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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868년 남연군묘 도굴사건과 조선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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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13 ㅣ No.1388

1868년 ‘남연군묘 도굴사건’과 조선 신자*

 

 

국문 초록

 

이 글은 1868년에 발생한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참여한 조선인 신자가 누구이며, 이들이 왜 원정에 참여했는지를 정리한 것이다.

 

남연군묘를 도굴하기 위해 오페르트 일행이 상해를 떠난 것은 1868년 5월이었다. 이때 상해에 머물던 조선인 신자는 최선일, 심순여, 김학이(김여경), 송운오, 박복여, 이성집, 이성의 등 7명이었다. 이들 중 최선일 · 심순여 · 김학이 등 6명이 페롱 신부와 함께 오페르트의 원정에 참여했고, 그중 2명은 덕산에서 도망하였다. 최선일 · 심순여 · 김학이는 병인양요 때에도 향도 역할을 하였다.

 

상해에서 페롱 신부와 동행한 신자들 외에 김여강과 이돈호 등 덕산에서 오페르트 일행과 접촉한 신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페롱 신부가 조선에서 사목할 때 인연이 있던 신자들이었다.

 

1866년에 중국에 갔던 신자들은 ‘서양의 힘을 이용하여 박해를 종식시키고, 나아가 신앙의 자유까지 획득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병인양요가 바로 그러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군사력을 이용한 방법은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하였다. 게다가 박해가 장기화되면서 상해의 선교사와 신자들 중에는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계획된 극단적인 방법이 바로 ‘남연군묘 도굴사건’이었다.

 

도굴 계획과 관련해서 상해에 있던 신자들은 처음부터 이 계획에 찬성한 부류, 나중에 설득된 부류, 끝까지 반대한 부류가 있었지만, 찬성한 부류의 선택이 조선 신자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1. 머리말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되었는데, 이 박해 기간 중 가장 많은 신자가 희생된 해가 1868년이었다.

 

1868년에는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 1832~1903) 일행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있었다. 오페르트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상인으로, 1851년(19세)에 이미 홍콩에 와 있었고, 이후 상해에 상점을 열고 무역업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다.

 

오페르트는 1866년 2월(음)과 6월(음)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하여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에 페롱(S. Féron, 1827~1903) 신부의 제안을 받고 4월(음)에 3번째 조선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페롱 신부가 오페르트에게 했던 제안은 ‘덕산 가야동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파서 그 부장품을 가지고 흥선대원군과 거래를 하면, 조선과의 조약이 성사되어 조선을 개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쇄국정책을 통해 외국과의 통상과 교류를 금지하던 조선의 개방은 페롱 신부와 오페트르 모두에게 절실한 문제였다. 페롱 신부는 병인박해로 많은 선교사와 신자들이 희생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희생을 막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이 원정을 계획했고,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상업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조선의 개방이 필요하였다. 이런 점에서 양자의 이해는 일치했고, 그 결과 조선 원정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박해만 격화시켜 병인박해 기간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배출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남연군의 묘가 침범되었다는 사실은 충청 감사와 수사에 의해 4월 20일 중앙에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조정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때 고종은 “바다 밖의 서양놈[洋醜]들이 어떻게 길을 알아서 거침없이 쳐들어 왔겠는가? 필시 우리나라의 간사한 무리들 가운데 그들을 부추기고 길을 인도한 자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영의정 김병학도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 사람이 부추기고 호응한 결과”라고 생각했다.1) 이에 ‘서양인들을 부추기고 호응한 천주교인들을 남김없이 처단하여 소멸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 결과 이 시기에는 배교한 신자들까지도 처형할 정도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하였다. 실제 병인박해기에 체포된 신자 중 1868년에 체포된 사람이 750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중에서도 도굴사건으로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4월 21일 이후 약 한 달 동안 체포된 신자가 199명으로 제일 많았다.2)

 

고종과 대신들의 인식처럼 상해에서 덕산까지 오페르트 일행을 이끈 조선인 신자들이 있었다. 이들에 대해 오늘날에는 ‘최선일(최지혁)3) 등 몇 명의 조선 교우’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최선일뿐만 아니라 다수의 신자가 동행했고, 덕산에서 이들 일행과 접촉한 신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1868년에 처형되었다.

 

그렇다면 최선일과 동행한 신자들은 누구였으며, 이들은 왜 원정에 참여했을까? 그리고 덕산에서 이들과 접촉한 신자들은 또한 누구였을까? 지금까지 이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으며, 오히려 잘못된 명단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아마 연구자들의 관심이 오페르트, 선교사(페롱 신부), 조선 정부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한다.4)

 

물론 ‘남연군묘 도굴사건’에서 오페르트, 페롱 신부, 조선 정부는 사건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조선인 신자들도 이 사건과 관계가 매우 깊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기존의 연구에서 거의 배제되었고, 이에 참여한 인원조차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지금까지 덜 주목했던 신자의 입장에서 이 사건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즉 조선인 신자 중에 ‘누가, 왜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참여했는지’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이 기존의 연구 성과를 보완하여 ‘남연군 도굴사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중국에 체류하던 조선 신자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대해 1962년에 간행된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공주 출신인 최선일(요한) 등 몇 명의 조선인 교우가 동행했다.’고 하였고,5) 같은 해에 간행된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6) 그리고 196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고종시대사』의 ‘고종 5년 4월 21일’ 항목에는 “신자 최선일 등을 선도(先導)로 하여 기선 차이나(China)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공충도 홍주군 행담도에 내박(來泊)했다.”라는 내용이 있다.7) 대체로 복수의 신자들이 참여했음을 언급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인명은 최선일만 거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선일과 함께 최인서 · 이영중이 동행했다는 연구도 있다.8) 그러나 이영중은 오페르트와 함께 온 것이 아니라 내한한 그들을 만난 사람이며,9) 최인서는 1867년 8월에 상해에서 이미 귀국했기 때문에 1868년에 오페르트와 동행할 수는 없었다.10) 그리고 최선일 등 천주교도 4명이 참여했다는 연구도 있으나,11) 이 역시 후술하는 바와 같이 사실과 다르다.

