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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로 보는 교회이야기2: 마태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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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4 ㅣ No.427

[지도로 보는 교회 이야기] (2) 마태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


당시 지리정보 · 자연과학 지식 총망라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된 마태오 리치는 처음부터 폐쇄적인 중국에 대해 커다란 벽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작한 세계지도가 중국인들에게 호응을 얻고, 동서양의 벽을 허무는데 큰 힘이 된다는 점을 터득하게 된다. 비록 선교활동의 수단으로 세계지도를 제작했지만 그가 남긴 곤여만국전도는 세계 지도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최초의 한문판 세계지도

 

1584년 제작한 세계 최초의 한문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

 

 

중국 선교를 위해 1582년 4월 마카오에 도착한 마태오 리치가 중국 본토를 밟은 것은 그 이듬해 9월, 지도에 관심이 많았던 자오칭(肇慶)의 지부(知府) 왕반(王泮)의 호의 때문이었다. 자오칭에 정착한 리치는 적응주의 차원에서 서방의 승려로 행세했으나 좀처럼 중국인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을 때 왕반의 요청으로 세계지도를 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뿌리 깊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리치는 서양 중심으로 된 세계지도를 변경하여 중국이 중앙에 위치하도록 지도를 만들고, 모든 지명을 한역(漢譯)하여 한자로 표기했다. 1584년 그가 처음 제작한 지도가 세계 최초의 한문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이다. 이 지도는 왕반이 직접 판각(板刻)한 것으로 중국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게 되자 리치는 중국인들과 교류하고 선교활동을 하는데 세계지도를 적극 이용하게 된다.

 

샤오저우(韶州), 난창(南昌)을 거쳐 1598년 난징(南京)에 정착하게 된 리치는 이름도 이마두(利瑪竇)라 짓고, 유학자 행세를 하며 많은 중국인들과 교분을 쌓아 갔다. 1600년 난징 이부(吏部)의 고관이던 오좌해(吳左海)의 요청에 따라 또 세계지도를 만들게 되는데, 먼저 제작한 산해여지전도보다 크기를 두 배로 늘리고, 그동안 익힌 중국어 실력을 발휘해 초판 때 잘못된 부분을 수정했으며, 이때 조선을 추가해 넣었다.

 

 

곤여만국전도의 제작

 

산해여지전도가 난징 이부에서 인쇄되어 널리 배포되자 중국인들 사이에 리치의 존재가 드러나게 됐고, 그렇게 염원하던 베이징으로 갈 수 있는 길도 열리게 되었다. 1601년 황제의 재가로 베이징에 정착하게 된 리치는 중국의 지식인들과 널리 교분을 갖게 되는데 가장 대표되는 인물이 공부(工部)의 관리인 이지조(李之藻)란 사람이다.

 

이지조는 리치가 제작한 세계지도를 세밀하게 분석한 후 리치의 지도제작법이 옳다는 결론을 내린 다음 리치에게 새로운 세계지도를 제작할 것을 요청한다. 리치가 편찬하고 이지조가 판각하여 1602년에 제작한 지도가 바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다. 이 지도는 전에 만든 산해여지전도보다 내용이 상세할 뿐더러 목판으로 인쇄해 대량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1602년 마태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 원본을 모사해서 채색한 지도.

 

 

이 지도는 전체 크기가 가로 414cm, 세로 179cm의 대형 지도로 6폭으로 나눠 제작됐는데 선교가 주목적인 리치로서는 중국인의 세계관에 동조해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배치하고, 지구의 중심이 되는 자오선도 베이징에 맞추는 배려도 서슴지 않았다. 지도의 전체적인 형태는 달걀모양의 타원체로 16세기경 유럽에서 세계지도 제작 시 많이 사용되었던 아피아누스 도법(Apianus projetion)을 적용했다. 이 도법은 1524년 독일인 아피아누스(Petrus Apianus)가 발표한 것으로 면적이 같은 정적도법(正積圖法)도 아니고, 메르카토르(Mercator) 세계지도처럼 정각도법(正角圖法)도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세계지도 제작의 선구적인 도법이랄 수 있다.

 

지도 편찬에는 주로 1570년 제작된 오르텔리우스(Ortelius) 지도와 1595년 발간된 메르카토르 지도첩 등 유럽에서 제작된 세계지도를 모본으로 이용했지만 동아시아 부분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수집한 중국과 조선, 일본 등의 지도를 참조했다. 더욱 이 지도는 지도뿐만 아니라 우주 · 천문 · 지리 · 지세 · 역법 · 자연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지리정보와 자연과학 지식까지 빼곡하게 기술하고 있어 이른바 백과사전 식 세계지도라 할 수 있다.

 

리치와 함께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한 이지조는 첩이 있다는 결점 때문에 세례를 받지 못하다가 1610년 리치가 병석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세례를 받았고, 리치가 죽은 뒤에도 20여 년 동안 중국교회를 위해 기여한 바가 커 서광계(徐光啓), 양정균(梁廷筠)과 함께 중국 천주교의 3대 기둥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양의현람도 제작

 

1603년 리치는 천주교 신자인 이응시(李應試)와 함께 또 다른 세계지도인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를 제작했는데, 이 지도는 곤여만국전도를 개정하여 판각한 것으로 6폭인 곤여만국전도보다 큰 8폭 짜리 초대형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는 1917년 영국의 작가인 바들리(John F. Baddeley)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지긴 했으나 정작 그 실물은 1936년경 우리나라에서 발견됐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이 지도는 세계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중국 요녕성박물관에도 한 본이 있다고 밝혀졌다.

 

중국 절강대학 양우뢰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숭실대학교 본은 가로 길이 444cm, 세로 길이 199cm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나, 요녕성박물관 본은 1949년 선양 고궁상봉각(瀋陽故宮翔鳳閣)의 병풍에서 떼어내어 괘도로 제작한 것으로 폭마다 가장자리 부분이 심하게 훼손됐고, 남아있는 부분도 지도의 내용이나 글자가 희미해 판독이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마태오 리치 사후에도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지도 제작과 지리서 편찬은 계속됐는데, 1610년 선교사로 중국에 들어온 알레니(Julio Aleni)가 선배 선교사인 판토하와 우르시스가 기록해 둔 자료를 모아 1623년 세계 인문지리서인 직방외기(職方外紀) 6권을 간행했고, 청대(淸代)에 들어서는 1659년 중국에 입국한 선교사 페르비스트(Ferdinandus Verbiest)가 1674년에 동서양반구도(東西兩半球圖)인 곤여전도(坤與全圖)를 제작했다. 이같이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제작된 세계지도와 지리서는 조선에도 전해져 조선인의 세계지식 발달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평화신문, 2011년 4월 10일, 최선웅(안드레아 · 매핑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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