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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왜관 수도원의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 시련과 극복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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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09 ㅣ No.682

[특집 2009년도 심포지엄]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


왜관 수도원의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 - 시련과 극복의 역사

 

 

1. 들어가는 말 

2. 연길과 덕원 수도원의 폐쇄와 시련
3. 왜관 수도원의 설립과 ‘수도원 제도’의 발전
4. 왜관 감목 대리구의 설정과 활동
5. 특수 사목
6.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사학자 故 최석우 몬시뇰은 말했다. “芬道會만큼 한국 땅에 정착하기까지 여러 번 시련을 겪어야 했던 수도회도 드물 것이다. 무엇보다도 芬道會는 한국에서 두 번이나 다시 출발해야 하였다.”1) ‘두 번이나 다시 출발’해야 했다는 표현은 덕원 수도원과 왜관 수도원의 새 출발을 의미한다. 사실 수도원을 옮기거나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946년 4월 11일, 교황 비오 12세는 중국에 교계 제도를 설정하였다. 연길교구가 교계 설정 이전까지는 한국 교회에 속해 있었음을 감안하면, 성 베네딕도회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네 개의 아빠스좌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아빠스좌 수도원들의 존립 시기가 자연스럽게 시대를 구분해준다. 백동수도원(1909~1927), 덕원수도원(1927~1949), 연길수도원(1922~1946), 왜관수도원(1952~현재)이다. 한국 베네딕도회 100년의 역사 중에 왜관 수도원의 존립 기간이 57년으로 제일 길지만 왜관 수도원은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자립 수도원’을 설립하지 못했다.

왜관 수도원의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에 대한 연구는 이전 시기에 비해 아직 그리 본격적이지 못하다.2) 왜관 수도원의 57년의 역사를 한편의 논문으로 정리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한계가 많다.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의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의 기획 의도를 읽어낸 사람은 곧 이 한계를 조망이란 뜻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심포지엄의 맨 앞 두 발표자는 각각 덕원 수도원이 폐쇄된 1949년을 기준으로 전후의 역사를 조망하는 논문을 적기로 하였다. 즉, 심포지엄 참석자들에게 역사적 얼개를 잡아 제시한다는 뜻이다.

한국 베네딕도회 100년의 역사에서 최고 장상들은 영적인 아버지이자 공동체의 관리자였다. 그들에게 부여된 책임은 무한한 것이었다. 왜관 수도원에는 6명의 최고 장상3)이 났다. 베네딕도회의 최고 장상은 고유한 직위와 권한을 가진다. 현재에도 왜관 수도원의 아빠스의 임기는 무기한이다.4) 베네딕도회 역사 서술에서 최고 장상의 역할과 활동은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본 논문은 장상을 중심으로 기술되지 않았다. 대신 ‘수도원 제도’의 발전, 왜관 감목 대리구, 특수 사목이라는 3가지 대주제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 중에서 특수 사목 분야는 의도적으로 소략히 다루었다. 아무래도 선대의 장상 시기에 대한 서술이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2004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예레미아스 슈뢰더5) 총아빠스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소속 수도자였던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요한네스 마르(Johannes Mahr) 교수에게 오틸리아 연합회 한국 선교 역사서 집필을 의뢰하였다. 그는 수년간 사료 정리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의 미간행 원고 Aufgehobene Hauser(스러진 집들 : 가제)는 본 논문의 결정적 사료가 되었다. 왜관 수도원은 이미 2005년에 이 책의 한국어판으로 100년사를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A4지로 약 2,000면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다. 필자는 분도출판사 편집부와 함께 한국어판 편집 작업 중이다. 현재 상트 오틸리엔의 EOS출판사에서도 편집 작업 중이며 2009년 9월에 독일과 한국에서 동시에 출간될 예정이다. 그 밖에 왜관 수도원 연대기와 본당 연대기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오틸리아 연합회 한국 진출 6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Hwan-Gab(환갑)6)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프루멘시우 렌너 신부의 역작 Der funfarmige Leuchte(오지촛대)7) 2권과 4권은 매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었다. 왜관 수도원 문서고에 보관된 사료는 극히 일부 제한적으로만 사용하였다.

한 수도원의 회원으로서 소속 수도원의 역사를 적는 일은 매우 조심스런 일이다. 비록 학문의 영역이라고 할지라도, 이해 당사자들이 공동체 안에 생존하고 있을 때 더욱 그렇다. 본 논문도 그런 경우이다. 이점을 공히 밝히며 이해를 구한다. 본 논문에서 수많은 국내외 은인과 단체를 상세히 다루지 못했다. ‘영적으로 물적으로’ 도움을 준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고, 가족을 잃은 상처 속에서도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지속적으로 보내주었다. 왜관 수도원은 이 후원금과 구호품을 항상 ‘후원자의 지향’(intentio dantis)대로만 사용하였다. 이 졸고를 수많은 은인과 후원단체, 그리고 이미 귀천하신 독일과 한국의 선배들께 감히 바치고 싶다.


2. 연길과 덕원 수도원의 폐쇄와 시련

연길 수도원과 덕원 수도원의 폐쇄는 오틸리아 연합회의 선교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시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유럽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또 다른 것이었다. 한국인 수도자에게도 생명을 담보한 시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연길 수도원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그해 8월 18일 소련군이 연길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도시에서 약탈과 만행을 일삼았다. 연길 수도원과 연길 수녀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6년 4월 소련군은 통치권을 중국 공산당에게 넘겨준 채 철수하였다. 중국인 병사들이 1946년 5월 20일 연길 수도원과 수녀원의 남녀 수도자들을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본당에서 활동하던 신부들과 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남평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48년 5월 14일 연길 수도원으로 돌아왔으나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압력은 점차적으로 강화되어 갔다. 목자들이 양 떼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독일인 수도자들이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였다. 1949년 3월 그들은 또다시 수도원을 비워야 했다. 팔도구 본당이 그들의 마지막 거처가 되었다. 1949년 12월 테오도로 브레허(Theodorus Brecher, 1889~1950) 주교 아빠스를 포함한 1차 귀국 그룹이 유럽을 향해 만주를 떠났다. 1952년 8월 마지막 그룹이 만주를 떠났다. 한국인 최영호(崔永浩, 1908~1998) 비안네 신부와 김봉식(金鳳植, 1913~1950) 마오로 신부와 김 요셉 수사는 한국으로 피신하였다. 이들 중 김 마오로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원산에서 체포되어 와우동 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10월 9일 형무소 뒷산 방공호에서 피살되었다. 최 비안네 신부와 김 요셉 수사는 월남하여 왜관 수도원에 합류하였다.8)

“오늘 우리는 난국을 예감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에 매달린 천정의 칼을 아시지요. 이제 그 머리카락이 끊어지려 합니다. 만사가 하느님 손에 있습니다.”9) 덕원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다. 루치오 로트 원장 신부가 썼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덕원 수도원의 몰락은 예정된 것이었다. 1949년 5월 8일 밤에 시작되었다. 수도원은 끝기도 후 대침묵 시간이었다. 정치보위부가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1877~1950) 아빠스 주교와 루치오 로트(Lucius Roth, 1890~1950) 원장 신부와 아르눌포 슐라이허(Arnulfus Schleicher, 1906~1952) 부원장 신부와 루페르토 클링자이즈(Rupertus Klingseis, 1890~1950) 신부를 체포해 갔다. 그들은 나머지 수도자들을 식당에 모아 놓고 다음의 지시를 내렸다. 첫째, 수도원 울타리를 벗어나지 말 것, 둘째, 수도원 현관 옆 손님방은 경비실로 사용한다. 셋째, 수도원 농장은 한국인 농부에게 일임한다. 넷째, 전화 통화를 정지한다. 수도원은 겉으로는 모든 것이 평온했다. 5월 11일 23시경 종소리가 온 수도원을 울렸다. 정치보위부는 모든 수도자를 정문으로 불러 모았다. 독일인 신부 8명, 한국인 신부 4명(수도 사제 3명과 교구 사제 1명), 독일인 수사 22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독일인 수도자들과 한국인 수도자들은 ‘긴 이별’을 하였다. 원산 수녀원의 독일인 수녀 20명도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튿날 기차로 평양으로 압송되어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다. 덕원 수도원에는 한국인 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 총 99명이 남아 있었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한국인 수사들의 책임자로, 연장자인 차부제 김영근(金永根, 1918~2002) 베다 수사를 지명하였다.10) 이들은 신학교에 갇혀 있다가 5월 14일 쫓겨났다. 수도복과 기도서를 빼앗긴 채 서류에 이름, 주소, 가족 및 친지 관계, 세례 연도, 입회 동기, 행선 목적지, 장래 계획 등을 기입했다. 김 베다 수사와 임근삼(林根三, 1919~1986) 콘라도 수사와 한천수(韓千洙, 1922~1951) 이시도로 수사는 평양 인민 교화소 근처에 머물며 수감된 독일인 수도자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필요한 의약품을 넣어 주었다. 덕원 수도원의 한국인 수사들과 신학생들의 일부는 목숨을 걸고 38도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하였다. 1950년 4월 17일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 최창성 바오로 · 이 보니파시오 · 송 라파엘 수사가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의 초청으로 스위스 프리브룩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0년 10월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으로 잠시 덕원 수도원을 되찾아 복구 중이던 수사들은 1950년 12월 9일 원산에서 유엔군의 피난민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에 있던 형제들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부산 중앙 본당 주임 장병용(張丙龍, 1917~ ) 사도 요한 신부의 도움으로 피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차부제 김영근(金永根, 1918~2002) 베다 수사를 중심으로 16명의 수도자들은 부둣가에서 짐을 나르고,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주일도 없이 하루 12시간씩 미군 막사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7달러 50센트를 월급으로 받았다. 그 대신 미군부대 취사장에서 나온 잔반을 얻어 올 수 있어서 수도자들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다행히 부산에 있던 성 베네딕도회 성 안셀모 수도원 출신 미 군종 제랄드 맥카시(Gerald McCarthy) 신부가 이 소식을 듣고 대구 대목구 최덕홍(崔德弘, 1902~1954) 요한 주교와 상의하여 한국인 수사들을 대구 주교관 내 부속건물 한 채를 빌려서 이주시키고 생활비를 지원해주었다. 이때가 1951년 7월이었다.11)


