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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길교구: 격동의 땅, 만주에 심어졌던 하느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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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10 ㅣ No.398

[연길 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특집 기사] 격동의 땅, 만주에 심어졌던 하느님 나라

 

 

과연 듣던 대로 만주滿洲는 광활했다. 보름 동안 다녔는데도 눈앞에 펼쳐진 벌판이 끝이 없었다. 만주는 중국의 동북 3성(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일대를 가리킨다. 만주는 우리의 선조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지만, 우리 민족이 반도半島 안에서 웅크리고 살게 된 이후 거란, 여진이라고 부르는 민족들이 차례로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명나라 말엽 누르하치가 여진의 각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우고, 산해관山海關을 넘어가 북경北京을 차지했다. 주인이 떠나버려 무인지경이 된 만주에 한족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하자, 1677년 강희제康熙帝는 조상들의 발상지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백두산과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천 여리를 봉금지封禁地로 선포하여 만주족 이외의 다른 민족이 만주에 이주하지 못하게 하였다. 벌목, 개간, 거주를 금지시켰는데, 진상용 특산물을 채취하는 경우에만 예외를 두었다. 1885년 청나라 정부가 봉금 정책을 폐지할 때까지, 근 200년간 만주는 사람의 손이타지 않은 땅이 되었다. 봉금령에 의해 만주가 무인지경으로 변하면서 변경수비 문제가 야기되었다. 남하정책을 펴 연해주沿海州를 확보한 러시아가 만주 동북부 지역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광서제光緖帝 치세에 만주가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쇠락해가던 청나라가 제국주의 열강들의 야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주는 일본, 러시아에 의하여 침탈당했고, 중앙정부의 정치적 공백을 이용하여 일어난 지역 군벌軍閥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만주는 공산주의 혁명을 꿈꾸는 빨치산과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항일 무장 투쟁 단체 또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마적 떼들까지 합세하여 그야말로 동북아시아의 웨스턴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었다.

 

이 격동의 땅에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발을 들여 놓은 해가 1921년이었다. 1920년 8월 설정된 원산元山 대목구代牧區의 선교를 위임받은 서울수도원 소속 수사신부들이 이듬해 5월 간도間島에 위치한 세 군데 본당(용정龍井, 팔도구八道溝, 삼원봉三元峯)에 주임신부로 파견되었다. 봉금령이 풀리기 전부터 조선인들은 간도에 살았다. 간도란 원래 함경북도 종성鐘城과 온성穩城이 바라보이는 두만강 북안北岸의 모래톱을 가리켰다. 1881년에 조선인들이 이 모래땅의 북쪽에 물도랑을 파고 두만강 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 후 큰물이 지면 물도랑이 작은 강이 되면서 이 모래땅은 두만강 사이에 낀 작은 섬이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 사람들은 이 섬을 ‘사이섬’, ‘낀 섬’이라 하여 간도間島 혹은 개간한 땅이어서 간도墾島라고 불렀다. 그런데 두만강을 넘어가 사는 조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간도란 지명이 화룡和龍, 연길延吉, 왕청汪淸 등도 가리키게 되었다. 동시에 압록강 이북에도 조선인 이주민이 증가되면서 또 다른 간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 볼 때 두만강 이북은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간도北間島로, 압록강 이북은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간도西間島로 구분하여 불렀다. 하여간에 간도는 조선 사람들이 개척했고, 일찍부터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1922년에 작성된 ‘동북3성 실황’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만주에는 650,588명의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북간도(화룡현, 연길현, 왕청현)에 살고 있던 조선 사람은 약 35만 명에 달했다.

 

원래 북간도는 조선 대목구 관할이 아니었다. 북간도는 만주에 설정되었던 만주 대목구 관할이었는데, 1898년 만주 대목구가 봉천奉天을 중심으로 한 남만南滿 대목구代牧區와 길림吉林을 중심으로 하는 북만北滿 대목구代牧區로 나뉘게 되었으니, 따지자면 북만 대목구 관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파리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이 북만 대목구로부터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사목을 위임받아 활동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1922년 3월 19일 교황청에서는 북간도를 새로 설정된 원산대목구로 편입시키고, 아울러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의 지류인 우수리강烏蘇里江 어귀까지(흑룡강성 의란依蘭 지역)의 선교를 베네딕도회에 위임하였다. 원산 대목구가 관할하게 된 지역은 약 20만 5천㎢(그중 북간도와 의란지역은 15만 2천㎢)에 달하여 조선 전체(약 21만㎢) 면적과 비슷하였다. 오딜리아 연합회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지역은 동아프리카를 대신할 선교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이 식민지였던 동아프리카를 영국에 빼앗기고, 독일 선교사들의 활동이 제약받자, 새로운 선교지 확보 차원에서 원산 대목구의 관할 구역을 넓게 확보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동아프리카 문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지만, 아무튼 새로 마련된 선교지는 넓고 황량한 만주 북동쪽의 초원지대였다. 이 지역은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북쪽으로는 기차들이 매서운 폭풍우를 안고 질주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경계 지어있었다. 이 땅에는 여러 민족이 섞여서 살고 있었다. 토박이였던 만주족과 몽골족,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한족, 빈곤과 비좁은 국토 때문에 이주해온 조선족, 또 이 땅에 눈독을 들인 일본인, 러시아 혁명으로 고국을 등진 백계白系 러시아인들, 반면에 혁명사상을 널리 퍼뜨려 불붙이려는 러시아인 공산당원들을 포함하여 97만 5천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천주교 신자는 7천 5백여 명의 조선인과 1천 4백여 명의 중국인에 불과했다.