 

이처럼 오페르트와 동행한 조선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견해들이 있지만,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인물은 최선일이었다. 그렇다면 최선일을 언급하는 근거는 무엇이며, 최선일과 동행한 복수의 조선인들은 누구였을까?

 

이에 관한 내용은 1871년에 체포된 김여강(金汝江)의 문초 기록에 나온다. 그리고 이 기록은 유홍렬의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에 이미 소개되어 있다.12) 그러나 김여강이 진술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그동안 거의 활용되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 자료를 소개한 유홍렬조차도 자신의 저서에 “최선일(요한) 등 몇 명의 조선인 교우가 동행했다.”고만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 내용을 다른 연구자들이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오늘날 오페르트와 동행한 신자로는 최선일만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여강의 진술을 보면, 오페르트의 원정 때 동행한 조선인 신자는 최선일 외에, 심 실우와 김 베드로가 있었다. 그렇다면 심 실우와 김 베드로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들 외에 동행한 다른 신자들은 없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오페르트가 원정할 당시 상해에 있었던 조선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해에 있었던 조선인들과 관련된 내용은 장치선, 김창실, 김계쇠, 최인서, 최선일의 문초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1868년에 체포된 장치선은, 1866년 5월 17일(양 6월 29일)에 자신과 윤치성, 심순여, 이성의, 이성집, 박복여, 송운오, 최인서, 김영희, 최선일 등 10명이 리델 신부와 함께 신창현 용당리13) 포구를 떠나 5월 25일(양 7월 7일)에 체푸(煙台)에 도착했다고 진술하였다.14)

 

리델 신부는 체푸에서 8월 중순까지 머물렀다. 그사이 조선에서 함께 온 신자 중 8명은 귀국하고, 나머지 3명은 리델 신부와 함께 상해로 거처를 옮겼다.15) 이것으로 보아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할 때 동행한 신자는 11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16)

 

그런데 1871년에 체포된 김창실의 진술은 장치선과 달랐다. 즉 김창실은 자신과 장치선, 윤치성, 박복여, 강모, 김모, 백가, 최경유의 삼촌(최선일)17)이 신창 포구를 떠나 요동반도의 장하구(長夏口)로 갔고, 그곳에서 이미 와 있던 최인서와 김여경을 만났다고 하였다.18)

 

그렇다면 장치선과 김창실의 기록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유홍렬은 장치선의 진술에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즉 그에 의하면 병인년 당시 신자들은 두 차례 리델 신부와 중국으로 갔는데, 첫 번째는 5월에 리델 신부를 탈출시킨 것이고, 두 번째는 병인양요 후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였다.

 

장치선은 두 차례 모두 관여했다. 그런데 그의 진술이 병인양요 때 합류한 김계쇠·최인서의 진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장치선이 두 번째 일을 첫 번째 일로 착각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리델 신부가 탈출할 때 중국으로 간 인원은 김창실이 진술한 명단이 맞으며,19) 이들 중 김창실 · 장치선 · 윤치성 · 박복여 · 최인서 · 김모 · 강모 · 백가 등 8명이 귀국하고, 최선일 · 심순여 · 김여경 등 3명이 상해에 남았다고 하였다.20) 상해에 남은 3명은 병인양요 때 향도로 참여한 세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면 확인할 수 있다.

 

 

 

 

〈표 1〉의 김창실과 최인서의 항목을 보면, 김창실은 1866년 8월에 조선에 온 심순여와 최경유의 삼촌(최선일)을 만났고, 최인서는 9월에 강화에서 리델 신부와 최선일을 만났다고 했다.23) 따라서 병인양요 때 물길 안내를 맡은 3명의 조선인 중 2명은 최선일과 심순여가 확실하다.

 

다음으로 김계쇠는 1866년 9월 영종포에서 리델 신부를 만났을 때, 심순여 · 김학이 · 최선일 · 최인서가 프랑스 군함에 타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들 중 심순여와 최선일은 물길 안내인이 분명하므로, 나머지 안내인은 김학이와 최인서 중 1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최인서는 강화도에서 리델 신부 일행과 합류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병인양요 때 리델 신부와 동행한 조선인 3명은, 유홍렬이 상해에 남았다고 한 최선일 · 심순여 · 김여경(김학이)24)과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최인서를 3명의 물길 안내인 중 1명으로 거론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겠다.25)

 

병인양요 때 3명의 신자와 함께 온 리델 신부는 체푸로 돌아갈 때는 10명의 조선인과 함께 갔다. 이때 합류한 7명은 최인서 · 장치선 · 김계쇠 · 송운오 · 박복여 · 이성집 · 이성의였고, 이 중 최인서 · 장치선 · 김계쇠는 1867년 5월에 상해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 결과 1867년 5월 이후 상해에는 최선일, 심순여, 김학이(김여경), 송운오, 박복여, 이성집, 이성의 등 7명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체포된 장치선이 1868년 4월 18일에 이들에 대해 진술하면서,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7명의 체포와 송환을 요청하였다.