3. 왜관 수도원의 설립과 ‘수도원 제도’의 발전

1) 왜관 정착 과정과 연합회의 모호한 입장

1951년 9월 14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크리소스토모 슈미트12) 총아빠스는 티모테오 비털리 신부를 한국의 모든 베네딕도회 수사들의 장상(Superior Major)으로 임명했다. 그는 당시 미국 뉴저지 주 뉴턴 수도원 소속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독일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1951년 성탄 전에 배편으로 미국을 떠나 1952년 1월 8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스위스 프리브룩에서 신학 공부를 끝내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사제 서품을 막 받고 귀국길에 오른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신부와 이 보니파시오와 송 라파엘 수사를, 당시 올라보 그라프(Olavus Graf, 1900~1976) 신부가 머물던 고베에서 만났다. 그들은 미군 수송기편으로 1952년 1월 25일 포항 군사 공항에 도착하였다. 즉시 기차로 대구로 가서 대구 대목구 주교관 부속 건물에 기거하던 15명13)의 한국인 수도자들을 만났다. “이곳 사정이나 형제들은 […] 대부분 좋은 인상을 준다. […] 우리가 오랫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게 부끄럽지만, 먼 거리와 불안한 정세가 변명이 될까?”14) 하고 당시 상황을 소회했다. 마지막 문장은 교황 사절 프루스텐베르크15) 몬시뇰이 ‘스캔들’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오틸리아 연합회의 모호한 입장과 적극적이지 못했던 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티모테오 신부는 한국인 수사들이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도 공동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놀랐다. 그는 신속히 수도 생활에 합당한 거처를 마련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덕원으로 귀환할 것을 염두에 둔 ‘임시 수도원’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자립 수도원’ 설립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1952년 3월 10일자 편지에서 이미 “내년에는 성직 지망 수련자뿐 아니라 평수사 지망 수련자를 위한 수련소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선교사 한두 명이라도 곧 와야 한다고 말했다.16) 새로운 자립 수도원 건립은 한국의 교구들뿐 아니라 오틸리아 연합회 내부에서도 반대 기류가 흘렀다. 덕원 수도원은 한국에서나 연합회에서나 어떤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티모테오 신부는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와 갈등이 생겼다. 총아빠스는 덕원과 병존하는 다른 자립 수도원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자립 수도원 건립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불안한 한국 정세와 수십 명의 독일인 수도자들의 생사조차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당시 그의 반대는 분명한 입장 정립의 부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티모테오 신부는 해결 불능으로 보이는 난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갔다. 우선 대구 대목구 최 요한 주교와 상의하였다. 최 주교는 대구 신암동 본당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 제의를 철회해야 했다. 교구 사제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티모테오 신부가 마산의 한 본당을 요청하였으나 같은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최 주교는 다시 낙산 본당을 제의하였다. 노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낙산을 답사하였다. 그러나 수도원 부지로는 너무 협소하고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당시 낙산 본당 주임 유선이(柳善伊, 1899∼1958) 요셉 신부는 낙산은 수도원 부지로 너무 협소하다며 왜관 본당을 추천하였다. 노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왜관 본당을 둘러본 후 낙산과 왜관 본당 둘 다를 받자고 티모테오 신부에게 제안하였다. 한편 티모테오 신부는 당시 부산에 체류 중이던 서울 대목구 노기남(盧基南, 1902~1984) 주교를 만났다. 노 주교는 청주의 한 본당과 교외의 고아원과 과수원을 제의하였다. 이곳도 수도원 부지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다시 수원 근처의 한 본당을 요청하였으나 같은 결과였다.17)

이제 왜관 지역만 남게 되었다. 티모테오 신부는 이때부터 왜관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베네딕도 수도원은 도시보다 시골에 있는 것이 전통에 맞고 교통의 편리성을 내세웠다. 티모테오 신부는 왜관과 낙산에 우선 정착하겠다고 누차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에게 청원하였다. 1952년 5월 12일자 편지로 총아빠스는 왜관 본당과 낙산 본당에 우선 정착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한편 일본 고베의 올라보 그라프 신부는 대도시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편지를 지속적으로 유럽으로 보냈다. 티모테오 신부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직 대규모 건축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향후 수년간 티모테오 신부는 한눈에 보이는 소규모 업적들을 쌓아갔다. 원칙을 고수하며 꾸준히 전진하였다. 티모테오 신부가 한국에 도착한 지 4개월 반 만에 부지 선정이 끝났다. 그는 부지 선정을 신속히 처리했다. 한국인 형제들의 처지가 매우 곤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긴급한 선택이 장래의 한 아빠스좌 수도원을 그곳에 묶어두는 결과를 낳았다. 대구교구청 부속 건물에 살던 한국인 수도자들은 1952년 6월 말 왜관과 낙산으로 이사했다. 1949년 5월부터 1952년 6월까지 약 3년 동안 이어진 피난 생활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불안한 출발이지만 ‘왜관 시대’가 열렸다. 연길과 덕원에서 추방된 한국인 수도자들은 덕원과 연길 수도원이 남긴 가장 소중한 공동유산이다. 그들은 피난살이 중에도 나름으로 공동체 생활을 충실히 하였다. 이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면 오늘날의 왜관 수도원은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왜관 수도원 설립에 결정적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측면이다. 한국에서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아프리카와는 달리 진출 초기부터 한국인 수도자 양성에 애를 썼다.18)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는 1952년 부활 대축일 직전, 포교성성을 방문하여 코스탄티니(Costantini) 대주교를 만나 티모테오 신부를 ‘왜관 공동체’의 장상으로 임명하였음을 알렸다. 이 자리에서 코스탄티니 대주교는 덕원 자치 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와 함흥 대목구장 서리의 임명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는 티모테오 신부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주었다. 포교성성은 1952년 5월 9일 티모테오 신부를 덕원 자치 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와 함흥 대목구장 서리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이 주교’라고 불렀다. 1952년 7월 6일, 대구 대목구 최 요한 주교는 왜관 본당에서 간소한 “착좌식”을 개최하고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베네딕도회 피난 공동체를 신자들에게 소개하였다.19)

2) 원장좌 예속 수도원 승격과 ‘옛 선교사’의 재파견

옛 선교사(Alt-Missionare)는 연길이나 덕원 수도원에서 일했던 선교사들을 뜻한다. 이들의 재파견 결정은 왜관 정착 초기에 논란 속에 있었다. ‘다시 한국으로’ 파견한다는 것은 오틸리아 연합회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이 당한 고초와 전쟁의 기억이 한국을 심정적으로 밀어 냈던 것이다. 연합회 총재인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는 ‘연길과 덕원 수도원의 유산’이 점점 불안해졌다. 그는 아직도 왜관의 미래에 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연길과 덕원의 유산’은 일차적으로 한국인 수도자들을 뜻한다. 1952년 5월 12일 총아빠스는 ‘한국인 베네딕도회원의 독립 연합회’의 설립 가능성에 대해 티모테오 신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유럽인 장상과 수련장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위험이 닥칠 때마다 그들을 한국에서 빼내왔지만, 우리 연합회의 유럽이나 아프리카 수도원에서 그들을 활용할 수가 없습니다.”20) 이 질문에 대해 티모테오 신부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답변한다. “총아빠스님의 생각은 자의식과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한국인들이 듣기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결행에 대해서도 환영할지 의문입니다. ‘한국인 베네딕도 수도원의 형식’에 대해서는 덕원에서도 논의된 바 있습니다. 성숙한 한국인 사제 수가 많아지면 한국 실정에 맞는 ‘수도 규율’ 아래 자립 공동체를 설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비상사태가 일어날 경우 한국인 수도자들을 국외로 대피시키지 않기 위해 ‘한국식 자립 수도원’을 설립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면 우리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21) 티모테오 신부는 더 이상 논의하고 싶지 않았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도 더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제 연길 선교사 재파견을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1953년 9월 27일 안스가리오 뮐러(Ansgarius Muller, 毛安世, 1913~1987) 신부와 레지날도 에그너(Reginaldus Egner, 王默道, 1906~1975) 신부가 왜관으로 재파견되었다. 1953년12월 12일, 안스가리오 신부는 낙산 본당으로, 레지날도 신부는 성주 본당으로 갔다. 대구 대목구 최덕홍 주교는 1953년 12월 20일 티모테오 신부를 감목 대리로 임명하였다.22) 두 사제가 도착하면서 오틸리아 연합회에는 또 하나의 갈등이 생겼다. 연길 수도원과 덕원 수도원의 관계였다. 티모테오 신부와 거의 모든 수도자들은 아직 교회법적으로는 존속하는 덕원 수도원 소속이었다. 앞으로 새로 입회한 수도자들도 덕원 수도원 수도자로 서원할 것이다. 연길 수도원 출신은 한국인 사제인 최 비안네 신부와 김 요셉 수사뿐이었다. 그들은 점점 이방인이 되어 갔다. 이들 연길 수도원 출신 선교사 두 명이 연길 수도원이 존속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1953년 12월 27일 레지날도 신부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있는 연길 교구장 서리 라이문도 아커만(Raymundus Ackermann, 田, 1898~1983) 신부에게 연길 수도원을 지속시켜 줄 것을 촉구하였다. 당시 테오도로 브레허 주교 아빠스에 대한 교황 비오 12세의 유연하지 못한 조치와 하얼빈에서 생존을 위해서 발생한 부채가 그때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었다. 라이문도 신부는 자신은 연길 선교사였으나 한국어에 능통하지 못해 왜관으로 가길 원하지 않는다며 연길 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하였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연길과 덕원의 사제들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하나의 수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23) 이로써 1954년 4월 9일 교황청은 티모테오 비털리 신부를 연길 교구장 서리로 임명하였다. 이제 왜관 수도원은 덕원과 연길이라는 두 줄기 유산을 하나로 관리하는 주체가 되었다.

왜관에 정착하였으나 아직은 견고한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다. 왜관은 덕원에 비해 기차 소음도 심하고 부지가 덕원처럼 안정적이지 못했다. 어떤 수사들은 미군이 제안한 마산의 한 고아원으로 가자고 했다. 또 어떤 그룹은 김천을 미래의 ‘자립 수도원’ 부지로 정하자 했다. 또 어떤 이는 서울에 대규모의 초지역적 신학교와 함께 수도원을 건설하자고 했다. 티모테오 신부는 이 모든 제안들을 거부하였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설득의 묘미를 살려가며 왜관에 확고히 뿌리 내리기를 바랐다. 티모테오 신부는 작은 수도원이라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절반의 수도자가 낙산 본당 부속 한옥에 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를 지속적으로 설득하였다. 총아빠스는 옥사덕에서 수용소 생활을 겪은 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던 제르트루다 링크(Gertruda Link) 수녀와 논의하였다. 링크 수녀는 조만간 덕원으로 갈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지금 남한에서 대규모 사업을 시작할 수도 없다는 의견을 냈다. 1954년 5월 4일 마침내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는 “편안하게 계속하십시오. 작은 수도원을 지으십시오.”24) 왜관에 정착한 지 2년여 만에 비로소 조그만 집 하나를 짓게 되었다. 1954년 8월 긴 기다림 끝에 새 수도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1955년 5월 옥사덕에서 풀려난 지 15개월 만에 슈바이클베르그 수도원의 호노라도 밀레만(Honoratus Millemann, 1903~1988) 신부가 덕원 수도원 소속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왜관에 파견되어 수련장이 되었다. 그리고 1955년 7월 3일 주일날 축복식을 가졌다. 왜관 정착은 이제 어느 정도 토대를 마련한 셈이었다. 1955년 7월 10일 덕원에서 추방된 후 처음으로 라틴어로 노래하는 성 베네딕도 대축일 제1 저녁 기도가 왜관 수도원 경당에서 울려 퍼졌다. 호노라도 신부는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주보는 성 베네딕도의 제자인 성 마오로로 정했다. 이 새 수도원은 우리가 언젠가 돌아가기를 원하는 덕원 수도원의 첫 분원이다.”25) 아직도 왜관 정착에 호의적이지 못한 유럽과 아프리카를 의식하며 쓴 편지다. 호노라도 신부도 물론 ‘덕원 귀환’이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을 터이다. 아직도 티모테오 신부는 한국인 수도자들을 도와주러 온 책임자일 뿐이다. 그 이상의 임무를 받지 않았다. 아직도 미래의 수도원에 대한 확실한 계획이 수립되지 않았다.

1954년 11월 말 두 명의 연길 선교사가 부산에 도착했다. 연길 선교사들의 두 세대를 대표하는 코르비니아노 슈레플(Corbinianus Schrafl, 1901~1990) 신부와 미카엘 퓨터러(Michael Futterer, 1912~1998) 신부였다. 코르비니아노 신부는 부산 올리베따노 수녀원 지도 신부를, 미카엘 신부는 재정 담당을 맡았다.

