 니케아 공의회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파, 반(半)아리우스파, 유사파 등 교리 논쟁으로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성자의 신성을 언명한 니케아 공의회 선언을 재확인하며 성령의 신성을 강조했다. 사진은 옛 콘스탄티노폴리스인 터키 이스탄불 전경. 평화신문 자료 사진.

 

 

공의회에는 주교 15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첫 보편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참석 주교보다 적었습니다. 더욱이 참석 주교들은 모두가 오늘날 터키와 시리아가 있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온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었습니다. 성령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마케도니우스파(성령피조설파) 주교들도 36명 참석했습니다. 서방 교회인 로마에서는 물론이고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이집트 지역에서도 처음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황 다마소 1세는 참석하지 않았고, 교황 사절도 파견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가지고만 본다면 세계공의회라기보다는 동방 공의회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안티오키아 주교 멜레티우스가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그러나 멜레티우스 주교는 얼마 후 사망했고, 의사봉은 카파도키아 3총사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인 나지안즈의 고레고리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도 공의회를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채 물러납니다. 멜레티우스 후임 주교를 둘러싸고 주교들 사이에서 문제가 불거지자 ‘교회 평화를 위해’라는 내용의 이임사를 남기고 의장직을 사임합니다. 사회봉은 다시 넥타리우스가 이어받았고 회의는 7월 9일 끝납니다. 공의회를 소집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7월 30일 공의회 결정사항을 발표합니다.

 

 

주요 결정사항

 

공의회는 그동안 논란이 됐던 이설들을 단죄합니다.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 유사파는 물론이고 성령의 신성을 부정한 성령피조설(마케도니우스주의)과 성자가 아니라 성부가 수난했다는 성부수난설(사벨리우스주의),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등을 모두 단죄합니다.

 

공의회는 또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교구와 총대주교좌의 범위를 개정하고 각 교구장 주교의 권한은 관할 교구 안에서만 통용됨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주교라 하더라도 초대받지 않고서는 관할 교구 밖에서 서품식을 집전할 수 없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교부들이 결정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의 권위를 로마 주교 다음으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국의 수도로서 ‘새 로마’ 역할을 하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방 주교들은 한동안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가장 큰 업적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신적 본질(또는 본성)을 지닌다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면서 성령에 관해서도 성령피조설을 단죄하고 성령의 신성을 명시한 것입니다. 여러 면에서 동방 공의회 혹은 반쪽 공의회라고 불려야 마땅했던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세계공의회로 인정받은 것은 이렇게 삼위일체 신앙과 관련해 정통 교리를 확립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451년 네 번째 세계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 회의록에 전해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희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흔히 ‘니케아 신경’ 혹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주일이나 대축일 때에 바치는 ‘신앙 고백문’에 나오는 내용과 흡사하지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 군데(굵은 고딕 글씨)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고 신앙고백을 하지만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확정한 신경에는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라고 돼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고’가 어떻게 해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고 성자에 관한 부분이 추가됐을까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 신경을 확정했지만, 이 신경을 쉽게 풀어서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 하나가 ‘아타나시오 신경’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구원되고자 하는 이는 먼저 보편된 신앙을 확고히 지녀야 한다”라는 대목으로 시작하는 아타나시오 신경은 첫 번째 세계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제 신분으로 아리우스파 이단을 물리치는 데 뒤에서 크게 기여한 인물로 나중에 알렉산드리아 대주교가 되고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아타나시우스(295?-373) 성인의 이름을 딴 신경입니다.

 

5세기에 작성되기 시작해 6세기에 와서 완성된 아타나시오 신경은 모두 40개 문장으로 돼 있는데 23번째 문장이 “성령께서는~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는 대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서방 교회에서 아타나시오 신경이 보급되면서 589년 스페인 톨레도에서 열린 제2차 톨레도 지역 공의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성령에 관한 대목에 아타나시오 신경에 나오는 “(성부)와 성자에게서”라는 한 단어(라틴어로 필리오케, filioque)를 첨가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니케아 신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와 성자에게서’(필리오케)라는 한 단어가 새로운 문제를 낳는 불씨가 됩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단어는 신학적 논쟁을 야기하고 마침내는 교회가 동 · 서로 나눠지는 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를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평화신문, 2011년 3월 13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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