 

1922년 12월 5일 북간도의 행정 중심지였던 연길延吉(=국자가局字街)에 선교 본부가 차려졌다. 서울 수도원의 분원이면서 동시에 중국인 선교를 위한 본당이었다. 1925년 여름 테오도로 브레허(Theodor Breher, 白化東, 1889-1950) 신부가 분원장으로 임명되어 만주 지역 선교를 책임지게 되면서, 선교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즈음 기존의 조선인 본당에서는 성당, 사제관이 신축되고 학교가 설립되었고 새로운 본당이 연이어 설립되었다. 1923년 4월에 훈춘현琿春縣 팔지八池(훗날 육도포六道泡)에, 1924년 6월에는 훈춘에 본당이 들어섰다. 신자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지만 중국인 선교도 같이 이루어졌다. 같은 해 7월에는 선교지 최북단에 위치한 부금富錦에, 1926년 6월에는 돈화敦化에, 같은 해 가을에는 의란 지역에 위치한 가목사佳木斯에 본당이 차례로 들어섰는데, 이 본당들은 중국인 본당이었다. 선교활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갔고, 본당수와 신자수가 증가하자, 1928년 7월 19일 교황청은 간도 지역을 원산 대목구에서 분리시켜 연길延吉 지목구知牧區로 설정하였다. 이듬해 2월 5일 초대 지목구장으로 테오도로 브레허 신부가 임명되었다. 1928년 7월 3일 의란 지역이 독립포교지(원산 대목구에서 관리하다가 1935년 9월 1일 티롤의 카푸친 수도회 북부 관구로 위임됨)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선교지는 북간도로 좁혀졌다. 연길 지목구는 간도성間島省의 화룡현和龍縣, 훈춘현琿春縣, 연길현延吉縣, 왕청현汪淸縣과 길림성吉林省의 돈화현敦化縣, 액목현額穆縣과 빈강성濱江省의 영안현寧安縣, 동영현東寧縣, 목단강현牧丹江縣 등 총 9개현을 관할하면서 8개 본당, 12,517명의 신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은 단지 사목에만 그치지 않았다. 오딜리아 연합회의 한국진출 목적이 교육 사업을 통한 선교였으므로, 그들은 설립하는 본당마다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유럽에서 시작한 전례운동을 받아들여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깨우쳤으며, 아울러 청소년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 가톨릭 청년들을 규합하고 그들을 위한 잡지를 간행했다. 본당에서는 성직수사들이 사목활동에 투신하였고, 연길 수도원의 수사들은 자기들의 특기를 살려 선교활동을 도왔다. 건축, 인쇄, 철공, 재봉, 요리 등 다양한 봉사를 악조건 속에서도 수행하였다. 1931년 스위스캄Cham에 있는 성 십자가 수녀원에서수녀들이 파견되어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였다. 그들은 연길에 수녀원을 세워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현지인 수도자를 양성했다. 한편 여러 본당에 지원支院을 설립하여 선교에 직접투신하기도 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시약소를 운영하고, 부녀자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934년 8월 1일 선교 본부였던 연길 수도원이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으로 승격되고, 테오도로 브레허 신부가 아빠스로 임명되면서, 선교활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연길 수도원은 선교활동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수도생활의 중심지로서 그리스도교적 이상을 수도자들의 삶과 인격을 통해서 드러내는 배움터가 되어야 했다. 본당에 있는 신부들은 정기적으로 수도원에 모여 회합을 갖고 피정을 했다. 연길 수도원은 본당에서 사목하다가 지친 신부들이 육체적으로 쉬고 회복할 수 있는 안식처였다.

