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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현대사 속의 노기남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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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6 ㅣ No.819

한국 현대사 속의 노기남 대주교

 

 

1. 들어가며

 

노기남 대주교는 한국 근현대 천주교 역사에서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1942년 경성 대목구장에 임명된 이래 1967년 3월까지 서울교구의 주교를 역임하였고, 1962년 12월 서울 대목구가 교구로 승격되면서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의 일생은 또한 한국 현대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다. 1956년 부통령, 1960년 민주당 정부의 총리를 역임한 장면과의 관계는 널리 알려져 있다. 1969년 6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발간한 《나의 회상록》에 따르면 그는 1948년 첫 총선거에서 장면을 정치에 입문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또한 1963년 《경향신문》이 군사정부로 넘어갈 때까지 이사장직을 맡아 수행하였다. 《경향신문》은 1950년대를 통해 민주당의 신파를 대변하였으며, 이승만 정부에 반대하는 강한 논조의 기사로 인해 1959년 미군정 법령 88호에 의해 폐간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 노기남 대주교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본인이 서술한 《당신의 뜻대로》(1968, 한국교회사연구소)와 《나의 회상록》, 그리고 선종하신 후 1년 만에 나온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박도원,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거의 유일한 연구서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라고 할 수 있는데, 노기남 대주교의 일생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히 천주교의 대주교로서 연관되어서 안 되는 사건들에 대한 기록들을 인터뷰에 기초하여 기술하면서 관련 내용들을 비교적 자세히 분석하였다.

 

물론 관련 사건들이 대부분 ‘소문’에 근거한 것이었고, 이를 관련자들의 인터뷰 외에는 따로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소 부정확한 점이 없지 않다. 또한 이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적 근거를 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노기남 대주교와 관련된 기록의 양, 관련자들의 나이 등을 고려할 때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 이상의 기록을 남기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실상 노기남 대주교가 주요하게 활동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천주교에 대한 연구는 거의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1955년 춘천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했고, 1957년 1월에는 광주 지목구와 전주 지목구가 각각 대목구가 되었으며, 경남 감목 대리구는 부산 대목구가 되었다. 1958년에는 대전 대목구와 청주 대목구가 새로 설정되었고, 1961년에는 인천 감목 대리구가 인천 대목구로 승격되었다. 또한 1960년에는 서강대학교가 개교하였다. 1962년 3월 10일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제도가 설정되기도 했다. 이어 1963년에는 수원, 원주, 마산, 안동이 각각 교구가 되었고, 제주는 지목구에서 교구로 승격되었다. 이 시기 천주교 신자 역시 증가하여 1953년 당시 약 17만 명이었던 신자수가 1962년에는 53만 명을 상회하였다.1) 이렇게 천주교회가 급성장을 한 시기인 만큼 이 시기 천주교회사를 복원하고, 아울러 핵심적 역할을 했던 노기남 대주교의 사상과 활동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현대사, 특히 1950년대 이후의 자료들 속에서 나타나는 노기남 주교의 모습과 활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남아 있는 자료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주로 당시의 신문을 참조하는 방법밖에는 새로운 자료를 발굴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2. 노기남 주교와 이승만 대통령, 장면 총리, 그리고 미국

 

노기남 대주교와 장면 총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주지하다시피 장면 총리가 일제강점기 동성학교 교장을 할 때부터 노기남 대주교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 이는 노기남 대주교 자신의 글뿐만 아니라 장면의 회고록, 그리고 당시 민주당 관계자들의 글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3)

 

장면과의 이러한 가까운 관계는 자연스럽게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했다. 노기남 대주교의 자서전에 따르면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직후 장면을 국무총리로 임명할 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에게 의논했고, 노 대주교는 미국에 있었던 장면과의 통화를 통해서 그를 설득하여 귀국하도록 하였다고 한다.4)노기남 대주교에 의하면 대한민국 수립 과정에서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가 함께 찾아와 자신이 옛날에는 가톨릭교도였다고 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해 달라고 했다고도 한다.5)

 

또한 아래의 〈자료 1〉과 같이 전쟁을 통해서라도 통일을 해야 한다는 노기남 대주교의 생각은 이승만 대통령과 일치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료 1> 盧基南 천주교 주교, 유엔한국위원단과의 협의에서 전쟁을 포함한 남북통일 방안을 피력

 

천주교 주교 노기남씨는 23일 오전 10시에 國聯韓委 본부의 초청을 받아 한위 제2분과위원회와 협의한 바 있었는데 협의를 마친 盧주교는 기자단에게 종교인으로서의 남북통일 및 대한민국정부 육성에 관한 견해를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남북통일에 대한 견해 : 余의 견해는 현 대한민국정부를 정치적 · 경제적 및 군사적으로 강화시키는 데 있으며 또 국련을 더욱 세계민주주의 우방 제국으로서 강화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한국통일문제는 미 · 소의 협조로서 이루어져야 할 것인데 수 년 간의 경험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케 되어 있는 것이니 다른 방법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제국의 강화에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감히 종교인으로서는 원치 못할 전쟁도 필요할 것이라고 하겠다.