 

조선 정부는 도굴사건 직후인 1868년 윤4월 16일에 청의 예부에 자문(咨文)을 보내, ‘1868년 4월에 체포된 장치선이 최선일, 김학이, 심순여, 이성집, 이성의, 박복여, 송운오 등 7명이 상해와 연대 지방에 머물러 있다고 진술했으니, 그들을 체포하여 조선으로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26)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청에서는 상해와 연대(煙台)에 머물던 조선 신자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① 상해 소동문(小東門) 밖에 삼덕(三德)이라는 외국 교당이 있다. ② 동치 5년(1866)에 어떤 서양인이 조선에서 상해로 왔는데, 조선인 9명을 데리고 와서 함께 그 교당에 거주하였다. ③ 금년(1868) 봄에 교당 서양인이 조선인 2명과 함께 배를 타고 조선으로 갔다가 상해로 돌아왔다고 들었다. ④ 윤4월에 그 서양인이 다시 조선인 6명과 함께 서양 선박을 타고 연대로 갔다가 왔다.’27)

 

이 중 ②의 내용은 병인양요 이후 상해로 온 10명의 신자를 말하는 것 같고, ③의 경우는 시점상 페롱 신부가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참여한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페롱 신부가 2명의 조선인과 조선에 갔다 왔다는 것은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페롱 신부가 조선으로 떠날 때 상해에서 배웅한 마르티노 신부28)의 서한(1868년 5월 21일 자)에는 조선인 6명이 동행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다.29) 따라서 2명이라는 인원수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④의 기록은 ‘남연군묘 도굴사건’ 이후의 동향이다. 당시 조선인 6명이 상해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통해 도굴사건 이후에도 신자들이 상해와 연대를 왕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당시 조선으로 가는 출발지가 연대였기 때문에 자주 연대를 방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볼 때, 장치선이 귀국한 1867년 5월 이후 상해에는 최선일 · 김학이 · 심순여 · 이성집 · 이성의 · 박복여 · 송운오 등 7명의 신자가 있었고, 이들 중 6명이 1868년 4월 오페르트의 원정에 동행했다고 하겠다.

 

 

3. 오페르트의 원정과 조선 신자

 

마르티노 신부에 의하면, 상해에 있던 조선인 신자 중 6명이 페롱 신부와 함께 오페르트의 원정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6명 중 3명이 길잡이로 하선이 허락되었는데, 그중 2명은 도망가고 1명만이 남아 페롱 신부 곁에 머물렀다고 한다.30) 당시 페롱 신부와 동행한 6명의 명단은 알 수 없지만, 1871년에 체포된 김여강의 진술에서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김여강은 충청도 진천 출신으로 공주에서 살았다. 그는 회장으로 활동하며 페롱 신부를 도왔고,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삼아 신부와 신자들이 머물 수 있게 하였다. 그는 1871년에 체포되어 ‘병인년에 최선일이 프랑스 군함을 인도한 사실’, ‘1868년에 오페르트와 함께 온 페롱 신부와 최선일을 만난 일’, ‘김 베드로 · 심 실우 · 이름을 모르는 사람 1명이 굴총(掘塚) 일에 동행한 일’, ‘최선일은 처자를 만나고자 왔으나, 페롱 신부가 말리며 보내주지 않았다는 것’, ‘김 베드로와 심 실우가 1871년 당시 남경(상해)에 있다는 사실’ 등을 진술하였다.31)

 

김여강의 진술을 통해 우리는 최선일, 김 베드로, 심 실우, 이름을 모르는 1명 등 4명이 오페르트와 동행한 조선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명은 마르티노 신부가 말한 6명보다 2명이 적다. 아마도 원정 도중 도망간 2명이 제외된 숫자인 듯하다.

 

4명 중 김 베드로는 김학이(김여경)로 추정된다. 〈표 1〉의 김계쇠와 최인서 항목을 보면, 1867년 5월 이후 상해에 남아있던 사람 중에 김씨는 김학이(김여경)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 실우는 심순여를 가리키며, 실우는 심순여의 세례명이다.32) 따라서 상해에 남아있던 7명 중 최선일, 김학이, 심순여가 오페르트의 원정에 동행한 것은 분명하며, 나머지 4명(이성집, 이성의, 박복여, 송운오) 중에 ‘동행했지만 이름을 모르는 자’와 ‘도망간 2명’이 있을 것이고, 나머지 1명은 ‘상해에 남아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상에서 비록 마르티노 신부가 언급한 동행자의 명단을 다 밝히지는 못했지만, 병인양요 때 향도로 왔던 최선일, 심순여, 김학이(김여경)가 오페르트의 원정에도 동행했음은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오페르트의 원정에는 상해에서 동행한 신자만이 아니라, 이들이 덕산에 왔을 때 접촉한 신자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손경로(孫京老)와 이영중(李永中)은 구만포에 정박 중이던 오페르트의 배를 찾아가 답무(踏舞)하거나 문답(問答)을 나누었고, 김양길(金良吉)은 서양인이 육지에 내려 물을 찾을 때, 대신 물을 길어 주고 돈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구만포에는 오페르트 일행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 중에 신자들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세 사람은 그들의 행동이 알려지면서 체포되었고, 1868년에 충청도 수영으로 보내져 효수되었다.33) 다만 3명 중 이영중은 신자인 것이 확실하고, 손경로도 신자로 추정되나34) 김양길이 신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들 외에 최선일의 동생인 최성일은 김여강과 함께 페롱 신부를 만났고, 이돈호는 장치선의 사촌인 장노첨과 함께 페롱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배화첨과 이원명은 도굴사건에 참여했다가 도주했으며, 온양 궁촌에 사는 이용이 3형제, 덕산 고산에 사는 이군명, 수원 능촌에 사는 김덕화 · 정재병, 이돈호의 처남인 김금석(김덕화의 아들), 신창 음성촌에 살던 이명이 등이 도굴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35)

