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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작 탐방에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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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2-06 ㅣ No.88

[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사랑만이 진리를 깨닫는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작 탐방에 나서며

 

 

히포 주교관의 서재

 

“서기 398년 11월 13일. 그날 밤에도 히포의 부두에서는 고기잡이배들이 뱃머리를 맞부딪치는 품이 흡사 입맞춤을 하는 모습이었다.

 

여기는 주교관, 수도원다운 품위를 갖춘 널따란 저택. 나이 마흔쯤 되는 수도자 한 사람이 자기 방에서 등잔에 기름을 넣고 있었다. 밤에 글을 쓰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손가락으로 양피지 낱장을 하나 집어 필사상 위에다 손바닥으로 쓰다듬듯이 눌러서 폈다.

 

그의 문장은 시위를 떠난 살촉 같은 느낌을 자주 주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바를 하라!’ 짤막한 몇 마디는 대장간 화덕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불똥처럼 작열하는 것이었고 그 화덕은 결코 식을 줄을 모르는 것같았다.”

 

크레모나 신부의 「성 아우구스티누스傳」(성염 역, 바오로딸, 1992년) 첫 대목이다. 그리스도교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방대한 저작을 남긴 아우구스티노의 저술 활동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필자도 이 위대한 교부가 라틴어로 써놓은 그 많은 저서들 가운데 일부나마 우리 독자들에게 옮겨놓는 일에다 여생을 바치고 있지만, 그의 저서는 실로 방대하다.

 

세례 전후에는 그리스 로마 철학의 주제들을 소화시키려는 대화편들이 집필되고, 이어서 마니교와의 논쟁서들이 나타나며 후기에는 펠라기우스파와 은총론을 다투게 된다.

 

성서 연구서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단행본만도 100권이 넘는다. 「강론집」과 「시편 강해」와 「서간집」도 엄청난 분량이다.

 

아우렐리오 아우구스티노(Aurelius Augustinus), 그는 서기 354년(11월 3일) 당시 로마의 북아프리카 식민지 누미디아(지금의 리비아) 타가스테에서 그 지방의 관리 파트리키우스와 독실한 그리스도 신자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정치사의 한 기적으로 꼽히는 ‘로마제국’ 말기, 문화사적으로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화가 쇠퇴하고 붕괴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그는 고전문학과 철학을 배웠고, 수사학 교수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당대에 풍미하던 사상계를 거의 섭렵하였다.

 

그 방랑은 영혼의 한없는 갈증을 풀어줄 만한 진리를 찾아가는 길이었고, 그가 신봉하던 마니교도들에게 충동질받아 울고불고 매달리는 어머니를 카르타고 항구에 속여서 떼어놓고 로마로, 밀라노로 출세 길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 386년 밀라노에서 “집어라! 읽어라!(Tolle! Lege!)”라는 전설적인 동요를 들으면서 깨달음을 얻고 그리스도교로 입문하여 이듬해 부활절에 성 암브로시오 주교에게서 세례를 받는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 사목자와 신비가, 참으로 모든 교부들에게 공통되는 자질을 갖춘 빛나는 모범”(바오로 6세 교황)을 얻게 된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열거하면서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셋을 꼽는다면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칸트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유럽연합’으로 구체화한 서구문화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두 강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면,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두 강이 합류하는 양수리에 해당한다.

 

그런데 철학서적을 읽을 적에 많은 독자가 느끼듯이, 지혜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의 글이 워낙 사변적이고 난해하여 아무리 지성을 비추는 밝은 빛이 거기서 비쳐 나오더라도 형광등의 차가운 불빛을 접하는 느낌이다.

 

그와 달리 교부 아우구스티노의 생애를 한마디로 간추린다면, 소설체로 엮어진 다른 전기의 제목 그대로 “한없이 타오르는 불길”(루이 드 월 지음, 조철웅 역, 가톨릭출판사, 1993년)이었다. 새빨간 혀를 넘실거리면서 무서운 기세로 열을 내뿜는 불꽃이었다. 그의 삶은 애오라지 진리에 대한 열애였다고 할만하다.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고 단언한다. 그의 나이 열여섯 살 고향을 떠나 카르타고로 갈 적부터 진리에 대해 골수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꼈다. 더구나 그 진리를 막연한 추상적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혼신으로 사랑할 인격체로 여기면서 “당신한테로 우리를 만드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안달입니다.”(「고백록」 1.1.1)라는 고백을 한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그 진리를 발견하였을 때에 그는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하고 선언하였고, 그의 나이 33세에 행한 이 언약을 그는 이후 44년간 수도자, 성직자, 영성가요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남김없이 충실하게 실천에 옮겼다.

 

그때부터 여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던 저 탄식, “오, 진리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오래고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고백록」 10.27.38)라는 글귀는 아우구스티노의 철학적 유언이 되었다. 어느 연인이 상대방에게서 이런 고백을 듣는다면 정녕 행복하리라.

 

 

인간이라는 심연

 

그의 초기 대화편 「독백」에는 이성과 아우구스티노 사이에 이런 대담이 오간다. “무엇을 알고 싶은가?” “하느님과 영혼을 알고 싶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가?” “전혀, 아무것도 없다”(1.2.7). 본인도 “인간이란 그 자체가 크나큰 심연”(「고백록」 4.14.22)이라고 고백했지만, 이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우구스티노의 평생의 과제가 되었다. 그에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었으므로, 모상인 인간을 알면 원형인 하느님, 그토록 신묘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 수 있고, 동시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야만 인생의 수수께끼가 풀린다는 신념이 생겼다.

 

철학자 누구나 진리를 추구하겠지만 진리가 인간 존재 전체를 세차게 끌어당기는 중력임을 아우구스티노만큼 생생하게 감지한 사상가도 보기 드물다. “물체는 제 중심 무게에 따라서 제자리로 기웁니다.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내가 끌려갑니다”(「고백록」 13.9.10).

 

여기서 그리스 철학 전통과 아우구스티노가 선도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갈림길이 생긴다. 그리스인들은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하였다.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진리를 아는 이는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는 영원을 압니다. 사랑이 그를 압니다.”(「고백록」 7.10.16)라는 깨달음, 곧 “사랑이 진리를 안다(Caritas novit veritatem).”는 위대한 인식론적 명제를 만들어냈다. 사랑하면 진실이 보인다!

 

뒷날 마르크스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서 진리가 보인다.”라고 설파하였고,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뜻에서 20세기의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사회교리의 근간으로 채택하였다.

 

이토록 진리의 연인으로서 살아간 위대한 교부의 저서들 가운데 필자가 번역을 마친 작품들을 독자들과 함께 읽어보는 기회가 주어져서 좋다. 교부의 삼부작에 해당하는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 같은 대작들은 물론 초기 대화편들도 펴서 함께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성염 요한 보스코 - 1986년 교황청 살레시오대학에서 라틴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역임했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 등의 저서와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 등 많은 역서, 「신국론」, 「자유의지론」 등의 아우구스티노 주해서를 냈으며, 수십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성염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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