왜관의 수도자들은 작은 수도원 건물이 완공되자 미래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하였다. 덕원 수도원의 원장이자 신학교 교수였던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도 어언 70세의 고령이 되었다. 그는 한국 방문을 주저했으며 분명한 지시를 내리는 것도 꺼렸다. 이제 티모테오 신부가 ‘한국 선교의 미래’를 의논하기 위해 상트 오틸리엔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1955년 9월 27일 상트 오틸리엔에 있는 연길과 덕원 출신 선교사들이다 모였다. 티모테오 신부는 대구 대목구 서정길(徐正吉, 1911~1987) 주교가 제안한 새 선교 지역(기존 지역 3개 본당에 김천 · 상주 · 함창 · 퇴강 · 점촌 본당 위임)에 대해 보고했다. 그 결과, 1955년 11월 독일 수도원들은 ‘한국 선교에 의욕적으로 참여하려는’ 모든 사람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사도좌 정기 방문(Ad limina)을 위해 로마에 간 기회를 이용하여 왜관 수도원을 ‘원장좌 예속 수도원’(Prioratus simplex)으로 승격시켜줄 것을 청원하였다. 1956년 1월 9일 교황청은 이 청원을 받아들여 왜관 수도원을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시켰다. 이제 왜관 수도원은 총아빠스의 감독하에 있으나 자체적으로 수련소를 설치할 권한이 있는 공동체가 되었다. 마침내 티모테오 신부는 공적으로 ‘원장’이라고 불리게 된 셈이다. 


1956년 7월 8일, 5명의 신부와 2명의 수사26)가 왜관 지역에서 활동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다. 그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한국으로 재파견된 선교사들은 전적으로 본당 사목에 매진하였다. 이와 반대로 일군의 한국인 신부들은 본당 사목에서 벗어나 전통적인 베네딕도회의 정신에 부합하는 수도 생활을 희망하였다. 티모테오 원장 신부는 직접 선교와 수도 생활에서 파생되는 갈등을 해소하고 공동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과제를 더욱 고민해야 했다. 티모테오 원장 신부는 뜨거운 환영 열기를 냉담하게 바라보며 착각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그는 저의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서울 대목구의 노기남 주교는 3일 일정으로 환영행사를 주관하였다. […] 그는 일정을 마무리하는 주교관 만찬 석상에서 메리놀회 · 골롬반회 · 파리 외방전교회처럼 베네딕도회도 서울에 수도원을 설립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 외에 다른 제안들도 있었다.”27) 티모테오 원장 신부는 활동 지역의 분산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왜관에서 공동 기도를 바치는 완전한 수도 생활이 더 지연되지 않기를 바랐다. 


1957년 5월 15일 상트 오틸리엔의 크리소스토모 슈미트 총아빠스가 사임하였다. 1957년 7월 12일 뮌헨 대학교 선교학 교수 수소 브레히터(Suso Brechter, 1910~1975) 신부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3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이후 한국 선교사들은 하나같이 그의 한국 방문을 요청하였다. 1956년 11월 한국으로 재파견된 에르네스토 지베르트(Ernestus Siebert, 1907~2000) 신부는 신임 수소 총아빠스와 뮌헨의 ‘오틸리엔 신학원’(Ottilien Kolleg)에서 함께 공부한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총아빠스의 한국 방문을 강력히 요구했다. 왜 모두들 총아빠스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렸을까? 그것은 ‘왜관 감목 대리구’가 ‘대목구’가 되거나 ‘자치 수도원구’로 설정될 것이라는 막연한 소문과 바람 때문이었다.28)

3) 아빠스좌 수도원 승격과 ‘새 세대 선교사’의 파견

‘새 세대 선교사’란 연길과 덕원에서 일한 적이 없는 선교사를 말한다. 1958년 9월 3일 한 달 일정으로 수소 브레히터 총아빠스가 방한하였다. 1925년노르베르트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총아빠스가 한국을 방문한 후 32년 만이었다. 단순 방문이 아니라 시찰이었다. 총아빠스의 정기 시찰(Visitatio)은 수도원의 미래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1958년 10월 7일 시찰이 끝났을 때 왜관 수도원은 덕원과 연길 수도원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일인과 한국인이 함께 사는 수도원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비판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은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시찰 결과는 이러하다.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공동 기도를 도입할 것, 낙산에 사는 형제들을 왜관으로 불러와 함께 생활할 것, 동쪽 측면 건물을 조속히 착공하여 수도원 건물을 조속히 완공할 것, 한국인 수도자들을 수도원 행정에 참여시킬 것. 총아빠스는 비관론자들에게 왜관 수도원을 ‘자치 수도원구’(Abbatia Nullius)로 승격시키는 일을 대구 주교와 교황청 포교성성과 협의해 추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을 두고 시행하기로 하였다. 총아빠스의 권고대로 왜관에 정착한지 6년이 지난 1959년 1월 1일부터 공동 기도를 바쳤다. 총아빠스를 수행한 사람은 알로이시오 조이펄링(Aloisius Seuferling, 閔公道) 신부였다. 그는 1937년 생으로 1957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파견은 왜관 수도원이 또 다른 새 시대를 연다는 의미였다.

수소 브레히터 총아빠스는 왜관 수도원의 형제들과 약속한 대로 귀국 후 왜관 수도원이 대구 대목구에서 독립하여 자치 수도원구로 승격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교황청 포교성성은 브레히터 총아빠스의 이 청원을 각하시켰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식민 지배를 받던 민족들이 독립을 요구할 때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역 교회를 평가절상하는 시기로 선교사들이 방인 주교들의 관할에서 벗어나겠다는 발상은 이미 낡은 발상으로 평가되었다.

교황청은 1962년 3월 25일 한국에 정식 ‘교계 제도’를 설립하였다. 또 교황청 수도자성성은 1964년 1월 13일 교서를 발표, 강제 해산되었으나 교회법적으로 존속하고 있는 덕원 수도원을 왜관으로 이관하였다(cuius iura in Prioratum de Waekwan translata sunt).29)

수소 브레히터 총아빠스는 교황청의 이 같은 조치에 즉각 대응하였다. 그는 교구 신부들과 권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왜관 수도원을 덕원 수도원과 관련짓지 말고 새로운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시켜줄 것(prioratus in Abbatiam sui iuris evehatur)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청은 1964년 2월 17일자로 왜관 수도원을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으로 승격시켰다. 왜관 수도원은 서울(1913년), 덕원(1927년), 연길(1934년)에 이어 네 번째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한국 베네딕도회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수소 총아빠스는 티모테오 원장에게 1964년 2월 26일자로 다음과 같이 공지하였다. “이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원장좌 예속 수도원인 왜관 수도원을 덕원 자치 수도원구로부터 교회법적으로 풀어서 독립 수도원으로 승격시키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앞으로 일할 수 있는 명확한 지위가 생겼습니다. 아빠스 선거는 4월 25일과 30일 사이에 있습니다.”30)

1964년 4월 28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아빠스 선거를 하였다. 설립 60주년 기념일 직전에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그들의 장상을 직접 선출한 것이다. ‘성대 서원’을 한 수도자들만 선거권이 있었다. 이때까지 단순 서원을 한 평수사는 선거권이 없었다. 수도원 구성원의 다수가 한국인이었지만 유럽인 20명과 한국인 9명만이 선거권이 있었다. 새 선교사 그룹의 33살의 오도 하스 신부가 왜관 수도원 초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31)

신임 오도 하스 아빠스는 뷔르츠부르크 신학생 시절부터 ‘선교 활동과 수도 생활의 조화’라는 문제를 궁구하였었다. 이제 아빠스로서 재임 초기부터 수도원의 영적인 발전에 분명한 지향점을 두었다. 그 지향점은 오틸리아 연합회의 회헌에 근거하였다. 즉, ‘선교사들은 베네딕도회원으로서만 자신의 임무에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직접 선교가 우선적인 활동이었지만, 앞으로는 베네딕도회적인 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베네딕도회 선교사(Benediktiner Missionare)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독일어 문법상 두 번째 단어가 종속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왜관 수도원 안에서조차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선교사라고 불렀다(아프리카 선교지에서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다). 반면 한국인들은 자신을 베네딕도회원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선출은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을 의미한다. 오도 하스 아빠스는 취임하자마자 구미본당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수도원 본원장으로 임명함으로써 덕원과의 연속성을 중시하였다. 독일인 수도자들도 이제는 서서히 한국인 장상에 익숙해져야 했다. 부원장에는 수년간 만주 용정에서 선교 활동을 한 코르비니아노 슈레플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를 임명한 부수 효과는 그가 새로운 전례 도입과 함께 연길 대목구에서의 경험을 왜관 수도원에 적응시켰다는 점이다. 또 수도원 재정 담당에 임근삼 콘라도 수사를 임명하였다. 평수사가 수도원의 중책을 맡은 것은 당시 관례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년 뒤 비로소 오틸리아 연합회 총회는 성직 수사와 평수사 간의 법적 평등을 결의하였다.32)

오도 하스 아빠스는 수도원 전례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상트 오틸리아 연합회의 다른 수도원들보다 훨씬 빨리 1966년 이후로 모든 사제들이 매일 공동 미사를 집전하였고, 한국말로 성무일도를 바쳤다.33) 또 1969년 대림 제1 주일에는 코르비니아노 슈레플 신부가 만든 《한국어 미사 경본》 개정판을 사제와 수사들에게 공식적으로 지급하였다. 오도 하스 아빠스는 수도원과 왜관 본당의 관계도 재정비하였다. 왜관에 새 성당을 건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대구대교구는 옛 성당과 그 부지를 수도원에 넘겨주고 새 성당을 지을 땅을 넘겨받았다.

그래서 그는 맨 먼저 ‘신학교 설립 문제’를 종결시켰다. 올라보 그라프 신부는 덕원의 전통에 따라 초교구적 신학교와 수도원을 도시에 세워야 한다고 수년간 줄기차게 주장하였고, 티모테오 신부는 이때마다 반대하였다. 이에 오도 하스 아빠스는, 한국 교회의 제3의 신학교 설립에 대해서 주교들도 아직 합의하지 못하고 짐작건대 왜관 수도원이 관리권을 가지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대신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주교와 상의하여, 수녀들 교육과 교리교사 양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가톨릭 신학원’ 건립을 결정하였다.34)

오도 하스 아빠스는 ‘한국인 수도원’ 설립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였다. 한국인 수도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명시적으로 장려하는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옛 수도원 생활의 더욱 단순한 형태로 돌아가고자 한다. […] 관상 생활은 교회의 첫만한 현존과 관련되므로 신생 교회들에서는 어디서든지 관상 생활이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선교교령〉18). 1966년 3월 21일 참사회에서 한국인 수도원을 2년 내에 건립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1966년 가을, 오틸리아 연합회 총회는 이 청원을 허락했다. 오도 하스 아빠스는 모든 한국인 수도자에게 부산 수도원을 지원할 기회를 주었다.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신부, 서상우 요한 신부, 이귀단 니콜라오 수사, 김영호 요아킴 수사, 양 시몬 수사와 왜관 출신인 수련자 2명, 청원자 1명이 1967년 4월 4일 부산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시도는 기대가 컸다. 곧바로 수도원과 피정집 공사를 시작했다. 1968년 수련원을 설치가 가능해졌고, 1969년 10월 31일 주한 교황 대사 히폴리토 로톨리(Hipolitus Rotoli, 1967~1973 재임) 대주교의 주례로 수도원과 피정의 집 축복식을 가졌다. 교황청 수도자성성은 같은 해 부산 수도원을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많은 혼란을 겪은 다음, 1971년 부산 수도원 계획이 중단되어 서원한 수도자 대부분이 왜관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현재 부산 분원은 ‘부산 성 베네딕도 명상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35)

4) 한국인 아빠스 선출과 수도원의 ‘한국화’

오도 아빠스는 선출 초기부터 가까운 장래에 아빠스직을 한국인 수도자에게 넘겨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수도원의 중요 직책을 한국인 수도자들에게 맡겼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 본원장은 항상 한국인 신부들이 맡았으며, 노규채 아우구스티노 신부, 황춘흥 다미아노 신부, 이동호 플라치도 신부로 이어졌다. 오도 아빠스는 1971년 2월 24일 갑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하였다. 이는 한국 교회나 오틸리아 연합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번 아빠스 선거 회의에는 처음으로 평수사들도 참사회원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선거에 참여한 수도자는 성직수사 31명(한국인 10명, 독일인 21명), 평수사 26명(한국인 20명, 독일인 6명)으로 총 57명이었다. 1971년 4월 15일이동호(李東鎬, 1935~2006) 플라치도 신부가 왜관 수도원의 제2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오틸리아 연합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62년 만에 한국인 아빠스가 탄생한 것이다. 한국 베네딕도회 역사에 진정한 의미의 ‘한국화’가 시작된 것이다.