 

 

 

 

〈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페롱 신부가 도착했을 때 공주, 목천, 온양, 덕산, 신창, 수원, 양지 등 충청도와 경기도에 살던 신자들이 서양 배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이들 중 김여강은 병인박해 이전에 페롱 신부가 관할하는 지역의 회장이었고,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삼아 신부와 정기적으로 접촉하였다. 그리고 최선일에게 들은 내용을 진술하거나, 최선일의 동생인 최성일과 함께 페롱 신부를 만난 것으로 보아, 최선일과도 친분이 있던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최선일이 페롱 신부와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도,43) 페롱 신부를 매개로 양자가 교류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다음으로 이돈호는 ‘덕산에서 페롱 신부를 만난 것’,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하기 전에 목천 소학골에 은신했는데,44) 이돈호의 거주지가 목천이라는 사실’에서 페롱 신부와 이돈호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배화첨 역시 거주지가 목천 소학동이라는 점에서 이돈호와 같은 경우이며, 이원명은 이돈호가 공소 주인이라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교회의 지도급 신자로서 페롱 신부와 알던 사이라고 하겠다.

 

수원 능촌에 사는 김덕화와 아들 김금석은 이돈호의 장인과 처남이라는 점에서, 이돈호를 통해 페롱 신부와 연결되었을 것이며, 정재병은 이돈호의 처가를 통해 이돈호와 관계를 맺은 신자라 하겠다.

 

이외에 온양의 이용이 3형제와 덕산의 이군명, 신창의 이명이도 이돈호가 아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페롱 신부와도 일정한 관계가 있는 신자들로 추정된다. 그리고 장노첨은 이돈호와 함께 페롱 신부를 만났고, 그가 장주기의 아들이자 장치선의 사촌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일찍부터 페롱 신부와 알던 사이였다고 하겠다.

 

결국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볼 때, 오페르트의 원정 당시 덕산에 모였던 신자들은, 단순히 서양 배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 온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병인박해 이전부터 페롱 신부와 알고 지내던 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4. 신자들의 원정 참여 이유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리델 신부는 경상도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 대구에서 박해 소식을 들었다. 이에 리델 신부는 3월 6일 성사 집행을 중지하고 5년 동안 거처하던 공주의 진밧45)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진밧도 안전하지 못해 3일 동안 살림살이를 정리한 후 3월 12일 밤에 복사 이 안드레아 가족을 비롯하여 진밧 교우들과 함께 버시니46)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강 요한으로부터 페롱 신부의 소식을 들은 리델 신부는 5월 18일 버시니를 떠나 30리 거리의 페롱 신부 거처로 갔고, 그곳 과붓집에서 페롱 신부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6월 15일에는 목천 소학골에 있던 칼래 신부의 소식도 듣게 되었다.

 

한편 선교사들은 중국으로 가서 박해 소식을 알리고, 순교한 선교사들의 자리를 이어받을 새 선교사 및 그 외 조선 교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청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임무를 리델 신부가 맡았다. 그러나 중국으로 가는 데 필요한 배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 근교의 교우들이 중국으로 가서 박해 상황을 전할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교우들은 이미 배 1척을 마련했고, 뱃값 일부와 식량만 마련되면 출항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 선교사 1명이 동행한다는 것과 출항 경비를 대겠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그들은 내포로 와서 리델 신부를 태워 가기로 약속하였다.

 

두 선교사는 6월 24일에 머물던 과붓집을 떠났다. 그리고 관불47)을 지나 온양의 방아사골48)에 도착하여 5일을 머물렀다. 그런 다음 배가 대기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리델 신부는 페롱 신부와 작별한 후 신창 용당리로 가서 6월 29일에 신자들과 함께 조선을 떠났다.49)

 

리델 신부의 탈출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들은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독자적으로 중국에 도움을 청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지자익(池子益) 등이 주도했는데, 지자익은 “박해 소식을 상해에 알리고 서양 선박을 청해 와서는, 남아있는 교우를 구하고, 천주교가 조선에서 널리 퍼지도록[廣榮] 해야 한다.”고 하였다.50) 즉 당시 중국으로 배를 보내려던 신자들은 서양의 힘을 빌려 박해를 중지시키고, 나아가 신앙의 자유까지 획득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신자들이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도 표출되었다. 즉 일행이 체푸 근처에 다다랐을 때, 체푸에서 오는 돛대가 셋 달린 프랑스 배 1척이 이들 곁을 지나갔다. 그러자 서양 배를 처음 본 신자들은 그 배를 보고 감탄하며 “저 배가 신부님 나라에서 왔습니까? 저 배가 우리나라에 오면 모두 도망갈 텐데…. 우리나라를 장악하고 왕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라고 힘을 써줄 텐데….” 등의 말을 하였다.51) 지자익과 같은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신자들은 이러한 인식 하에 병인양요 때 향도로 참여했고,52) 최인서가 전등사 전투 이후 철수하려는 로즈 제독을 만류했던 것이다.53) 그러나 프랑스군은 끝내 철수하였고, 이에 신자들이 병인양요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로즈 제독은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상’, ‘학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3명의 대신 처벌’, ‘조약 체결을 위해 전권대사를 파견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54) 그리고 강화도를 점령하여 힘의 우위를 보여주면 조선 정부가 자신의 요구에 따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반응은 로즈의 예상을 빗나갔고, 또 자신이 보유한 병력만으로는 더 이상의 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려워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다.55)

