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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6-7: 에페소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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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3 ㅣ No.424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6) 에페소 공의회(431년) (상)


하느님의 모친이냐 그리스도의 모친이냐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열렸던 에페소 성모마리아 대성당 유적. 평화신문 자료사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이집트 북단 지중해 연안 도시 알렉산드리아. 일찍부터 북아프리카 지중해권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70인역'이라고 하는 그리스어 구약성경이 번역된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이후 로마,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예루살렘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5대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알렉산드리아를 주요 무대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라고 하는 교리 신학 학파가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가운데서도 특히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서나 교리 해석에 있어서 은유적이고 비유적 표현 방식을 즐겨 사용하고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색채가 강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번창했던 또 다른 고대 도시 안티오키아도 그리스도교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입니다. 오늘날 시리아 국경에 인접한 터키 땅에 속하는 안티오키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이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사도 11,26). 이 안티오키아 역시 5대 교회 가운데 하나로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서열 세 번째 교회로 지칭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안티오키아를 중심 무대로 '안티오키아 학파'가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다르게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경과 교리 해석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중시하는 자의적(字意的) 해석과 역사적 접근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요.

 

에페소 공의회 이야기를 하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에 대해 늘어놓는 것은 진리 추구와 이해에 있어서 색깔이 다른 이 두 학파의 대립과 마찰이 에페소 공의회는 물론 그 이후 칼케돈 공의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배경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성자가 성부와 똑같은 신성을 지닌다고 천명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이를 재확인하면서 성령 또한 신성을 지닌다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공의회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면서도 하느님으로 계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5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학파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를 지낸 성 치릴로(380~444)가 있었고, 안티오키아 학파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낸 네스토리우스(381~451)가 있었습니다.

 

치릴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요한 복음 1장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과 사람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곧 인간 예수는 바로 하느님이라는 것이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자칫하면 인간 예수의 온전한 인간성은 사라지고 신성만 남을 우려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 네스토리우스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곧 예수가 온전한 인간임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말씀이 인간 예수 안에 머문다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곧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자칫하면 하느님이 인간의 탈을 쓴 것으로 오해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 두 노선은 사실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내 것만을 주장하면 오히려 그 반대가 되기 십상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게 된 배경이 그랬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시작됩니다. 발단은 네스토리우스가 4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부임하면서 데려온 비서 신부 아타나시우스가 제공하지요. 이미 3세기쯤부터 교회 안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그리스어 테오토코스)으로 공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의 모친'이란 표현이 잘못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인간일 따름이어서 하느님의 모친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200년 동안이나 별 문제 없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모친'으로 불러온 신자들과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했습니다. 반발이 심해지자 네스토리우스는 중재에 나섭니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그리스어 크리스토토코스)라고 부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데서 오는 위험(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피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존중하고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이 대안 역시 교회 초기부터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해온 신자들의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가 이 논쟁에 개입합니다. 그는 예수의 육신이 하느님의 육신이 아니라 한 인간의 육신일 따름이라면 어떻게 그 죽음이 구원을 줄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네스토리우스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보다 오히려 인간성을 강조하고자 '하느님의 어머니' 대신에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치릴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것으로 몰아간 셈입니다.

 

하지만 치릴로가 이 논쟁에 개입한 것은 신학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는 게 일반적 평가입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간 대립과 경쟁,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이후 급격히 부상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위상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경계와 시기심 등이 함께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대립이 심화되면서 치릴로는 로마 주교인 교황 첼레스티노 1세에게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고발합니다. 교황 지시로 430년 8월 로마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열흘 말미를 주면서 주장을 취소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단죄하고 추방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은 물론 치릴로였습니다.

 

첼레스티노 1세 교황이 이단으로 로마에서 추방한 펠라기우스(350?~425?)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받아들인 적이 있어 그렇지 않아도 교황에게 밉보였던 네스토리우스는 이 결정에 따르지 않습니다. 더욱이 네스토리우스가 볼 때 치릴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죄받은 아폴리나리우스 이설의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공의회 소집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평화신문, 2011년 3월 20일, 이창훈 기자]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7) 에페소 공의회 (431년) (하)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인정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인정한 에페소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간의 힘 겨루기 등으로 얼룩진 공의회였다. 사진은 성모 마리아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에페소 성모 마리아집 강당 제대와 마리아상. 평화신문 자료사진.

 

 

공의회 소집과 진행 과정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0년 11월 19일 제국내 모든 관구장 대주교들에게 회람을 보내 431년 성령 강림 대축일(6월 7일)에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통보했습니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명의로 소집 통보가 전달됐습니다. 오늘날 터키 이즈미르에서 70여㎞ 떨어진 곳에 있는 유적지인 에페소는 당시에 번창하던 항구 도시였지요. 지금은 폐허가 된 채 유적만 일부 남아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이 회의 장소였습니다. 교황 첼레스티노 1세는 사절들을 파견하면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와 뜻을 같이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치릴로는 그만큼 교황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던 셈입니다.