새로 선출된 이 플라치도 아빠스는 토마스 팀프테(晋文道) 신부를 본원장과 수련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수도원의 기본 방향을 유지하면서 기존 사업을 확장하거나 축소 혹은 폐지시켰다. 이 플라치도 아빠스 취임 이후에 서울 분원에서도 사목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신학생 기숙사와 연락소 구실만을 했던 장첫동 분원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미 오도 아빠스 시기에 인근 토지를 확보해 놓아서 그곳에 우선 1971년에 기숙사를 새로 지으면서 여러 모임을 가질 수 있는 시설을 확보했다. 1972년 개관한 ‘분도회관’은 초교파적으로 개방하여 교회 일치 운동에 기여하였다. 1979년 도로변에 지상 5층, 지하 1층의 분도 빌딩을 신축하여 일부는 인쇄소, 출판사, 농장 사무실로 쓰고 나머지는 임대하여 수도원의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1984년부터는 종교 미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스테인드 글라스의 설계와 제작을 시작하는 등 크게 활성화됨으로써 서울 수도원의 발전을 연구하고 자립 수도원으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위원회가 발족되기도 하였다.

이 플라치도 아빠스는 늘어나는 수도자들과 수도원 전례에 참여하려는 신자들을 위해 참사회의 동의를 얻어 1974년에 아빠스좌 수도원에 알맞은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건축가 안 알빈 신부에 의해 수도자, 사제단, 일반 신자들이 제대를 중심으로 둘러앉을 수 있는 아담한 성당이 설계되었다. 공사비는 한천수 이시도로 수사의 모친인 홍콩 교포 임정업(당시 73세) 마리아 씨의 희사로 대부분 충당되었으며, 1975년 12월 8일 성당 봉헌식을 하였다. 또한 플라치도 아빠스는 적극적으로 성직 수사와 평수사를 신학 공부와 전문 기술 연수를 위해 유럽으로 보냈다. 이런 시도는 수도원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투자이며 동시에 연합회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부수 효과도 있었다. 물론 국내에서도 평수사들의 대학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77년에 5명의 신부가 유럽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구둣방, 철공소, 제봉실이 중단되고 대신 몇몇 평수사들은 조각이나 요업을 시도했다. 드물게는 교리교사로 활동한 평수사도 있었다. 김정조 베네딕도 수사는 오도 아빠스가 일본에서 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돌보고 있을 때 일본으로 파견되어 그를 도왔다. 그 후 오도 아빠스는 1981년부터 필리핀 민다나오섬 남쪽에 있는 디고스 교구에서 ‘디고스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 설립 구성원은 오도 아빠스 외에 독일인 신부 2명과 왜관 수도원의 허홍길 루도비코 수사와 박준빈 펠릭스 수사였다. 왜관 수도원도 수도자를 해외로 파견하여 그곳 수도회의 건설과 발전에 이바지하였다.36) 1985년 4월 16일 이동호 플라치도 아빠스가 사임하였다.

당시 왜관 수도원의 원장이던 이덕근 마르티노 신부가 같은 해 5월 6일 왜관 수도원의 제3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이 마르티노 아빠스는 왜관 수도원의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고려하여 새롭게 질서를 잡는 일을 과제로 삼았다. 1985년 5월 18일 이 마르티노 아빠스는 왜관 감목 대리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재임 초기에 가장 시급한 현안은 왜관 감목 대리구에 관한 것이었다. 10년씩 이어오던 계약 갱신일이 1986년 3월 1일로 다가왔던 것이다. 왜관 수도원은 이미 1984년부터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1985년 12월 12일, 왜관 수도원의 참사회는 선교위원회와 신부회의 제안을 들어 왜관 감목 대리구의 14개 본당 모두를 대구대교구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86년 2월 28일 왜관 감목 대리구는 폐쇄되었다. 다만 칠곡군 소재 5개 본당은 왜관 수도원의 신부들이 대구대교구 주교의 관할하에 계속 사목하기로 하고, 10년마다 계약을 갱신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발자취는 보다 관상적인 생활을 지향하는 성 요셉 수도원의 설립이다. 이 수도원의 설립은 부산 수도원이 계획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중단된 이후 오랫동안 기다려온 숙원이었다. 1986년 7월 10일 참사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부지를 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1986년 9월 독일 메쉐데(Meschede) 수도원에서 열린 오틸리아 연합회 아빠스 모임에서 이 계획은 긍정적으로 검토되었다. 같은 해 10월 마르티노 아빠스는 모든 형제들에게 자유롭게 지원할 기회를 주었다. 강순건 안토니오 신부(Superior), 김용택 필리보 수사, 김삼도 마인라도 수사, 김세윤 헤르만 수사, 주종수 에프렘 수사, 김형섭 다미아노 수사 등 6명이 창립 멤버였다. 1987년 3월 19일 설립 허가를 준 당시 서울대교구 총대리 강우일 주교와 많은 수도자들과 손님이 모인 가운데 수도원 축복식을 가졌다. 이 마르티노 아빠스는 주교회의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국 천주교 통신교리부의 운영을 맡았다. 1985년 추계 주교 회의의 결정에 따라 1986년 1월 1일부로 업무를 맡게 되어 서울 분원 내에 사무실을 두고 함정태 카시아노 신부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해 7월 1일부로 명칭을 ‘가톨릭 교리 통신교육회’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 마르티노 아빠스는, 1984년 문을 연 유리화 공예실에 이어 1987년 금속 공예실을 열고, 1990년에는 가톨릭 조형미술 연구소를 개소하였다. 1992년 6월 22일 금남리에 ‘분도 노인 마을’을 개원하였다. 1995년 7월 11일 성 베네딕도 대축일 미사 후 마르티노 아빠스는 사임을 발표하였다.37)

이후 1995년 8월 10일 아빠스 선거에서 3년 임기의 관리원장으로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가 선출되었다. 1998년 8월 25일 아빠스 선거에서 다시 3년 임기의 관리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김 요한 보스코 원장 신부는 우선 수도원의 재무 구조를 통합하여 개선하였다. 또한 1996년 성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하여 “100주년 준비 위원회”를 설치하여 9월 2일 최석우 몬시뇰과 노길명 교수를 초청하여 발제 행사를 하였다. 또한 북방 선교 활성화를 위해 중국에 시찰단을 파견하고, 북한 나진 · 선봉 지역 병원 건축 사업도 적극 지원하였다. 요한 보스코 원장 신부는 1997년 6월 남양주군의 요셉 수도원을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시킬 것을 제안하고, 교령을 통해 1998년 3월 19일 승격시켰다. 그는 재임 기간 중에 1998년 6월 ‘성 베네딕도 봉헌회’를 창립하고, 1999년 5월 문화 영성 잡지 《들숨날숨》을 창간하였다. 


2001년 8월 23일, 이형우 시몬 베드로 신부가 왜관 수도원의 제4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이 시몬 베드로 아빠스는 9월 11일 축복식을 가졌다. 그는 그동안 논의되었던 미국 뉴턴 수도원 인수 문제를 종결짓고 같은 해 2001년 12월 13일 김구인 요한 보스코(분원장) 신부 외 7명의 수도자들을 뉴턴 수도원으로 파견하였다. 2002년 1월 25일부로, 뉴턴 수도원은 교회법적으로 왜관 수도원의 분원으로 귀속되었다. 뉴턴 수도원은 2004년 1월 25일 원장좌 예속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 11월 2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이동호 아빠스의 함흥교구장 서리와 덕원 자치 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의 사임을 받아들여,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세페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와 성 오틸리아 연합회의 동의 아래, 현재 상태가 지속되는 한, 함흥교구장 서리로 춘천교구 주교(현직 장익 요한 주교)를, 덕원 자치 수도원구 자치구장 서리로 왜관 수도원장(현직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을 임명하였다. 이 시몬 베드로 아빠스는 2006년 11월 1일 전라남도 화순군에 ‘화순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2007년 5월 10일, 오틸리아 연합회 총재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가 참석한 가운데 공동체 미사에서 베네딕도회 소속 20세기 순교자 36명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교령을 반포했다.

현재 왜관 수도원 소속 수도자는 총 145명에 달한다. 종신서원자 112명(성직수사 47명, 평수사 65명), 유기서원자 18명, 수련자 4명, 청원자 5명, 지원자 5명이다.


4. 왜관 감목 대리구의 설정과 활동

1) 왜관 감목 대리구 일람


왜관 감목 대리구의 사목 활동에 대해서는 교회사 연구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설정에서 폐쇄까지의 과정을 일람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법 상의 감목 대리구(Vicariatus Foraneus)는 교구의 사목을 공동 활동으로 증진시킬 목적에서 교구 내의 여러 본당들을 하나의 연합으로 결합시킨 지구(地區)를 말한다(구 교회법 제445~450조. 새 교회법 제374. 553~555조). 이러한 지구를 감목 대리구라고 부른 이유는 당시 주교를 감목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감목을 대리한 지구’란 뜻이었다. 감목 대리구는 한국에서 지목구나 대목구의 전단계로 설정하였는데, 보통 관할 지역은 도(道) 단위였다.38) 1953년 12월 20일, 대구 대목구 최덕홍 주교는 왜관 · 낙산 · 성주 본당 관할 지역을 연합으로 결합시킨 지구의 감목대리(Vicarius foraneus)로 티모테오 비털리 신부를 임명한다는 교령을 발표하였다(…Vicario Foraneo et simul Vicario Delegato, in districtibus ubi sacerdotes suae jurisdictionis peragunt ministerium sacrum). 당시 선산군과 군위군은 본당이 없는 상태로 왜관 본당의 관할 지역이었다. 


1955년 7월 13일, 대구 대목구 제7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서정길 요한 주교는 관할 지역 확장을 제안하였다. 호노라도 밀레만 신부는 보고 서한을 작성했다. “대구 대목구의 서정길 요한 주교는 교구 신부들과 협의를 거쳐, 김천 · 상주 · 함창 · 점촌 등의 왜관 북쪽 지역 본당들을 우리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본당들은 기존의 왜관 · 성주 · 낙산 본당과 함께 하나의 단일 지구를 형성합니다.”39) 이 제안은 당시 행정 구역으로 김천시 · 금릉군 · 문경군 · 상주군 · 선산군 · 칠곡군 · 성주군 등 7개 시 · 군을 포함하고 있었다. 왜관 본당 관할 지역인 군위군을 포함하면 8개 시 · 군으로 볼 수도 있다. 왜관 감목 대리구는 당시 대구 대목구의 사목 지역인 경상북도 23개 시 · 군 중 가난한 농촌 지역이었다. 서정길 주교와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가 계약서에 서명한 후 포교성성으로 보냈다. 1956년 3월 3일 푸마소니 비온디(Fumasonibiondi) 추기경이 이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왜관 감목 대리구’가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게 되었다.40) 왜관 감목 대리구 승인 당시 본당은 왜관 · 낙산 · 성주 · 김천 · 상주 · 함창 · 퇴강 · 점촌 등 총 8개 본당이었다. 