 

한편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간 신자들은, 시간이 지나도 박해가 수그러들지 않자 불안감이 더해 갔다. 오페르트에 따르면 “어느 날 페롱 신부가 흥분한 채 찾아와서, 대원군이 새로운 폭행(박해)을 가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상해의 조선인 신자들이 매우 불안해했고, 그들 중 일부는 대원군에게 타격을 가해 동포들에게 가해지는 폭행을 중지시킬 수 있는 계획을 제시했다.”고 하였다.56) 대원군에 대한 신자들의 반감이 상당히 높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병인양요의 실패 이후 신자들의 불안감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페롱 신부와 일부 신자들은 도굴과 같은 극단적인 조치만이 조선을 개방시켜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57)

 

그러나 상해에 머물던 모든 신자가 이 계획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리델 주교가 파리의 델페슈 신부에게 보낸 1877년 12월 6일 자 서한을 보면, “페롱 신부는 상해에 있던 조선인 신자들을 설득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이에 몇몇은 그 계획에 휩쓸려 들어갔지만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페롱 신부는 반대하는 조선인 신자들을 억지로 배에 태웠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총을 가지고 내리기를 거부한 신자들을 개머리판으로 때리기까지 했다.”고 하였다.58)

 

이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인 신자들은 페롱 신부의 방법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또 반대하더라도 원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원정 도중 도망갔다는 2명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페롱 신부의 계획에 대해 선교사들도 반대 입장에 있었다. 즉 리델 신부는 페롱 신부의 계획을 단념시키기 위해, ‘① 장상들과 상의하지 않았다. ② 회의를 통해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데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③ 논의한다고 해도, 그 같은 계획은 그리스도교를 경멸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고, 박해를 가중시킬 것이기에 반대한다. ④ 성공 여부를 떠나, 유럽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고, 조선인들로부터는 경멸과 천주교에 대한 불명예를 얻게 될 것이다.’ 등 몇 가지 의견을 사전에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59)

 

당시 페롱 신부는 자신이 조선 대목구의 대목구장 직무대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에 누구의 간섭도 받고자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신자들에 대해서도 대목구장 대리라는 신분으로 설득하고 강요함으로써,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동참하도록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병인박해가 장기간 지속된 점과 병인양요의 실패’가 가져온 결과라고 하겠다. 즉 이전의 박해처럼 1년 안에 박해가 종결되었다면, 도굴사건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며, 1866년 프랑스군의 원정이 성공하여 양국 사이에 조약이 맺어졌더라면 도굴 계획도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로 군사적인 압박이 실패했고, 그 결과 조선의 척사의식(斥邪意識)만 고양시켜 박해가 1866년을 넘어 1868년까지 지속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평화적인 교섭으로 박해를 종식시키고 조선의 개방을 유도하려던 페롱 신부의 생각60)도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롱 신부와 일부 신자들은 ‘남연군의 유골을 탈취하여 대원군과 협상한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계획은 1867년에 랄르망 공사61)에게 제안된 것62)으로 보아, 원정이 있기 수개월 전부터 구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66년 중국에서 귀국한 장치선을 만난 조철증(趙喆增)은 ‘서양 병선(兵船)이 언제 나오는지’, ‘그들이 나온 후에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지’, ‘국가를 침범하는 계책은 없는지’ 등을 묻고, 마지막에 ‘몇백 년 동안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어, 국가에 변고가 있기를 기다린 지 오래다’라는 말을 하였다. 이에 대해 장치선은 ‘(서양 배가 오는 것은) 오직 천주교를 널리 퍼지도록 하려는 것이지, (누구를) 살해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천주교의 본뜻에는 남의 나라를 뺏는 법이 없다’고 대답했고,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노성(老成)한 사람이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한 후 다시는 조철증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63) 1871년에 체포되어, 도굴사건에 참여한 신자들을 밝힌 김여강도 “서양인이 온 것은 재물과 여색을 탐하려는 것이 아니며, 서양인은 조선에 대해 조금도 유감을 품고 복수할 뜻이 없다.”고 진술하였다.64)

 

장치선과 김여강의 진술을 통해 볼 때, 당시 신자들은 서양의 힘을 이용하여 박해를 끝내고,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해서 그 나라를 빼앗는 것은 천주교의 본뜻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천주교의 본뜻을 어기고자 하지 않은 신자들의 태도는 ‘남연군묘 도굴사건’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다. 즉 조상의 묘를 파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십계명과 ‘장사를 다 지낸 후라도 평생 동안 죽은 부모를 생각하며 정성으로 기도하여 항상 그 영혼 돕기를 힘쓰라’65)는 교회의 가르침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자 중에 페롱 신부의 계획에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는 점, 원정이 페롱 신부의 설득과 강요로 이루어진 점, 원정 도중 2명이 도망간 점, 덕산에서 만난 김여강과 이돈호가 도굴 계획을 만류한 점’ 등은 오페르트의 원정에 대한 신자들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상해에 있던 신자들은 ‘남연군묘 도굴사건’과 관련해서 세 부류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부류는 페롱 신부와 함께 도굴 계획을 도모한 신자들이고, 두 번째는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페롱 신부의 설득으로 찬성하게 된 신자들이다. 오페르트가 구체적인 계획을 페롱 신부에게 물었을 때, 그는 조선 친구들과 좀 더 상의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였고, 며칠 뒤에 방문해서는 조선 사람들도 이 계획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열렬하게 지지하고 있다고 했는데,66) 여기서 동의하고 지지하게 된 신자들이 바로 설득된 부류일 것이다.

