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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로 보는 교회이야기3: 리치의 세계지도가 조선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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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5 ㅣ No.428

[창간 84주년 기획 - 지도로 보는 교회 이야기](3) 리치의 세계지도가 조선에 미친 영향


조선, 중국 너머의 세계 알게 되다

 

 

400여년 전 마태오 리치의 한문판 세계지도가 조선에 전해지면서 중국 밖에도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이 인식되고, 세계 지식의 계몽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리치는 지도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명과 지리용어를 한자로 번역했는데, 우리 일상에 쓰이고 있는 지구(地球)나 경위선(經緯線) · 적도(赤道) · 회귀선(回歸線) 등의 표현도 그의 지도로 인해 생겨난 지리용어이며, 한자로 표기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조선에 전해진 곤여만국전도

 

북경 최초의 성당인 남당(南堂) 입구에 세워진 마태오 리치 신부 동상. 사진제공 · 김상진 신부(성 베네딕도회)

 

 

1602년 마태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의외로 그 이듬해인 1603년(선조 36년)이다. 이 같은 사실은 실학파의 거두 이수광이 1614년에 편찬한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만력 계묘년 내가 부제학의 자리에 있을 때 중국 수도에 갔다가 돌아온 사신 이광정(李光庭)과 권희(權憘)가 구라파국의 여지도(곤여만국전도를 이름) 1건 6폭을 본관에 보내왔다. 아마 경사(北京)에서 구득한 지도일 것이다.”

 

현재 기록상 곤여만국전도의 판본이 남아있는 것은 총 9종으로 알려져 있으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로마의 바티칸박물관과 일본의 미야기현립도서관(宮城縣立圖書館), 교토대학도서관(京都大學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는 3점뿐이다.

 

우리나라에는 서울대학교박물관에 한 본이 소장돼 있는데, 이 지도는 1708년 숙종의 어명으로 관상감 이국화(李國華)와 류우창(柳遇昌)이 주도하고 어용화사였던 김진여(金振汝)가 중국에서 제작된 지도를 참조하여 그린 채색모회본(彩色摹繪本)으로 지도의 여백에 범선과 어류, 이상한 동물 등이 그려져 있어 회입(繪入)곤여만국전도라 불린다.

 

몇 해 전, 서울대학교박물관 본이 경기도 광릉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봉선사 측에 따르면 이 지도는 왕실에서 하사한 건상곤여도(乾象坤與圖) 병풍으로 한국전쟁 때 분실돼 행방을 알 수 없었으나 80년대에 일본에서 발견된 후 서울대학교에 보관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측에 따르면 이 지도는 1930년대부터 박물관이 소장해 온 것이고, 봉선사 본은 한국전쟁 때 유실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세계 유일본 양의현람도

 

목사이자 고고학자인 김양선(金良善)의 논고에 따르면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가 조선에 들어오게 된 경위는 선조 때 크게 등용됐던 황여일(黃汝一)의 아들 황중윤(黃中允)이 1604년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손에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 집안에서는 명나라 조정의 하사품이었다고 하나 황중윤의 연행록(燕行錄)에는 북경에서 구득한 것이라고 간단히 기록돼 있다.

 

고고학자 김양선이 지켜낸 세계 유일본 양의현람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양선은 이 지도를 땅에 파묻고 피난길에 나서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뜻밖에도 이 지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36년대 이르러서다. 강원도 강릉에 본관을 둔 평해 황씨 종가에서 300여 년간 비장돼 오던 이 지도를 황씨 집안의 종손인 황병인(黃炳仁)이 밝혀냈는데,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그는 방학을 맞아 집에 와있던 중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물건을 열어보니 ‘兩儀玄覽圖(양의현람도)’라 표제가 붙은 세계지도였다고 한다.

 

이 지도의 진가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까지 들고 간 그는 스승이자 동서문화교류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시다 미키노스케(石田幹之助) 교수에게 고증을 부탁했다. 이에 교수는 고지도 연구가인 아유자와 신타로(鮎澤信太郞)를 소개했고, 1936년 아유자와가 이 지도를 소개하는 글을 학계에 발표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광복 직후 양의현람도는 황병인의 호의로 김양선 목사가 운영하는 기독교박물관에 소장하게 됐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 목사는 이 지도를 박물관 뜰에 파묻고 피란길에 올랐다.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되어 돌아 와보니 박물관 소장품은 대부분 소실돼 없어졌으나 땅속에 묻어 뒀던 양의현람도만은 온전했다고 한다.

 

 

리치 신부가 조선에 끼친 영향

 

곤여만국전도의 내용을 조선에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은 실학자 이수광이다. 그가 편찬한 「지봉유설」 권2 ‘제국부(諸國部) 외국(外國)’ 조에 보면 “… 지도를 보니 매우 정교하게 그려져 있는데, 특히 서역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지방과 조선 8도, 일본 60주의 지리에 이르기까지 멀고 가까운 곳, 크고 작은 곳을 기재해 빠뜨린 데가 없다. 이른바 구라파국은 서역에서 가장 동떨어진 먼 곳에 있는데 그 거리가 중국에서 8만 리나 된다. 구라파는 오랫동안 중국과 통하지 않다가 명나라 때 비로소 입공(入貢)했다. … 구라파 땅의 경계는 남쪽은 지중해에 이르고, 북은 빙해에 이르고, 동쪽은 대내하(大乃河)에 이르고, 서쪽은 대서양에 이른다. 지중해라는 바다는 이것이 바로 천지의 한가운데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라 한다”라고 이 지도를 보고 느낀 점을 소상히 적고 있다. 또 마태오 리치에 대해 언급하며 「천주실의(天主實義)」의 저작과 천주교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중기의 문신 김만중(金萬重)은 그가 펴낸 「서포만필(西浦漫筆)」에 곤여만국전도에 실려 있는 서양의 지구 설을 소개하면서 당시 지구 설을 믿지 않는 학사 대부들을 우물 안 개구리라고 비판했고,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李瀷)도 서학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마태오 리치의 세계지도와 「기하원본(幾何原本)」, 「천주실의」 등을 섭렵했으며, 그의 제자인 안정복(安鼎福) 역시 지구의(地球儀)용 세계지도를 만들면서 리치의 세계지도를 이용했다.

 

이같이 곤여만국전도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알려지면서 이 세상에 중국보다 더 넓은 세계가 있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한 태평양과 새로운 땅인 아메리카 대륙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해마다 조정에서 파견하는 북경 사행(使行)을 통해 전래된 서양에 관한 지식과 문물은 종래의 지리적 중화관에 젖어있던 조선 사회에 커다란 자극이 됐고, 점차 서구 문명을 수용하고 연구하는 서학(西學)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조선 사회의 폐쇄성 때문에 일찍이 전래된 세계지도가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그 지식이 확산되지 못한 점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17일, 최선웅(안드레아 · 매핑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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