베네딕도회가 설립한 신설 본당들의 설립 연도와 모본당과 초대 주임은 다음과 같다. 구미(1956, 왜관, 제롤도 피셔(魚)) · 칠곡(1957, 왜관, 안스가리오 뮐러(毛)) · 가은(1957, 점촌, 에르네스토 지베르트(池)) · 평화동(1958, 김천 황금동, 파비아노 담(卓)) · 문경(1958, 가은, 에르네스토 지베르트(池)) · 가천(1960, 성주, 정환국 알로이시오) · 화령(1962, 상주, 에르네스토 지베르트(池)) · 선산(1962, 구미, 안스가리오 뮐러(毛)) · 남성동(1963, 상주, 알로이시오 조이퍼링(閔)) · 신기(1965, 점촌, 김남수 루가) · 신동(1968, 왜관, 이경우 가브리엘) · 지례(1968, 김천 황금동, 에리코 누스비켈(尹)) · 해평(1969, 선산, 아르놀드 렌하르트(盧)) · 지좌동(1970, 준본당에서 승격, 최영호 비안네) · 약목(1973, 왜관, 이소 사이빌러(沈)) · 인동(1979, 왜관, 헤르베르토 오타와(許)) · 신평(1979, 구미, 김영근 베다) · 석전(1979, 왜관, 알로이시오 조이퍼링(閔)). 


왜관 감목 대리구의 사목 지역 이관은 1956년 군위 본당이 설립과 동시에 대구대교구로 이관된 것을 시작으로 한다. 1968년 칠곡 본당이 대구대교구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69년 상주군과 문경군이 새로 설정된 안동교구에 편입되었다. 즉, 상주 서문동 · 남성동 · 함창 · 화령 · 점촌 · 신기 · 문경 · 가은 등 8개 본당이 안동교구로 편입되었다. 퇴강 본당은 1968년 8월, 8대 주임 박태산(朴泰山) 요아킴 신부를 끝으로 함창 본당 소속 공소가 되어 있었다. 안동교구가 설정될 무렵, 지금까지 티모테오 비털리 연길 · 덕원 · 함흥 교구장 서리의 관할하에 여러 교구에 흩어져 활동하던 덕원 · 함흥 · 연길 교구 소속 사제 중 11명이 부산 교구로 입적하게 되었다.41) 그리고 1974년과 1979년에 성주군의 성주와 가천 본당이 각각 대구대교구로 귀속되었다. 그 후 1984년에는 김천시와 금릉군의 김천 황금동 · 평화동 · 지좌동 · 지례 등 4개 본당이 대구대교구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5년에는 선산군의 선산 본당과 해평 본당이, 1986년에는 구미시의 원평과 신평 · 인동 3개 본당이 대구대교구로 이관되었다. 1986년 칠곡군 왜관 · 석전 · 낙산 · 약목 · 신동 등 5개 본당이 대구대교구로 귀속되어 왜관 감목 대리구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왜관 감목 대리구는 1952년 6월부터 1986년 2월까지 34년간 18개 본당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2개 성당(성주와 왜관)을 신축하였다. 이로써 왜관 감목 대리구 시대는 막을 내렸다. 다만 칠곡군의 왜관 · 석전 · 낙산 · 약목 · 신동 본당에는 왜관 수도원의 사제가 사목하고 있다.42) 


2) 왜관 감목 대리구의 사목 현실과 선교 방향

왜관 감목 대리구 관할 지역의 사목 현실은 미신과 제사 문제와 가난으로 대변된다. 관할 지역은 경상북도 중서북부 지방의 가난한 농촌 지역이었다. 물론 김천 · 상주 · 점촌 등 중소 도시가 포함되어 있지만 인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들 농촌 지역은 대개 씨족 부락을 형성하고 있어서 보수적인 성향이 짙어 전교가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들에겐 아직 제사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1953년 12월, 연길 수도원의 마지막 송환자인 레지날도 에그너 신부는 성주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왜관 감목 대리구 최초로 지은 새 성당 봉헌식 후 당시 상황을 전한다. “미군들의 도움으로 이곳에 성당을 세운 후 예비 신자들이 몰려온다. 옛날 팔도구보다 훨씬 많다. 본당에서 일하는 수녀들이 옛 건물을 써야 하기 때문에 사제관도 빨리 지어야 한다. 100~150명 단위의 공소도 여러 개 필요하다. 사람들이 세례받고 싶어도, 조상 제사가 걸림돌이다. 교회는 지금, 일본에서처럼 사람들의 필요를 수용하도록 광범위한 양보를 하고 있다”43)며 조상 제사와 관련된 적응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농촌 지역으로 갈수록 불교와 유교 외에 미신이 많았다. 미신 타파는 당시 선교사들에게 매우 힘든 과제였다. 1956년 4월, 칠곡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안스가리오 뮐러 신부는 ‘선교를 위해 먼저 지역민들에게 뿌리박힌 미신 숭배를 몰아내야만 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민들이 신기한 모양으로 자란 소나무를 ‘귀신이 깃들었다’며 숭배하는 것을 보고, 신자들과 일반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 나무에다 구마 기도를 하고 성수를 뿌렸다.

왜관 관할 지역의 주민들은 생계를 꾸려가기조차 힘들어 도무지 신앙 생활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1957년 7월에 쓴 엑베르트 되르플러(Egbertus Dorfler, 1898~1986) 신부의 편지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선교 열기를 읽을 수 있다. “340명에게 세례성사를 베풀고, 2만 5,000여명에게 성체성사를 주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였지만 걱정거리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선교 활동에서 가장 힘든 것은 주민들의 극심한 가난입니다. 매일 엄마들이 찾아와서 쌀이 떨어져 아이들이 굶는다고 웁니다. 교회 마당은 가난한 사람들과 거지들, 병자와 한센병 환자들로 들끓습니다.”44) 이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왜관 감목 대리구의 초기 시대는 선교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선교의 황금 시기였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이 시대적 분위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였다. 1956년 7월 엘리지오 콜러 신부가 상주 본당에 부임하였을 때 당시 교세는 지역 인구 14만 명 가운데 신자 수가 겨우 980명뿐이었다. 그가 부임한 이후로 신자 증가율이 연평균 33.2%에 달하였다. 1958년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만도 620명이나 되었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먼저 가난한 지역민들을 구제하고 교회 공동체를 위한 구심점을 조직하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 그들은 열심한 평신도들 가운데 교회에 봉사할 젊은 일꾼들을 선발하여 전교회장이나 본당 사무원으로 채용하였다. 그리고 레지오 마리애 등 각종 신심 운동을 도입하여 각 본당에 조직하고 활동하게 함으로써 예비 신자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1957년 가은(왕릉) 본당 초대 주임 에르네스토 지베르트(Ernestus Siebertz, 1907~2000) 신부는 성모회 · 학생회 · 모니카회 · 성 요셉회 · 명도회 · 레지오 마리애 등 여러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활성화시켰다. 


수도원은 선교의 중심 기지였다. 1956년 3월 3일 왜관 감목 대리구 설정이 교황청의 승인을 받자 왜관 지역은 대규모 건축 현장과 같았다. 구미와 칠곡 본당 신축 등 대여섯 곳의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이때 티모테오 원장 신부는 연길교구의 선교사였던 건축가 알뷔노 슈미트(Albuinus Schmid, 1904~1978) 신부와 덕원의 목수 야누아리오 알베르트(Ianuarius Albert, 1901~1972)의 재파견을 요청하였다. 알뷔노 신부는 1961년 한국으로 재파견되어 17년 동안 한국 교회 각 교구에 성당 79개, 공소 30개, 부속 성당 14개, 학교, 병원 등 총 184개의 신축 설계와 9개의 증축 설계를 담당하였다. 에지날도 바움게르트너(Eginaldus Baumgartner, 1910~1997)와 야누아리오 알베르트 수사는 성당 건축의 목공 분야에서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때 목공소에는 5명의 한국인 수사가 일하고 있었다. 엔젤하르도 라인뮐러 수사는 독일 정부가 세운 부산 병원을 해체하면서 얻은 메르체데스 화물차 3대와 전천후 차량(Unimog) 1대를 운용하며 목공소 완제품을 본당으로, 구호 물자를 부산 세관에서 수도원으로 실어 날랐다.

호노라도 밀레만 신부가 1964년에 쓴 왜관 수도원 연대기는 당시 중점적인 선교 방법과 시대적인 요청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우리의 과제는 점점 분명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많은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그리스도의 몸의 특별히 힘찬 세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정신과 미사 봉헌, 교육과 훈련, 빈민 구제 활동, 문서 선교와 피정 프로그램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인들의 영성 생활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중요한 것은 유럽인들과 한국인들 간의 평화적 협력과, 역사 깊고 동시에 젊어져 가고 있는 이 민족의 어려움에 대한 우리의 열린 마음이다.”45) 이러한 언급은 연대기 필자인 호노라도 신부 자신의 소임(수련장과 베타니아원)과도 연관이 있지만, 왜관 지역 전체의 사목 방향과 수도 공동체의 본질적인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전례 개혁은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본질적인 과제였다. 그들은 연길과 덕원에서처럼 신자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 전례 참여를 위해 전례 개혁을 선도적으로 시행했다. 전례 정신 교육을 통해서 토착화를 모색하며 새 전례를 빨리 받아들였다. 미사는 신자를 향하도록 제대 방향을 바꾸고 한국말로 드렸다. 신자들이 사제에게 화답하여 미사의 한 부분을 함께 말하도록 함으로써 신앙 공동체가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례하도록 하였다. 이 같은 개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이 규정하는 바였다. 신자들을 능동적으로 참여시키는 새로운 미사 집전은 공의회 정신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었다. 미사는 더 이상 사제의 등 뒤가 아니라 개방된 제대 위에서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행하여졌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변화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였다. 왜관 수도원은 1963년 《매일 미사 경본》 개정판을 내놓았다.

중등 교육은 전통적으로 베네딕도회 잘 어울리는 선교 방향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수도자임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들 스스로 검소하게 살며,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학교를 열어 청소년들을 교육시켰다. 그리고 지역에서 가장 버림받고 소외된 한센병 환자와 결핵 환자들을 돌볼 병원과 정착촌을 운영하였다. 아울러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 시설도 운영하였다.

지금부터 정확히 33년 전인 1976년 10월 1일에 작성된 문서를 발견하였다. 당시 왜관 수도원과 감목 대리구의 사업과 활동을 보여 준다. 사업의 종류와 수도원 제도와 상황을 알려주는 문서이기에 전문을 여기에 옮긴다. “참사회와 장로회와 신부회와 포교위원회 운영체계 초안. I. 왜관 감목 대리구는 수도원의 여러 가지 사업 중 하나다. 그러나 대리구의 운영은 교회법에 따라서(포교성성 instruction no. 8 dec. 1929 Syu 148) 직접 수도원에서 할 수 없고, 대리구의 책임자(아빠스)와 대리구의 위원들의(포교위원회와 신부회) 일이다. II. 대리구장과 포교위원회, 신부회의 책임하에 운영되는 사업: ㉠ 대리구 내의 13개 본당 ㉡ 여성 복지 상담소(구미) ㉢ 대리구 내의 지역 개발 사업 ㉣ 학생 연합회, 청년 연합회 ㉤ 산간 학교, 의료 보험 사업 ㉥ 그리스도 공동체 묵상회 ㉦ 행복한 가정 운동 ㉧ 전교회장 교육 ㉨ 성의중 · 상업고등학교 III. 아빠스와 장로회 · 참사회의 책임 하에 속하는 사업: ㉠ 수도원 자체 운영 ㉡ 수도원에서 하는 전교 교육 사업 IV. 포교 위원회와 신부회의 책임 하에 운영되었던 사업이 장로회와 참사회의 책임으로 운영될 사업: ㉠ 구라 사업, 양로원, 희망원 ㉡ 결핵 요양원, 무의탁 노인 사업 ㉢ 출판 사업, 시청각 연구회 ㉣ 가톨릭 농민회 ㉤ 각종 애긍(대리구에 해당되는 것 제외) V. 제2항의 사업을 위한 대리구장하의 실무 · 보좌는 대리구 당가이며, 제3항의 사업을 위한 아빠스하의 실무 · 보좌는 수도원 당가이다. VI. 지금까지 특별한 목적 없이 받는 은인들의 보조금은 대리구와 수도원이 각각 반반씩 사용하였으나, 수도원의 사업량이 확대됨에 따라서, 수도원이 ⅔를, 대리구가 ⅓을 사용한다. VII. 장로회와 포교위원회는 각각 감사 2명씩을 선정하여 장로회 감사는 수도원 사업을, 포교위원회 감사는 대리구의 사업을 1년에 한번 감사하며 각각 해당되는 회의에 결과를 보고한다.”46) 


3) 왜관 감목 대리구의 선교 방법과 특성

서정길 요한 주교는 “베네딕도회는 그들이 맡은 모든 시 · 군에 본당을 하나씩 둔다는 당초의 목표를 훨씬 초과 달성했다. […] 어떤 지역을 사목적으로 이같이 개척한 사례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본당 건물과 설비도 이상적이다. 전교회장들을 잘 교육시켜 여러 본당에 투입한 것도 모범이 될 만하다. 한국에는 시골 작은 마을까지 개신교 예배당이 있다. 왜관 감목 대리구 내의 공소들이라면 가히 이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47)고 평가했다. 서 요한 주교는 이 글에서 왜관 감목대리구에서 활성화된 전교회장 교육과 활동, 공소를 통한 선교를 지적하였다. 전교회장은 유급과 무급으로 나뉘는데 능력있는 인재들을 뽑았다. 그들은 공소를 방문해 교리를 가르치고 신상 카드를 적고 예비 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서 주교는 같은 글에서 “강력한 교세 확장이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실을 반영한다. 