 

페롱 신부는 파리의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이 계획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며, 총 한 방 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비현실적이지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쉬운 일”이라고 설명했다.67) 그리고 오페르트에게도 “이 계획은 대원군을 효과적으로 강제하는 수단이며, 그로 인해 조선의 어느 개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68) 신자들도 이러한 내용으로 설득했을 것이다.

 

마지막 부류는 리델 신부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끝까지 반대 입장을 취하다가 강요에 의해 원정에 참여한 신자들이다.

 

이처럼 1868년 상해에 머물던 7명의 생각은 각기 달랐다. 비록 그들 중에 병인양요의 실패와 박해의 장기화에 따른 절망감에서 도굴 계획에 찬성한 신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행동이 당시 모든 조선 신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69)

 

 

5. 맺음말

 

이상에서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참여한 조선인 신자가 누구이며, 이들이 왜 원정에 참여했는지를 살펴보았고,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연군묘를 도굴하기 위해 오페르트 일행이 상해를 떠난 것은 1868년 4월(음)이었다. 이때 상해에는 최선일, 심순여, 김학이(김여경), 송운오, 박복여, 이성집, 이성의 등 7명의 조선인 신자들이 머물고 있었다. 이들 중 최선일 · 심순여 · 김학이는 1866년 리델 신부가 조선을 탈출할 때 동행했던 신자로, 병인양요 때 향도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은 병인양요 후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 동행했다가 상해에 머문 사람들이다.

 

상해에 체류하다 페롱 신부와 함께 오페르트의 원정에 참여한 신자는 최선일 · 심순여 · 김학이 등 6명이며, 그중 2명은 덕산에서 도망하였다. 그리고 상해에서 동행한 신자들 외에 김여강과 이돈호 등 10여 명의 신자가 덕산에서 페롱 신부를 만났거나, 도굴 현장에 함께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페롱 신부가 조선에서 사목할 때 인연이 있었던 신자들이었다.

 

병인박해 이후 중국에 갔던 신자들은 ‘서양의 힘을 이용하여 박해를 종식시키고, 나아가 신앙의 자유까지 획득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병인양요가 바로 그러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군사력을 이용한 방법은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하였다. 게다가 박해가 장기화되면서 상해의 선교사와 신자들 중에는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극단적인 방법이 강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남연군묘 도굴사건’이었다.

 

도굴 계획과 관련해서 상해에 있던 신자들은 처음부터 이 계획에 찬성한 부류, 나중에 설득된 부류, 끝까지 반대한 부류가 있었지만, 찬성한 부류의 선택이 조선 신자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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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연, 「오페르트의 조선항해와 내포 일대의 천주교 박해-門戶開放論과 관련하여-」, 『백제문화』 29집, 백제문화연구소(공주대), 2000.

이석원, 「하느님의 종 최지혁 요한과 최양업 신부 집안」, 『상교우서』 68, 수원교회사연구소, 2020.

이중국, 「오페르트 굴총 사건의 진입로 연구」, 건국대학교 대학원 논문집(17), 1983.

장동하, 「병인박해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과 강화 점령사건」, 『병인양요의 역사적 재조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조현범, 「덕산 사건과 프랑스 선교사 페롱」, 『정신문화연구』 제40권 제3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최병욱, 「19세기 후반 서세종점 하의 상해 상황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국제적 배경」, 『정신문화연구』 42(2),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

허영진, 「大院君 執政期 Oppert事件 硏究」, 여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89.

 

…………………………………………………………………………………………………

 

 

1) 『고종실록』 고종 5년(1868) 4월 21일. 이와 관련된 내용은 방상근, 「인천지역의 천주교 박해와 제물진두」, 『누리와 말씀』 35, 인천가톨릭대학교, 2014, 40~41쪽 참조.

 

2) 방상근, 앞의 논문, 42쪽.

 

3) 최선일(1808~1878) : 공주 출신으로 어려서 부친에게 천주교를 배웠다. 1846~1847년경 다블뤼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이후 홍주에서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를 맞이했다. 박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켰고, 중국에 머물며 신부들의 작업을 도왔다. 이후 중국과 조선을 왕래하며 소식을 전하다가, 1875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에서 선교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결과 1876년과 1877년에 블랑 신부와 리델 주교 등이 입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78년 리델 주교와 함께 체포되면서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23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18, 374~376쪽). 한편 최선일이 최양업 신부의 사촌 형인 최의정(최영렬의 장남)임을 밝힌 연구도 최근에 나왔다(이석원, 「하느님의 종 최지혁 요한과 최양업 신부 집안」, 『상교우서』 68, 수원교회사연구소, 2020 가을호, 33~40쪽).