 

2. 북한민을 포섭하는 데 대한 정책과 추진방법 여하 : 특히 국회에 북한민을 위하여 100석의 의석을 두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북한민을 용이하게 포섭하려면 국련한위의 절대적인 원조가 필요하며 북한선거를 수행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여 주기를 바란다.

 

3. 남한의 경제 · 문화 · 사회 · 정치적인 장해의 제외에 대한 견해:이 각 방면의 장해의 제외에는 우선 국민도덕 및 사상선도와 도의적 인심의 배양에 있을 것이며 정부는 이를 위하여 좀더 노력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

 

5. 한국정부가 현재 봉착하고 있는 난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나 특히 중요한 것은 남한민의 사상적 · 경제적인 불안정에 있다고 본다. 정부로서는 남한의 사상의 통일 및 민생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6)

 

그런데 1952년경부터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가 안 좋아졌다고 하는데, 이는 부산정치파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부산정치파동 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 이후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하여 자신을 권력의 2선으로 후퇴시킬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7)

 

이 시기 이승만과 노기남 대주교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것은 아래의 <자료 2>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양유찬 주미 한국 대사를 거쳐 임병직 주유엔 대사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이 편지는 1952년 7월 11일자로 동년 7월 4일 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면서 부산정치파동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직후에 보내진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정부를 항상 훼손시키려는 국무부의 의도가 항상 실패하고 있지만, 트루만 대통령이 전쟁을 끝내려고 한다고 비판하면서, 한국 내에서 자신의 경쟁자들을 돕고 있는 가톨릭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다. 캐롤(Carroll) 주교에 대해서는 ‘악덕한’(vicious) 가톨릭 주교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그는 한국 정부가 기피하는 외교관(a personanon grata)이며 다시 한국에 부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아울러 노기남 주교가 캐롤 주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장면이 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 방한 시 명동 성당에서 비밀리에 디엠 대통령과 장면 부통령 사이에 자리를 만들다가 더 악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8) 결국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1959년 사상초유의 《경향신문》 폐간사건으로 이어졌다.

 

4·19 혁명을 통해 《경향신문》을 다시 복간하고, 내각책임제 하에서 장면이 국무총리에 선출되면서 노기남 대주교는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가 한국 내에 있는 미국의 현지 기관과 가까운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도 그에게는 중요한 정치적 배경이 되었던 것 같다. 원래 《경향신문》은 소위 ‘정판사 위폐사건’이 발생했던 조선정판사를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으면서 시작되었으며,9) 그 이전에도 노기남 대주교는 미군정의 고위 관계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2 공화국 시기 한국의 가톨릭은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어느 정도 비상할 수 있었던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 5월 말 서강대학교의 축성식이 있었는데,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이 거행되었고, 여기에는 장면, 이항녕 문교부차관,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 등이 참석하였다.10) 현충일에 있었던 ‘현충전몰장병추도식’에 노기남 주교는 허정 과도정부 대표, 매카나기 주한 미국 대사, 그리고 유엔군과 한국군의 고위장성들과 함께 참석하였다.11) 그리고 1961년 3월에는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으로부터 군에 대한 협조에 대한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12)

 

이러한 관계 속에서 노기남 대주교가 제2 공화국 시기에 냈던 메시지들은 대부분 사회적 상황이 좋아지지 않고 있지만,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0년 성탄절에 발표된 크리스마스 메시지와 1961년 1월 1일에 발표된 신년 메시지는 국민들이 참아야 하며, 정부에 힘을 더 보태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이시지만은 세상에 오실 때에는 극히 가난하게 탄생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부귀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읍니다. 세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께서는 탄생하실 때부터 적은 수의 부귀한 사람보다는 수가 훨씬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극히 가난한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천주의 뜻을 지키고 실행한다면 가난 중에서도 위험 중에서도 천주님의 전능하신 보호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여러분이 부귀하거나 가난하거나 학식이 있거나 무식하거나 정치인이거나 문화인이거나 또는 상업인이거나 노동자거나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 항상 마음에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힘씁시다. 그러면 반드시 당신에게 그리고 이 나라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 것입니다.13)