왜관 감목 대리구의 선교 방법의 장단점을 다음 4가지 주제로 정리해 보겠다.

첫째, 수도원과의 영적 · 물적 연대를 들 수 있다. 선교 베네딕도회에서 수도 생활은 그 자체로 선교 활동이 된다. 선교학자 토마스 옴은 1927년 동아시아 연구 여행을 마친 뒤 복음화의 최상의 방법으로 다음의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국에서 베네딕도회원들이 활동할 때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 이상을 따른 모범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개개의 선교사들이 깜냥대로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드러내고, 수도 가족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공주 생활의 은사를 분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했다.48) 왜관 지역 선교사들은 그들의 인격과 삶은 분명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본당이라는 ‘포교암자’에서 홀로이 투쟁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수도원과의 영적 교류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필요한 것만 구해가는 수도원이라면 그곳은 단순히 물류 기지가 되고 말 것이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우리는 기도와 일 안에서 모범적인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49)고 말했다. 기도와 일의 균형을 위해 수도원과의 영적 연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들은 ‘안으로는 수도자, 밖으로는 선교사’로서 존재한다. 


둘째, 베네딕도회원에게 전례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리를 드러내는 가장 소중한 일이다. 이 점에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연길과 덕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왜관에서도 늘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정신을 앞서 교육하고 실천했다. 그러나 공의회 신학의 이해에 있어서 ‘옛 선교사’와 ‘새 세대 선교사’ 간에 갈등이 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본당 공동체를 통한 전례 개혁도 연길과 덕원의 유산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더 깊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인력이 부족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도 구체적으로 그 문화 속에 파묻히지 않고는 현존하기 어렵다. 전례 안에서의 토착화 시도도 부족했다. 물론 시대가 변했고 감목 대리구라는 구조상의 한계점도 있었다.

셋째, 베네딕도회와 중등 교육은 전통적으로 잘 어울리는 활동이다. 왜관에서도 마오로 기숙사, 남녀 순심중 · 고등학교, 김천 성의중 · 상업고등학교, 함창 상지여자중 · 등학교 등 교육 사업에 적지 않은 투자를 하였다. 학교를 통한 선교 활동은 그 중요성이 이미 검정된 바 있다. 그러나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인성 교육을 꾸준히 실천한 수도자가 많지 않았다. 


넷째, 사회 활동은 왜관 감목 대리구에서 매우 활발히 진행되었다. 구라 사업으로 한센병 환자를 위한 4개의 정착촌 지원, 결핵 요양원, 근로자 센터, 양로원, 희망원 등 무척 다양하였다.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일은 수도자들의 정체성을 심화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대개 사업들이 개인의 관심에 집중되어 운영되었다.


5. 특수 사목

1) 교육 사업50)

왜관 수도원은 청소년 교육을 통한 선교 활동으로 순심학원, 김천 성의학원, 함창 상지학원을 인수 및 설립하여 운영했다.

왜관의 순심학원51)은 1936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왜관 본당 로베르트(Richard Robert, 이동헌) 신부가 미취학 소녀들 교육을 위해 설립한 소화여학원이 전신이다. 왜관 수도원은 1955년 4월 1일 고등학교를, 1961년 7월 31일에는 중학교도 인수하여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성 마오로 기숙사52)는 1956년 수도원 공사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스카일러(Schuyler) 수도원의 재정지원을 받아 지은 마오로 기숙사는 순심중 ·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일종의 기숙학교(Internat)였다. 1957년 3월 12일 축복식을 거행하고 학생 30명이 입사하였다. 성 마오로 기숙사는 수도원의 사제 성소 개발이 일차적 건립 목적이었다. 1956년부터 1983년까지 성 마오로 기숙사에서 교육받은 학생 310명 가운데 50명 이상이 성직을 지망하는 성공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1984년 2월 29일 폐쇄되었다. 


왜관 수도원은 1953년 김천 소재 성의학교53)도 인수하였다. 성의학교는 1901년 김성학 신부가 경북 김천에 설립한 초등교육 기관으로 현 성의중 · 고등학교 및 여자상업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왜관 수도원은 1979년 성의상업고등학교 운영권을 대구대교구에 넘겨주었다. 


상지여자중 · 고등학교는 1956년 함창 본당 주임 레지날도 에그너 신부가 설립하였다. 에그너 신부는 1959년 5월 함창 본당 안에 ‘성경강습소’를 세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 50명을 모아 학업을 계속하도록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961년 학생들에게 중학 과정을 가르칠 수 있는 상지학원54)의 전신 ‘성모고등공민학교’ 3학급을 설립하였다. 1969년 안동교구가 설정되자 교회의 관례대로 운영권을 교구에 넘겼다. 


왜관 수도원은 종교 교육 분야에서 3곳의 피정의 집55)과 가톨릭 신학원과 가톨릭교리 통신교육회를 운영하였다. ‘왜관 베네딕도 피정의 집’은 신앙의 심화를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획되었다. 1965년 1월 18일 한국 교회 최초의 피정의 집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왜관 베네딕도 피정의 집은 교리 교사 재교육과 각종 모임을 원하는 이들에게 공간을 제공하였다. 왜관 베네딕도 피정의 집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정신을 가르치고 실습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우리 지역 내 모든 사제를 대상으로 하는 전례 모임’ 또는 남한의 각 지역, 심지어 제주도에서 온 남녀 교리교사들을 위한 강좌가 있었다는 보고가 ‘연대기’에 쌓여 있다.56) 부산 명상의 집은 부산 금정구 오륜동에 부산 수도원과 함께 1969년 10월 축성되었다. 서울의 성 베네딕도 피정의 집은 1972년 3월에 ‘분도 회관’이라는 이름으로 축성되었다.

가톨릭 신학원57)은 수도자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다. 가톨릭 신학원의 태동은 1967년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시작된 ‘수도자 합동 강의’였다. 대구대교구는 그 후 체계적인 수도자 교육을 위해 성 베네딕도회에 교육을 일임하여, 왜관 수도원은 1969년 대구 대명동 성당 자리에 신학원을 건립하고 현재까지 운영함으로써 명실 공히 수도자 전문 교육 기관이 되었다.

가톨릭교리 통신교육회는 1985년 12월 추계 주교 회의 결정에 따라, 1986년 1월 1일부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통신 교리 업무를 맡아 운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 장첫동 분도 빌딩으로 업무처를 옮기고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2) 사회 사업

사회 복지 분야의 활동은 왜관 수도원의 중점 사업이었다. 크게 구라사업과 결핵 요양원, 양로원, 농민 운동 및 노동 운동으로 분류된다. 그중 가장 불쌍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왜관 수도원의 특별한 소명이었다. 왜관 감목 대리구 ‘포교위원회’의 회의록에는 구라 사업의 예산 비중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 준다. 호노라도 밀레만 신부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왜관 수도원의 사회 사업을 결산하면서 “우리 선교 지역 내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우리의 활동은 공공사회 사업의 성격을 띤다. 우리가 선교하는 경상도는 예로부터 한센병 환자가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 우리는 무언가를 하여야만 하였다. 몇 년 후 우리가 돌보는 4곳의 한센병 환자촌에 700여 명이 살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90% 정도는 병의 진행이 멈춘 상태이다”58)라고 보고하였다. 성주 본당 주임 엑베르트 되르플러 신부는 이미 1955년 10월부터 경북 성주군 초전면 용봉동에 농장 부지를 매입하여 성주군의 유랑 한센병 환자들과 고령 집단 부락 온양원에서 이주한 110여 명의 환자들로 정착마을 ‘성신원’을 설립하였다. 1956년부터 호노라도 밀레만 신부가 왜관 베타니아원을 정착 때부터 원조하며 돌보았다. 1958년에는 상주 본당 콜러(Eligius Kohler) 신부가 대지 400평을 구입하여 나환자 정착마을 성모성심원을 건립하고 나환자들을 정착시켰다.59) 1961년에는 성주군 초전면 용봉동에 독일 미세레오르(Misersor) 재단과 서독구라협회로부터 10만 마르크를 지원받아 건평 130평, 병실 19개의 나환자 전문병원인 ‘성심의원’을 건립하였다. 1962년 3월 개원한 이 병원에서 대구 파티마병원 의사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디오메데스 메펠트(Diomedes Meffert) 수녀가 환자를 전담하였다. 1984년에 성주군 용봉의 피부과 병원을 대구대교구로 넘겼고, 현재 왜관의 베타니아원은 세바스티아노 로틀러 신부가 돌보고 있다.

신동 본당 주임 레지날도 에그너 신부가 1975년 10월 5일 칠곡군 연화동에 결핵 환자들을 위한 ‘결핵요양원’을 세웠다. 연화 결핵요양원 설립 후 이동호 플라치도 아빠스는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왜 우리는 아직도 이 짐을 져야 하는가? 우리나라는 약 120만 명이 결핵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 중 30만 명이 병이 진행되었거나 중증으로 여러 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신동 본당 레지날도 에그너 신부가 주도한 일임을 밝혀둔다.”60) 남녀 각각 35명씩 수용할 수 있는 이 요양원은 왜관 수도원에서 직접 운영하다가 1981년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이양하였다.

선산 ‘성심양로원’은 우리나라에서 노인 복지의 개념이 낯설던 1970년에 당시 선산 본당 주임 안스가리오 뮐러 신부가 건립하여 22년간 운영하였다. ‘성심양로원’은 15명으로 소박하게 시작하였다. 안스가리오 뮐러 신부는 “우리는 다른 데서 받아주지 않는 중증 노인들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곳을 찾아온 노인이 100명을 넘어섰다”며 “우리 양로원은 모범 시설로 평가받는다”고 말하였다.61) 1992년 안동의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회’에 인계하였다. 그로부터 1개월 후인 1992년 6월 22일 성심양로원의 노인 72명과 함께 경북 칠곡군 왜관읍 금남리로 이주하여 ‘분도노인마을’을 개원하였다. 분도노인마을의 특징은 일반 양로원과 달리 ‘수용의 형태’가 아닌 ‘마을 형태’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는 일본 양로원의 운영 방식을 배워 적용시킨 것이다.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분야는 상기 장정란의 논문을 참조하라.