 

4)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가톨릭출판사, 1962 ;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을유문화사, 1962 ; 朴日根, 「젠킨스에 대한 駐上海美領事裁判-南延君墓所 盜掘事件에 關하여」, 『부산대학교 논문집』 11집, 1970 ; 박일근, 『美國의 開國政策과 韓美外交關係』, 일조각, 1981 ; 盧啓鉉, 「오페르트의 南延君墳墓 盜掘蠻行과 韓國의 措置」, 『국제법학회 논총』 27(1), 대한국제법학회, 1982 ; 이중국, 「오페르트 굴총 사건의 진입로 연구」, 『건국대학교 대학원 논문집』 (17), 1983 ; 허영진, 「大院君 執政期 Oppert事件 硏究」, 여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989 ; 원재연, 「오페르트의 조선항해와 내포 일대의 천주교 박해-門戶開放論과 관련하여」, 『백제문화』 29집, 백제문화연구소(공주대), 2000 ; 조현범, 「덕산 사건과 프랑스 선교사 페롱」, 『정신문화연구』 40권 제3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5) 유홍렬,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하권, 가톨릭출판사, 1994(6판), 154쪽.

6)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254쪽.

7) 『고종시대사』 1집, 국사편찬위원회, 1967, 388~389쪽.

 

8) 이중국, 「오페르트 굴총 사건의 진입로 연구」, 『금단의 나라 조선』, 집문당, 2000, 290~291쪽. 이 논문은 1983년 『건국대학교 대학원 논문집』 (17)에 수록된 것을 보필한 것이다.

 

9) 조현범, 앞의 논문, 89쪽.

10) 『포도청등록』 중, 보경문화사, 1985, 702·707쪽.

 

11) 박일근, 앞의 책, 39·42쪽 ; 노계현, 앞의 논문, 97쪽. 노계현의 경우 각주 31)에서는 ‘최선일 등 한국 천주교도 2명’이라고 하였다.

 

12)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338~339쪽.

13) 충남 아산시 선장면 가산리.

14)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141쪽.

15)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147쪽.

 

16) 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452쪽. 장치선의 진술에는 10명의 신자 이름만 나오는데, 여기서 빠진 1명은 김창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 후술하듯이 병인양요 당시 리델 신부와 함께 조선에 온 신자는 심순여, 최선일, 김여경이었다. 그런데 최인서는 강화에서 리델 신부와 최선일을 만났다고 했고, 김창실은 리델 신부와 최경유의 삼촌을 만났다고 했다. 이것으로 보아 최경유의 삼촌은 최선일임을 알 수 있다(『포도청등록』 하, 559쪽 ; 『포도청등록』 중, 706쪽).

 

18)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143쪽.

 

19) 김창실의 진술에서, ‘장하구에 도착했다’거나, ‘최인서와 김여경이 이미 요동에 와 있었다’는 내용은 시점이 다른 두 내용이 섞인 듯하다. 따라서 김창실의 진술도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20)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151~152쪽.

21) 『포도청등록』 중, 700~702·704~707·798쪽 ; 『포도청등록』 하, 559쪽.

22) 장치선은 같은 날 두 번의 심문을 받는데, 갱초(更招)를 앞세운 것은 중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명단이 나오기 때문이다.

23)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154쪽.

 

24) 김창실의 진술에 나오는 김여경과 김계쇠·최인서의 진술에 나오는 김학이는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장치선의 진술에 나오는 김영희도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25) 병인양요 때 물길 안내를 맡은 조선 신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글이 『한국 천주교회사』 등에 달린 주석을 토대로 최선일, 심순여, 최인서를 거론하고 있다(샤를르 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하, 458쪽 각주 40 ; 『리델문서』 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112쪽). 그러나 최인서는 병인양요 때 리델 신부와 함께 온 신자가 아니라,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할 때 함께 갔다가, 1866년 8월에 귀국한 8명 중의 1명이었다.

 

26) 査於本年四月緝捕邪黨張致善供稱 本國匪民崔善一金學伊沈順汝李聖集李聖儀朴福汝宋雲五等七人 交通洋人 渡海攔入現住江蘚上海縣山東煙臺口地方(『近代韓國外交文書』 2, 동북아역사재단, 2009, 4쪽) ; 노계현, 앞의 논문, 96쪽.

 

27) 『淸季中日韓關係史料』 (2), 臺北: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72, 108~109쪽 ; 노계현, 앞의 논문, 100쪽 ; 최병욱, 「19세기 후반 서세종점 하의 상해 상황과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국제적 배경」, 『정신문화연구』 42(2),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 153~154쪽.

 

28) 리샤르 신부·블랑 신부와 함께 조선 대목구에 배속된 선교사이다. 3명의 선교사는 1867년 4월 8일 상해에 도착했다.

 

29)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문서 판독자료집』,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0, 413쪽 ; 조현범, 앞의 논문, 69쪽. 비록 시기가 맞지 않지만 6명이 상해를 떠났다는 점에서 ④의 내용이 도굴사건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30) 「마르티노 신부의 1868년 5월 31일 자 서한」,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문서 판독자료집』, 427쪽 ; 조현범, 앞의 논문, 70쪽.

 

31) 서종태 · 한건 엮음,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 (下), 국학자료원, 2004, 1435~1437쪽;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338쪽.

 

32) 치로(Cyrus) 또는 치릴로(Cyrillus) 성인을 말하는 듯하다.

33) 『고종실록』 고종 5년(1868) 5월 29일, 6월 18일 ; 방상근, 앞의 논문, 53쪽.

 

34) 『병인치명사적』 23권(22~23쪽)에 수록된 손 요왕이 손경로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심사자의 지적이 있었다. 굴총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되고, 수영에서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35)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 (下), 1438~1441쪽.

 

36)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 (下), 1438~1441쪽 및 『병인치명사적』 9권·21권(절두산 순교성지 소장)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37) 『병인치명사적』 6권(66쪽)에 있는 김여광 바오로가 김여강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심사자의 지적이 있었다. 죄목이 ‘덕산 굴총을 주장하고, 서양인을 영접했다’는 점에서, 양자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두 사람의 출신지(진천과 연기)와 나이(70세와 62세)가 다른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38) 『병인치명사적』 24권(116쪽)에 ‘장 회장의 아들 노첨’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자료는 논문을 심사한 심사자가 알려주었다.