 

연길 지목구 설정 후 북간도 지역의 선교는 구체적인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북간도에 천주교 신앙이 전래된 지 40년이 되던 1936년에 북간도 천주교회는 본당 15개소, 공소 84개소, 학교 11개소, 학원 및 야학 6개소, 유치원 2개소, 병원 및 시약소 3개소, 신자수 13,627명으로 이루어진 큰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이런 성과로 말미암아 연길 지목구는 1937년 4월 13일 대목구代牧區로 승격되었고, 외적 발전의 정점을 이루었다. 대목구는 정식 교구敎區는 아니지만, 통상 명의名儀 주교主敎가 대목구장을 맡아 교황의 이름으로 신자들을 돌보는 교계제도이다. 그러므로 대목구가 설정되었다는 것은 개별 교회로서의 체계가 거의 다 갖추어졌다는 의미이다.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테오도로 브레허 아빠스가 1937년 9월 5일 히에리타누스Hieritanus의 명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대목구로 설정된 지 10년이 채 못 되어, 중국 교회에 교계제도가 설립되면서 1946년 4월 11일 연길 대목구는 19개 본당의 1만 8천여 명의 신자를 돌보는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다.

 

겉으로 보면 순탄한 발전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는 만주사변滿洲事變, 중일전쟁中日戰爭,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험난한 역사의 장에서 선교사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값진 결실이었다. 사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만주에서 활동했던1920-1940년대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던 혼란한 시기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지고,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만주를 집어삼켰다. 그 이듬해 관동군은 이미 퇴위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데려다 옹립하여 만주국滿洲國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만들었다. 만주국은 이상한 나라였다. 헌법도 없고, 정식 국민도 없는 나라였다. 만주국 건국 선언에는 ‘새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한족, 만주족, 몽골족, 대화大和족(일본), 조선족 외에도 장기적으로 거주를 원하는 모든 타국사람은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지만, 누가 만주국 국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만주국은 다섯 민족(만주, 몽골, 한, 대화, 조선)을 화합시켜 왕도가 넘치는 낙원으로 만들겠다(以五族和合 建設王道樂土)는 국시를 세웠다. 더욱이 이 정권을 승인한 나라도 일본,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와 바티칸 시국을 비롯한 8개국 밖에 없었다. 나라꼴이 이러니 행정, 치안, 경제 상황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관동군 수뇌부가 실제적으로 만주국을 주무르고 있었지만, 만주 구석구석에는 마적떼가 들끓었고, 공산 빨치산이 설치고 다녔다. 영화에서 나오듯이, 그들은 열차를 습격하기도하고, 때때로 교우촌을 약탈하여 성당이나 공소를 태워버리기도 했다. 테오도로 브레허 아빠스는 “파편, 잿더미, 검게 타버린 벽돌담, 살해된 신자들의 앙상한 뼈… 이러한 비참한 모습이 오늘날 선교의 상像입니다.”라고 쓴 편지글로써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당시 선교사들의 입에서 만주가 ‘하느님이 버린 땅’이라는 소리가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만주국이 무너진 다음에도 고통의 시련은 끝이 나지 않았다. 어렵사리 세워지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는 관동군을 물리치고 만주의 새 주인이 된 소련군의 발에 짓밟혀졌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길림성에 수립된 공산정부가 1946년 5월 20일 연길 수도원을 폐쇄하였고, 선교사들에게 나치주의자, 일본의 협력자라는 죄목을 씌워 두만강 가에 위치한 남평南坪이라는 마을에 수용하였다. 선교활동은 사실상 금지되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세워지면서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1949년부터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추방되기 시작했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1952년 8월 만주를 떠났다. 1921년에 만주에 들어온 그들은 한 세대를 보내고 다시 되돌아간 셈이다. 한 세대 동안 그들은 용광로 같이 들끓었던 만주 땅에서 마음이 착한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무력과 폭력, 기만과 위선이 판치던 그 시대, 그들은 평화와 정의가 싹트기를 바라며, 정성껏 하느님 나라 한 자락을 만주 땅구석에 일구었다. 그들이 일군 땅에서는 조선인, 중국인, 만주인, 심지어 그들을 억압하고 괴롭혔던 일본인조차도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되어 화목하게 살아갔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도’라는 모토를 가슴에 품고 고향을 떠나 극동의 땅으로 온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선교사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일구었던 하느님 나라는 결실도 맺기 전에 꺾였지만, 온 민족을 화합시켜 하느님의 도가 넘치는 낙원을 건설하고자했던 그들의 이상은 아직도 그 땅 어디엔가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분도, 2008년 가을호, 글 편집부, 사진제공 역사자료실, 송대석 후고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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