 

공의회는 예정보다 보름 정도 늦어진 6월 22일에 개막해 첫 회의를 열었습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을 대표로 하는 네스토리우스 측 주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가 의사봉을 잡고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일부 주교들이 반발했지만 치릴로를 따르는 다수파에 의해 묵살됐습니다. 참석 주교는 처음에는 160명이었는데 저녁에는 198명으로 늘었습니다. 대부분이 치릴로를 지지하는 편이었습니다. 교부들은 니케아 신경을 낭독한 후 치릴로와 네스토리우스가 벌인 논쟁을 차례로 검토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느님이자 영혼과 육신을 갖춘 온전한 인간이라는 치릴로의 주장이 니케아 신경에 부합하다고 인정하면서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합니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을 비롯해 네스토리우스 지지파 주교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사절인 칸디디아누스는 공의회 결정 사항과 반발하는 네스토리우스의 보고서를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을 비롯한 주교 43명은 뒤늦게 도착해 6월 27일 자기들끼리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대립 공의회인 셈이지요. 이들은 거꾸로 치릴로와 에페소 주교 멤논을 제명하고는 그 결과를 황제에게 통보합니다. 황제는 이 대립 공의회에 손을 들어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치릴로 편인 교황 사절 3명이 7월 10일 뒤늦게 에페소에 도착하면서 회의가 속개됩니다. 7월 31일까지 모두 7차에 걸쳐 회의가 열립니다. 이를 통해서 공의회는 △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후계자인 로마 주교가 주교들의 으뜸이며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요한과 추종자들이 개최한 대립공의회는 무효이고 △ 니케아 신경에 아무것도 보태서는 안 되며 △ 오류를 범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를 재확인합니다.

 

비록 네스토리우스 쪽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한 것은 대립을 종식하고 일치를 도모한다는 명분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에페소 공의회는 오히려 분열된 공의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공의회에서 내린 결정을 모두 무효화하면서 안티오키아 주교들 없이 독자적으로 공의회를 진행한 치릴로와 에페소 주교 멤논은 물론 네스토리우스까지 체포하면서 네스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에서 파면합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칼케돈에 모여서 다시 토론을 벌이지만 소득 없이 끝납니다. 마침내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9월 11일 에페소 공의회의 폐회를 선언하고 치릴로를 제외한 주교들에게 자기 교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공의회 이후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치릴로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갑니다. 반면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서 쫓겨난 후 안티오키아 근처 수도원에서 지내지요.

 

그러는 사이 교황 첼레스티노 1세는 432년에 선종하고 후임 식스토 3세가 새 교황에 오릅니다. 새 교황과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치릴로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네스토리우스로 대표되는 안티오키아 학파간의 대립과 논쟁을 종식시키고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치릴로를 따르는 알렉산드리아 측과 요한을 따르는 안티오키아 측 간의 화해를 주선합니다. 오랜 절충 끝에 433년 4월 마침내 합의가 이뤄집니다.

 

안티오키아 주교들은 에페소 공의회를 따라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를 받아들입니다. 또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그리스도는 단일한 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간성을 다 갖추고 있다는 공의회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반면 치릴로는 에페소 공의회 선언에 그리스도가 온전한 인간성을 지니지 않은 것처럼 오해를 살 수 있는 개인적 주장을 덧붙이지 않기로 합니다.

 

이렇게 격렬하게 대립하던 두 교회 혹은 두 학파 간 평화가 일단 회복됩니다. 하지만 불안한 평화였습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근처 수도원에서 아라비아로, 그곳에서 다시 이집트로 쫓겨갑니다. 그를 추종하던 이들은 페르시아에서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웠고, 이 교회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중국에까지 전파됩니다. 이 교회를 경교(景敎), 혹은 대진경교라고 하지요. 대진(大秦)이란 로마 제국을 가리킵니다. 중국에는 당나라 때인 635년에 전파됐다가 원나라 때인 14세기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공의회에 대한 평가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문제가 발단이 된 에페소 공의회는 이 문제를 진지하고 지혜롭게 다루기보다는 치릴로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네스토리우스로 대표되는 안티오키아 학파 간의 대립과 갈등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공의회가 끝났지만 실질적 소득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입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에페소 공의회 자체보다는 공의회가 끝나고 나서 타협을 이끌어낸 433년의 결정이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페소 공의회는 교리적 면에서 중요한 진전을 했습니다. 성자의 신성을 확인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와 이를 재확인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명시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이어 에페소 공의회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합쳐졌다는 교의를 확립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교리를 좀 더 명확하고 확실하게 명료화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불과 20년 후에 공의회가 다시 열리게 된 것과도 무관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3월 27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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