 

39) 『병인치명사적』 21권, 19쪽. 이 내용으로 보아 배화첨은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체포되어 순교했음을 알 수 있다.

 

40) 1900년에 진행된 병인박해 순교자의 시복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사람 중에 이원명(빈첸시오)이 있다. 그는 양성 미리내 태생으로 증언 당시 용인 검은정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오메트르 신부가 체포될 때까지 1년 동안 오메트르 신부의 복사로 있었다고 한다. 증언자 이원명이 오메트르 신부의 복사였다는 점에서, 이돈호의 진술에 나오는 공소 주인 이원명과 증언자 이원명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병인순교자 시복재판기록』 9권, 1751쪽).

 

41) 『병인치명사적』 21권(51~52쪽)에는 1866년 11월 해미에서 순교한 이군명(바오로)에 대한 증언 내용이 있다. 『병인치명사적』에 수록된 이군명은 공주 천장리에 살다가 해미로 이거했고, 증언자는 고산 밤실에 살던 그의 조카 이 바오로였다. 이돈호의 진술에 나오는 이군명과 이 바오로가 증언한 이군명이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바오로의 삼촌은 1866년에 순교했기 때문에 동일인이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이돈호가 진술한 이군명이 고산에 거주했고, 증언자 이 바오로 역시 고산에 살고 있었다는 점에서, 『병인치명사적』의 증언 내용에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42) 『公忠道邪學罪人成冊』(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238쪽)에는 서천에 거주하다가 1868년 6월 1일 이전에 체포되어 공주에서 참수된 김금석이 수록되어 있다. 이 사람과 이돈호의 진술에 나오는 김금석이 같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43) 아르튀르 피아센티니 신부 지음, 강옥경 옮김, 『리델 주교』, 살림, 2018, 157쪽.

 

44) 1866년 당시 칼래 신부가 여름에 머물던 거처는 충청도 목천의 소학골(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납안리)이었다(「칼래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 자 서한」,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문서 판독자료집』, 274쪽).

 

45) 충남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46) 충남 공주시 신풍면 선학리.

47) 충남 공주시 유구읍 녹천리.

48) 충남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

 

49) 리델 신부가 박해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조선을 탈출할 때까지의 내용은 『리델문서』 Ⅰ, 75~85·98~99·104~106·110~112쪽 참조.

 

50) 『포도청등록』 중, 705쪽 ; 유홍렬,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141쪽.

51) 『리델 주교』, 171~172쪽 ; 『한국 천주교회사』 하, 453~454쪽.

 

52) 물론 리델 신부의 뜻에 따라 향도 역할을 했겠지만, 병인양요 당시 신자들의 생각은 리델 신부와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53) 『포도청등록』 중, 706~707쪽.

 

54) 장동하, 「병인박해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과 강화 점령사건」, 『병인양요의 역사적 재조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88쪽.

 

55) 로즈 제독의 조선 출병에 대해 프랑스의 해군성은 조건부로 승인하였다. 즉 프랑스 해군의 작전에 프랑스 정부가 연루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선을 응징하고 보상을 요구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로즈 제독은 본국으로부터의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군은 계속 증가하였고, 또 겨울이 다가오므로 염분을 적게 함유한 강화해협을 항해하는 것이 곧 중단될 수도 있었다. 이에 로즈 제독은 철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장동하, 앞의 논문, 76~77·90쪽).

 

56) 오페르트 저, 한우근 역,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 한국번역도서, 1959, 283쪽.

 

57)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 285쪽. 페롱 신부가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조현범의 앞의 논문(64~71쪽) 참조.

 

58) 조현범, 앞의 논문, 79쪽.

 

59) 「리델 신부가 카즈나브 신부에게 보낸 1868년 8월 31일 자 서한」, 『A-MEP Vol. 579(B) Corée 1797~1874 필사문서 판독자료집』, 454쪽.

 

60) 조현범, 앞의 논문, 72~73쪽.

61) 당시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였다.

62) 조현범, 앞의 논문, 77쪽.

63) 『포도청등록』 중, 706쪽.

64)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 (下), 1438쪽.

65) 『천주성교예규』 제2권(1900년 활판본), 대전가톨릭대학교 소장, 51~52쪽.

66)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 284쪽.

67) 조현범, 앞의 논문, 66쪽.

68)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 285~286쪽.

 

69) 원재연은 병인양요를 리델 신부와 조선 천주교도가 무력을 동원하여 개항을 시도한 문호개방론으로 이해했고, 이것이 실패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된 것이 ‘오페르트식 문호개방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굴총사건에 페롱 신부와 같은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일부 지도층이 적극 참여하였고, 또한 마찬가지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최인서 · 최선일 등 조선인 천주교도의 발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비록 비상식적이고 부도덕한 방법을 통한 문호개방의 변종적 시도이지만, 조선 천주교회 내부의 자율적인 문호개방론의 범주 속에 포함될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원재연, 앞의 논문, 173·187쪽).

 

 

* 필자는 이 논문을 작성하기 직전까지 최선일이 ‘오페르트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최선일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필자의 생각을 주변에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최선일이 관련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의 부족함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고, 혹 최선일이 오페르트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필자의 말 때문에, 기존의 입장과 다르게 생각한 분들이 있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린다.

 

[교회사 연구 제57집, 2020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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