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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로 보는 교회이야기4: 중국을 측량한 예수회 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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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5 ㅣ No.429

[창간 84주년 기획 - 지도로 보는 교회 이야기] (4) 중국을 측량한 예수회 선교사들


선교사 10명이 10년만에 중국 전역 실측 ‘황여전람도’ 제작

 

 

마태오 리치 사후에도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중국 황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며 적응주의 선교방식을 펼쳐 나갔으며, 이들 선교사로부터 서양의 새로운 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한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에 대한 지도를 만들 결심을 하게 된다.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10여 년에 걸친 측회(測繪) 사업은 끝내 세계 지도제작사에 빛나는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탄생케 했다.

 

 

명말청초의 선교사 활동

 

마태오 리치의 활약에 힘입어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도 유럽 각국으로부터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1622년 중국에 들어온 독일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湯若望)은 명나라 때도 벼슬을 했지만 1644년 청나라가 북경에 도읍을 차지한 후에도 순치제(順治帝)의 신임을 얻어 국립 천문대장격인 흠천감정(欽天監正)에 등용됐다. 이때 샬 신부는 볼모로 잡혀왔던 조선의 소현세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천문지식과 천주교 교리에 대해 담론을 나눴다.

 

1659년 중국에 파견된 벨기에 출신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F. Verbiest, 南懷仁)는 샬 신부를 도와 중국의 역법을 수정했고, 1661년 청나라 제4대 황제로 등극한 강희제(康熙帝)에게 천문학과 수학을 가르쳤다. 1674년에는 마태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개편하여 양반구형(兩半球形) 세계지도인 곤여전도(坤與全圖)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후 교황청으로부터 중국 선교권을 인정받은 프랑스도 루이 14세의 명에 의해 예수회 선교사 5명을 중국에 파견했는데, 1687년 북경에 들어온 부베(J. Bouvet, 白晉)와 제르비용(J. F. Gerbillon, 張誠) 신부는 페르비스트의 뒤를 이어 강희제에게 천문학과 역학, 기하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이렇듯 명말청초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내의 선교활동은 물론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에 대해서도 선교적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흠천감정으로 승진한 안토니오 토마스(Antonio Thomas)가 1688년 인도 고아에 보고한 “조선의 정확한 지도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과 1689년 보고한 “심양에 주원(住院)을 건립하고 만주와 조선에 들어갈 것을 희망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전역의 지도 41도엽을 붙여 만든 황여전람도(제공 ·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측량

 

1689년 러시아와 국경을 획정하는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할 때 강희제는 통역을 맡은 제르비용 신부에게 러시아 사절단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경로를 설명토록 했는데, 그가 서양에서 제작된 아시아 지도를 펼쳐 보이자 중국 부분이 지나치게 소략하고 지명 표기가 엉성해 보이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뒤 선교사 페레닌(D. Perrenin, 巴多明)이 중국 각 성(省)의 지리를 조사한 후 지도와 실제가 맞지 않는다고 보고하자 강희제는 서양 방식으로 지도를 제작하기로 의지를 굳혔다.

 

이를 위해 강희제는 부베 신부에게 측량술에 능통한 선교사를 데려올 것을 명했고, 1693년 프랑스로 돌아간 부베 신부는 국왕 루이 14세를 알현한 자리에서 강희제가 예수회 선교사를 초빙하여 황궁에 과학원을 세우길 원하며, 지금이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한 좋은 기회임을 강조하는 긴 상주문을 바쳤다. 마음이 움직인 루이 14세는 선교사 10명을 파견하고 프랑스과학원에 측량 기구를 제공할 것을 명했다.

 

당시 측량에 참가한 선교사는 부베, 페레닌을 비롯하여 레지(J. B. Regis, 雷孝思), 자르투(P. Jeartoux, 杜德美), 프리델리(X. E. Fridelli, 費隱), 코르도스(J. F. Cordos), 타트르(P. V. Tatre), 마일라(A. M. Mailla), 힌데레르(R. Hinderer), 봉주르(F. Bonjour) 등 10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프리델리는 독일인이고, 코르도스는 포르투갈인이었다.

 

측량은 1708년 만리장성과 그 부근의 강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어 1709년에는 레지를 책임자로 만주지방을 측량했고, 1711년부터는 측량대의 인원을 증원하여 레지가 이끄는 측량대는 산동지방으로, 자르투가 이끄는 측량대는 몽고지방을 측량했다. 중국 전역에 대한 측량작업을 마치고 북경에 돌아온 것은 1717년 1월 1일이었다.

 

 

황여전람도 제작

 

황여전람도 제작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부베 신부의 초상.

 

 

1717년부터 자르투 신부의 감독 하에 지도 편찬 작업이 진행되어 그 이듬해에 지도가 완성됐다. 지도를 받아 든 강희제는 이 지도에 ‘황여전람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대규모 측량과 지도제작 사업은 유럽에서도 실현되지 못했던 획기적인 일이었고, 당시의 교통이나 장비 등 여건으로 봐서 광대한 중국 전역을 10년 만에 실측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황여전람도 제작에 있어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측량 계산의 기준이 되는 길이의 단위 즉 공부영조척(工部營造尺)을 1리(1里=1800尺=570.6m)로 통일한 점이고, 둘째는 적도를 0도로 하는 위도와, 북경의 흠천감 관상대의 자오선을 0도로 하는 경도를 정했다는 점이다. 또한 지도 전개에 있어 투영도법을 사용했는데, 최근 과학적 검증 결과 프랑스의 지도학자인 상송이 개발한 상송도법(Sanson projection)임이 밝혀졌다.

 

황여전람도는 여러 종류의 판본이 있는데 가장 최초의 판본은 1717년에 새긴 목판본으로 티베트 전체와 몽골 서쪽 부분이 포함되지 않은 28도엽으로 이뤄진 분도(分圖) 형태로 축척이 표시되지 않았다. 두 번째 판본은 1719년에 새긴 목판본으로 총 36도엽이고, 축척은 1:140만으로 일률적이나 각 성을 한 도엽으로 제작해 도엽의 크기가 일정치 않다. 이 지도는 두 벌을 새겼는데 한 벌은 현재 파리 외무문고에 보관되어 있고, 또 한 벌은 구 북경인문학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황여전람도는 1929년 심양고궁박물원에서 발견된 동판본인데, 이것은 선교사 리파(M. Ripa)가 동판에 새긴 것이다. 이 지도는 총 41도엽으로 경위선 좌표가 기입돼 있고, 전체 도엽이 같은 축척이고 도엽의 크기가 일정해 인접 도엽끼리 연접도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지명은 만리장성 안쪽은 한자로, 그 밖의 지역은 만주어로 표기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광대한 중국 영토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측량되고 지도로 만들어진 황여전람도는 세계 지도제작사에 있어 당시로서는 가장 우수하고 앞선 지도로 평가되고 있으나, 궁중 깊숙이 비장되는 바람에 측량과 지도제작 기술이 전수되지 못한 점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최선웅(안드레아 · 매핑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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