3) 문화 사업

(1) 분도출판사

분도출판사는 1962년 5월 7일 등록번호 라15호로 문공부에 등록되었다. 사실 왜관에서 분도출판사의 시작은 1960년부터다. 1959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인쇄공과 식자 기사인 로코 시벨(Rochus Schiebel, 1919~1982) 수사가 중고 하이델베르그 인쇄기 1대와 제단기 1대, 접지기 1대를 가지고 왜관으로 파견되었고,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은 덕원 수도원의 제본공 비토 슈텡거(Vitus Stenger, 1908~2003) 수사를 왜관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당시 ‘마오로 기숙사’ 일부를 임시로 사용하였다. 1960년 여름 마침내 인쇄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험 인쇄로 새로 번역한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을 찍었다. 이것이 분도출판사의 첫 책이다. 이어 《예수의 생애》가 나왔다. 분도출판사는 “시대의 징표를 함께 읽으며 신자들에게 필요한 양서를 만든다. 또한 시대의 도전에 과감히 맞서 억압받고 소외된 소수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거짓된 평화를 거부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해 용기 있는 출판을 통해 예언자적 소명을 다하고자 한다.”62) 분도출판사는 신학과 종교 서적은 물론 철학, 사회학,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에 이르기까지 2002년까지 9종의 총서와 900여 권 이상의 서적을 출간하였다. 비록 수적으로 다량은 아니나 학술성과 수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양서(良書)들이다.63)

1960년대에는 무엇보다 수도원과 교회의 필요를 첫족시키는 책을 냈는데, 그 범위는 주로 수도 생활 · 전례 · 영성 · 성서 신학 계열에 국한되어 있었다. 1963년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옮겨 엮은 《구세사》가, 1967년에는 다이슬러의 《구약성서 입문》이, 그리고 1969년에는 셸클레의 《신약성서 입문》이 각각 출판됨으로써 명실공이 본격적인 신학 전문 출판사로서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책임자였던 코르비니아노 슈레플 신부와 김윤주 편집장이 헌신적으로 번역했던 《성경의 세계》 시리즈는 당시 신학도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다. 


1970년대의 분도출판사는 세바스티아노 로틀러 신부의 취임과 더불어 시대의 징표를 확고히 읽으려는 의지를 공고히 한다. 70년대는 분도출판사의 총서들이 탄생하는 시기다. 분도 소책과 신학 총서가 1971년과 1974년에 각각 출범했고, 1975년에는 《꽃들에게 희망을》이 우화 시리즈의 첫 책으로 선보였다. 1977년 쿠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효시로 1970~80년대에 꾸준히 출간된 일련의 해방신학 관련 도서들은 암울한 시절, 어둠의 세상을 향해 던지는 일종의 물음표 구실을 했다.

1980년대에 요한네스 바이너와 루카스 피셔가 엮은 신 · 구교 통합 신앙 고백서 《하나인 믿음》은 매우 뜻깊은 서적이다. 1980년대의 역점 사업은 《200주년 신약성서 주석판》 간행이었다. 1981년, 정양모의 《마르코 복음서》를 필두로, 2002년 《요한 묵시록》을 끝으로 이 시리즈 18권이 완간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1982년에는 아시아 총서와 사목 총서가, 1986년에는 종교학 총서가 출범한 해이다. 1987년에는 교부들의 원전을 원어-한글 대역본으로 옮겨 엮은 교부 문헌 총서가 《치쁘리아누스》를 필두로 출범하였다. 1984년에 나온 김지하의 《밥》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언자적 외침으로 기억에 새롭다. 


1990년대에는 여성 · 환경 · 영성 · 묵상 서적에 대한 문제의식이 어느 때보다도 투철했다. 1992년에 《원시 그리스도교의 여성》, 《교회의 녹화》 등을 시작으로 여성과 환경에 대한 책들이 선보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연이어 출간된 안소니 드 멜로의 묵상 서적들은 영성과 묵상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보급판은 1991년에, 개정 보급판은 1998년에 나왔다. 


분도출판사는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와 함께 새 천년을 맞았다. 2001년 5월 30일 27년의 각고 끝에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가 완성되었다. 기존의 신학 총서를 갈음할 만한 야심작으로 《신학 텍스트 총서》를 기획하여 드롭너 《교부학》을 시작으로 현재 8권이 나와 있다. 이제 창립 반세기를 바라보는 분도출판사가 특수성과 보편성을, 한국성과 세계성, 개성과 사회성, 남다른 독자성과 남을 위한 개방성을 어떻게 동시에 살려 나가느냐가 숙제이며 과제이다.

(2) 베네딕도 미디어

베네딕도 미디어는 1971년 시청각 교리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세바스티아노 로틀러 신부가 ‘시청각 종교교육 연구회’를 설립하며 시작되었다. 이 연구회는 이듬해 스위스 프리부르그(Fribourg)에 본부를 둔 세계 시청각 기구 SONOLUX에 가입하여, SONOLUX KOREA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90년에 영상물 제작 보급을 위한 필수 조건을 완비하고 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 수도원 소속 ‘재단법인 영상물 제작업체’로 정식 등록하였고, 2000년에는 새 천년을 시작하며 새로운 이미지로 신자 및 일반인에게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그 명칭을 ‘베네딕도 미디어’로 변경하였다.

‘시청각 종교교육 연구회’는 1972년 가톨릭 신앙교육용 슬라이드 교재 〈우리의 생활〉 23편과 흑백 및 칼라 융판 그림 구약 · 신약성서를 한국 교회사상 처음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이 슬라이드는 어린이는 물론,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묵상, 우화, 기록, 인물 등 다양한 종류의 종교 교육용으로, 청소년 교육과 신자 재교육에 효과적인 시청각 교재가 되었다. 


1980년 초부터는 16mm 예술영화들을 수집하여 전국 종교 단체와 대학생을 대상으로 상영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음악 카세트 테이프도 제작 보급함으로써 종합 시청각 매체의 연구 및 제작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아울러 1984년부터는 매스미디어의 변화에 따른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비디오 번역 보급을 시작하였다. 프로그램은 형식이 빼어나고 내용상 가치 있는 필름으로 종교, 사회 문제, 인물, 어린이, 명작, 기록,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내놓았다. 분도출판사와 미디어 두 분야 모두에 베네딕도회 문서 선교의 선구적 역할을 맡았던 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는 ‘좋은 영화는 사람의 가치관을 변하게 한다’는 종교적 사명감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선정한다고 하였다.64)


6. 나오는 말

1500여 년 전, 네 번이나 파괴된 몬테카시노(Montecassiono)를 “옛 등걸에 새 순이”(Succisa virescit)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한국 베네딕도회의 역사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65) 100년의 역사 중에서 왜관 수도원은 더욱 더 지난한 시련과 갈등을 겪었다. 왜관 수도원은 정착 초기의 불안전성을 이겨내고 다양한 이견들을 통합해 나갔다. 1500여 년의 베네딕도회 역사는, 각각의 수도원이 자신이 처한 다양한 환경 안에서 나름으로 ‘기도하고 일하며’ 놀라운 적응력과 융통성을 발휘한 사실을 보여 준다. 왜관 수도원도 같은 적응력과 융통성으로 ‘옛 등걸에 새 순’을 틔웠다.

본 논문은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이라는, 오틸리아 연합회의 ‘이중 소명’을 중심에 놓고 선교 활동의 성과를 전면에 내세우는 ‘영광조’의 나열을 지양하고, 활동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의 제도 발전 과정에 비중을 두고 기술하였다. 그래야만 활동의 목적과 특성이 보여 주는 연관 관계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왜관 수도원은 스러진 ‘옛집’ 위에 ‘새집’을 지었다. 아니 지금도 짓고 있다. 옛집에 대한 기억은 세월이 지나면서 새집의 편리함 속에서 잊혀지게 마련이다. 왜관 수도원은 불교의 승려들이 옛 ‘절집터’에 새 사찰을 세울 때 생기는 문제들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왜관 수도원은 물리적인 옛 집터에 새집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정신과 전통, 그리고 ‘사람’이라는 ‘집터’를 물려받았다. 이런 부지 위에 집을 짓는 일은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이란 인내와 포용과 관용의 일치 정신이었다.

사실 왜관 수도원만큼 다양한 ‘구성 요소’를 가진 수도 공동체는 없을 것이다. 한국인과 독일인, 연길 수도원 출신과 덕원 수도원 출신, 연길과 덕원에서 입회한 수도자와 왜관에서 입회한 수도자, 덕원과 연길에서 활동 경험이 있는 ‘옛 선교사’와 왜관으로 바로 파견된 ‘새 세대 선교사’, 성직 수사와 평수사 등 이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연길과 덕원 수도원의 폐쇄, 한국 전쟁, 교황청, 오틸리아 연합회, 대구대교구 등 다양한 운명적 요소들이 왜관 수도원의 역사에 내재되어 있다. 당연히 시련과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요소들을 이해해야만 왜관 수도원이 보인다.66) 필자는 원래 시련과 갈등의 구조를 중심으로 논문을 적고 싶었다. 그러나 이 소망은 많은 이들의 만류로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 베네딕도회 100년의 역사는 왜관 수도원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일부이며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한 역사다. 이 점에서 왜관 수도원은 더욱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 선배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역사적 유산을 보다 책임있는 자세로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역사가들은 베네딕도회의 100년 역사에는 무궁무진한 연구 주제들이 있다고 말한다. 왜관 수도원은 이들의 연구 욕구에 얼마나 진지하게 응대했는지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우선, 120년을 염두에 두고 새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왜관 수도원은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의 균형을 더 고민해야 한다. 이 둘은 사실 하나이기도 하다. 기도와 일은 베네딕도회를 바치고 있는 두 가지 기둥이다. 수도자와 선교사라는 이중 소명의 조화를 더 궁구해야 한다. 그것이 왜관 수도원이 물려받은 유산의 계승이다. 오틸리아 연합회의 일원으로 전체 연합회의 방향 정립에도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동아시아 베네딕도회의 발전에도 기여해야 한다. 새로운 봉사의 영역을 찾아야 한다. 참된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관 수도원의 한 회원으로서 자신의 공동체 역사를 논했다. 안팎의 독자들을 동시에 고려하며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 필자는 오늘 왜관 수도원이 이룬 최고의 업적을 말하라면, 시련과 갈등 속에서도 ‘공동의 집’을 이뤄낸 점을 꼽고 싶다. 그들은 고난과 다툼의 구조에서 파생되는 난제들을 극복하고 ‘일치의 집’을 건설했다. 왜관 수도원의 역사는 시련과 극복의 역사다. 독일적 오만과 한국적 아집을 하나로 융합한 역사다. 구세대적 보수와 신세대적 진보를 하나로 통합한 역사다. 시련과 갈등으로 단련된 공동체가 극복한 역사다.

‘영광주의’는 항상 역사 발전의 방향을 오도했다. 이런 모습을 잘라내고 겸허해야 한다. 한 교회사학자가 말한 치열한 역사의식은 지금 왜관 수도원이 진정으로 마음에 담아야 할 지침으로 들린다. “반성과 참회가 없는 곳에 쇄신과 발전은 있을 수 없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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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석우, 〈한국 분도회의 초기 수도생활과 교육사업〉, 《한국 교회사의 탐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388쪽.

2) 장정란, 〈외국 선교회의 한국 선교(독일 베네딕도회의 왜관 시대 1950~현재)〉, 《한국 근 ·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하), 가톨릭출판사, 2006, 47~80쪽. 이 논문은 한국인이 적은 최고의 역작이다. 장정란은 상기 연구단 소속으로 활동하며 백동 수도원과 덕원 수도원 관련 논문도 발표하였다. 그는 베네딕도회 관련 전문 연구가로 꼽힌다. 베네딕도회 관련 참고 문헌을 알고 싶으면 이 논문들을 참고하라. 


3) 최고 장상의 성명과 재임 기간은 다음과 같다. 설립자 티모테오 비털리(Timotheus Bitterli, 李聖道) 원장(1952~1964), 초대 오도 하스(Odo Haas, 吳道煥) 아빠스(1964~1971), 2대 이동호(李東鎬, 플라치도) 아빠스(1971~1985), 3대 이덕근(李德根, 마르티노) 아빠스(1985~1995), 김구인(金求仁, 요한 보스코) 관리원장(1995~1998 / 1998~2001), 4대 이형우(李瀅禹, 시몬 베드로) 아빠스(2001~현재).

4) 왜관 수도원 역,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고유법》, 1990에서 제5장 수도원의 행정(112항~186항) 참조.

5) 예레미아스 슈뢰더(Jeremias Schroder, 1964~ ) 총아빠스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1985년 첫서원을 하고 199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2000년 10월 5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제6대 아빠스로 선출되었다.

6) Adelhard Kaspar / Placidus Berg, Hwan Gab 60 Jahre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und in der Mandschurei, Meunsterschwarzach 1973. 아델하르도 카스퍼 신부는 1940년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가 1947년 귀환하였다. 플라치도 베르그 신부는 1965년 왜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가 1988년부터 오틸리아 연합회 수석 비서관으로 상트 오틸리엔에서 일했다.

7) Frumentius Renner(Hrsg.), Der funfarmige Leuchter, Bd. II, IV, St. Ottilien, 1971. 플루멘시우스 렌너 신부는 상트 오틸리엔의 문서고 책임자로 일하면서 이 책들(1권~4권, 1971~1993)을 집필하고 편찬하였다.

8) Godfrey Sieber OSB, The Benedictine Congregation of St. Ottilien, 1992, pp.60~63.

9) P. Lucius Roth가 1949년 4월 29일에 오틸리엔의 선교 총무 후고 신부에게 보낸 편지다. 오틸리엔 문서고.

10) Fr. Beda Kim, “Let me go back to my home”, 오틸리엔 문서고.

11) Beda Kim, “Vertreibung und Flucht der Monche aus der Abtei Tokwon”, Adelhard Kaspar / Placidus Berg(Hrsg), Hwan Gab 60 Jahre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und in der Mandschurei, Munsterschwarzach 1973 (이하 Hwan Gab), pp. 138~150 참조.

12) Chrysostomus Schmid(1883~1962, 한국명 金時練) 신부는 1922년 백동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덕원 수도원 원장으로 있다가 1930년 6월 17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총아빠스 서리로 피선되어 독일로 귀국하였다.

13) 김삼도, 〈젊은 수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코이노니아 선집》 제3권, 2004, 183~199쪽. 김재환 플라치도 수사, 방삼덕 빈첸시오 수사, 김복래 레오날도 수사, 권영욱 마오로 수사, 임근삼 콘라도 수사, 이석철 미카엘 수사, 김용택 필리보 수사, 김 알로이시오 수사, 김삼도 마인라도 수사, 명용인 디다코 수사, 조재환 스테파노 수사, 김 요셉 수사, 이근재 부르노, 권병서 스테파노, 최 안드레아 청원자 등 총 15명이다.

14) Timotheus Bitterli 1952. 2. 5일자 편지, 오틸리엔 문서고.
15) Maximilianus de Furstenberg는 한국 교회 제2대 교황 사절이다. 재임 기간은 1950. 6. 4~1953.
16) P. Timotheus Bitterli 1952. 3. 10일자 편지, 오틸리엔 문서고.

17) 진 토마스,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1952~1984〉, 《옛 등걸에 새 순이》,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1984, 199~233쪽.

18) 이에 관해서는 拙稿, 〈‘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선교활동〉, 《교회사연구》 2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61~96쪽.

19) Bitterli, Timotheus, “Waegwan - ein Neubeginn in Suedkorea”, Renner(Hrsg.), Der funfarmige Leuchter, Bd. II, St. Ottilien, 1971, pp. 445~495 ; Auf der Maur, Ivo “Koreanische Benediktinertum”, Neue Zeitschrift fuer Missionswissenschaft, Beckenried, 1945ff(이하 NZM), Jg. 37, 1981, pp. 81~106 ; 진 토마스, op. cit., pp. 199~233.

20) 크리소스토모 슈미트 총아빠스의 1952. 5. 12일자 편지. 왜관 수도원 문서고.
21) 티모테오 비털리 신부의 1952. 11. 25일자 편지. 오틸리엔 수도원 문서고.
22) 최덕홍 주교의 1953. 12. 20일자 공문에 ‘감목 대리’(Vicario Foraneo)란 용어가 분명히 나온다.
23) 크리소스토모 슈미트 총아빠스 1954년 2월 26일자 편지. 왜관 수도원 문서고.
24) 크리소스토모 슈미트 총아빠스 1954년 5월 4일자 편지. 왜관 수도원 문서고.
25) Honoratus Millemann 신부 1955년 7월 10일자 편지.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 문서고.

26) 다음과 같이 사제 인사가 있었다. P. Egbertus Dorfler(鄭默德, 1898~1986) 성주 본당, P. Eligius Kohler(景道範, 1899~1963) 상주 본당, P. Fabianus Damm(卓世榮, 1900~1964) 김천 본당, P. Arnoldus Lenhart(盧道柱, 1905~2003) 점촌 본당, Geroldus Fischer(魚, 1908~1972) 구미 본당, Br. Eginalldus Baumgartner(方, 1910~1997), Br. Engelhardus Leinmuller(李, 1912~1978). 오틸리아 연합회 부고장과 사망자 명부 참조.

27) P. Timotheus Bitterli 1956. 8. 7일자 편지. 오틸리엔 문서고.
28) P. Ernestus Siebertz 1958. 2. 5일자 편지. 오틸리엔 문서고.
29) Urkunde 13. 1. 1964.
30) Suso Brechter 1964. 2. 26일자 편지. 왜관 수도원 문서고.

31) P. Ioseph Zenglein, 회고록(한국어 미출간) 2장 63. 요셉 신부는 다음의 말을 남겼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뜻밖이었다. 오도 신부는 아주 젊다. 그렇게 젊은 사람에게서 청춘을 빼앗는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32) Odo Haas, “Die Abtei Waegwan(1964~1971) und ihre Funktion innerhalb der Gesamtkirche Koreas”, Hwan Gab pp. 218~290 참조. Godfrey Sieber, The Benedictine Congregation of St. Ottilien, St. Ottilien, 1992, pp. 167~171.

33) Chronik Waegwan 1966/1968. 5. 1. “우리는 주일 장엄미사를 제외한 평일 공동 미사 집전을 새로운 성가를 포함하여 한국어로 봉헌할 뿐 아니라 영성체 예식도 다른 한국 본당, 공동체 그리고 아마도 본국의 성당들보다 앞서 갈 것이다. 우리 수도원 성당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평신도가 제대로 나아가서 성반에서 성체를 집어 영한다.”

34) Odo Haas, op, cit, pp. 264~267.

35) Abt Odo Haas 1967. 4. 25일자 편지. 왜관 수도원 문서고. “4월 4일 부산에서 작고 겸손하게 시작하였다. 올바른 출발이기를 희망한다.” Br. Bonaventura Schuster 1968. 6. 29일자 편지. 상트 오틸리엔 문서고. 《오틸리아 연합회 편람》 1971년판에 의하면, 부산 수도원 구성원은 성직 수사 2명, 종신서원한 평수사 1명, 유기 서원자 5명, 수련자 1명, 청원자 4명, 지원자 5명이었다.

36) 진 토마스, 앞의 글, 119~233쪽 ; P. Johannes Bosco Kim, Waegwan-ein koreanisches Kloster 1971~1995, Renner(Hrsg.), Der funfarmige Leuchter, Bd. IV, St. Ottilien, 1993, pp. 219~236 ; Honorat Millemann, Chronik der Abtei Waegwan 1971 ; P. Josef Zenglein, Missionsabtei Waegwan 1972, P. Placidus Berger, Abtei und Gebiet Waegwan: 1973, 1974/75, 1976~78.

37) P, Johannes Bosco Kim, op. cit., pp. 224~236. 이덕근 마르티노 & 강순건 안토니오, 〈왜관 수도원의 서울 새 공동체 설립에 대하여〉, 《코이노니아 선집》 I,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2004. 612~620쪽.

38)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한국가톨릭대사전》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252~253쪽.
39) 호노라도 밀레만 신부, 1955. 11. 1일자 편지. 오틸리엔 문서고.
40) Bitterli, Timotheus, op. cit., p. 483.

41) 《경향잡지》 제61권 제4호(1969. 4. 1). 이들은 1969년 3월 17일자로 통일이 이룩되면 본 교구로 돌아간다는 한 가지 조건만을 보유하고 정식으로 부산교구에 입적되었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첫무(클레멘스, 연길) · 한도준(마태오, 연길) · 김남수(안젤로, 연길) · 김성도(모이세, 덕원) · 이경우(가브리엘, 함흥) · 정환국(알로이시오, 연길) · 함영상(비오, 함흥) · 김남수(루카, 덕원) · 박태산(요아킴, 연길) · 양덕배(요한, 함흥) · 이동훈(안토니오, 연길) 등 11명이다. 


42) 마백락, 〈왜관 감목 대리구〉, 미발표 원고 참조.
43) P. Reginaldus Egner 28. 12. 1954.
44) P. Egbertus Dorfler 1957. 7. 30일자 편지.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문서고.
45) Chronik Waegwan 1962/1964, p. 8.
46) ‘참사회와 장로회와 신부회와 포교위원회 운영체계 초안’(1976. 10. 1), 왜관 수도원 문서고.

47) Erzbischof Johannes Sye(Chong-kil), “Glorreiche Evangelisation des Benediktinerordens in Korea”, Hwan Gab, pp. 201~206.

48) P. Thomas Ohm, “Benediktinisches Mochtum im fernen Osten”, Benediktinische Monatsschrift, Jg. 10, 1928, pp. 58~62.

49) Olabus Graf, Abtbischop Bonifatius Sauer OSB. “Lebensbild des Grunders der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Hwan Gab, pp. 71~73.

50) Odo Haas, op. cit., p. 277.
51) 순심 70주년 기념 역사편찬위원회, 《순심 70년》(1936~2006), 왜관, 2006.
52) Timotheus Bitterli, op. cit., pp. 471~472.
53) 성의 70년사 편찬위원회 편, 《성의 70년사》, 1978 ; Odo haas, op, cit., pp. 281~282.
54) Odo Haas, op. cit., pp. 283~284.
55) Timotheus Bitterli, op. cit., pp. 480~482.
56) Chronik Waegwan 1964/1966, 57.
57) Odo Haas, op. cit., pp. 232ff.
58) Honoratus Millemann, Kloster und Mission Waegwan, Hwan Gab, pp. 207~217 참조.
59) Sr. Diomedes Meffert 1964. 2. 보고서, 왜관 수도원 문서고.
60) Ruf in die Zeit 1975.
61) Ruf in die Zeit 1975. 1977.
62) 〈이형우 아빠스, 분도출판사 설립 40주년 기념사〉, 《평화신문》 2002년 1월 20일자.

63) Notker Wolf, “Von der Buchkunst zum Fotosatz, Druckerlei - und Verlagsarbeit der Missionsbenediktiner von St. Ottilien”, in: Frumentius Renner (Hrsg.), op. cit., Bd. IV, pp. 374ff.

64) 장정란, 앞의 책, 57~58쪽.
65) 요셉 첸글라인, 티모테오 비털리 몬시뇰의 사제 서품 25주년 기념식, MbU 61(1957) 103.
66) 진 토마스, 앞의 책, 199~233쪽 참조.

[교회사 연구 제33집, 200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선지훈(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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