 

오늘날 우리의 곤핍한 모든 현상은 어디나 혁명 이후에는 자연히 따라오는 현상이다. 이러한 곤란은 정부의 탓도 아니고 국민의 탓도 아니다. 과거 자유당 정권 하에서 곪기고 병들었던 국가적 병세가 수술을 받고 파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수술이 되고 깨끗이 파종이 되면 병이 나을 때가 있을 것이니 우리 국민들은 이 파종기간에 이를 악물고 참아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제2공화국의 중책은 정권을 인계한 현 정부라든지 입법부나 사법부의 모든 책임자들이 최선을 다하여 국리민복에 힘쓰고 있는 줄로 믿고 기다리자.

 

전기가 안 오고 수돗물이 안나온다고 정부를 욕하고 탓한들 갑자기 그 사정이 좋아질 리가 만무하다. 공연히 우리 마음만 더욱 불안하고 민심만 소동되기 쉬울 뿐이다. 참고 견디는 것이 어려우니 난국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불만 불평을 외치는 것은 난국타개에 백해무일리할 것 같다. 특히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오늘날 이 모든 가난과 궁핍을 국가민족을 위하여 천주께 희생으로 바치며 감수하자.

 

위정자들과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양심과 용기와 정의를 주시도록 열심으로 기구하자. 이것이 오늘날 난국에 처한 우리민족 우리 신자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너희는 인내함으로써 보존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줄로 믿고 이 말씀으로써 금년 새해 연두사로 대하려 한다.14)

 

특히 신년 메시지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민주당 정부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의 근원은 자유당 정부 시기에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현 정부를 탓할 수 없으며, 현재로서는 참고 견디는 방법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주변에서의 비판적 목소리 때문에 외유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김철규 신부가 염려하고 있었던 상황도 바로 이것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3.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부와 노기남 대주교

 

5·16 쿠데타 직후 언론에 나타나는 노기남 대주교의 모습은 그다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1961년 10월 22일 가톨릭 노동청년회와 관련된 활동이 보도되고 있는 것 외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고 있다.15) 장면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장면 정부를 몰락시킨 5·16 쿠데타 세력과 긴장이 형성되어야 할 것 같은데, 신문지상에는 노기남 주교가 오히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도미를 계기로 한 · 미간의 유대를 더욱 굳건히 하고 한국 재건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하여 미국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한 · 미유대강화국민대회」가 10일 저녁 5시 시민회관에서 열리게 된다. 이 국민대회는 민간인들에 의하여 마련되는 것이며 3일 저녁과 4일 낮의 두 차례에 걸친 준비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16인 준비위원회에서는 대회장에 이관구씨 부위원장에 여상원 대한상공회의 소부회두 김옥길 이화여대총장 김재준 한국신학대학장 김세완 신문윤리위원장 장천원 유네스코 한국지부사무국장 이상백 서울대교수씨를 각각 뽑았다. 이 국민대회에서는 결의문과 박의장 및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멧세지」를 채택할 것이며 대회에 뒤이어 같은 취지의 강연회가 열릴 것이라고 이관구 대회장이 4일 준비위원회가 끝난 뒤에 말하였다.

 

그는 또한 이 국민대회가 지방에서도 열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준비위원 16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兪鎭午 尹甲壽 李相伯 金玉吉 張?源 金吉昌 盧基南 李圭哲 林中吉 朴洪緖 張基榮 고재욱 이관구 홍종인 김팔봉 조동건16)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1961년 11월의 방미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쿠데타 후에도 윤보선이 대통령직을 지켰기 때문에 미국이 5·16 쿠데타를 승인하였지만, 쿠데타 세력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만전을 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사령관의 승인 없이 군대를 움직인 것도 그랬지만, 김종필을 비롯한 쿠데타 주체 세력들과 유엔군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 역시 감안해야 했다.17)

 

어쩌면 이러한 노기남 주교의 모습은 당시의 정치적 격변 상황에서 교회와 정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1년 성탄 메시지는 장면 정부 시기에 했던 메시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성탄 메시지의 소제목을 ‘정부 탓 말고 국법준수’로 뽑았다. 이 메시지 속에는 군사정부가 추진하고 있었던 ‘국민의 정신적 혁명’과 ‘국민개조운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부 탓 말고 국법준수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 다하자

 

아무리 민주주의다 자유 평등이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는 남녀노소 장유상하의 엄격한 차별과 질서가 없을 수 없읍니다. 선배와 연장자를 알아봐야 하고 부녀자와 약하고 병든자를 도와주고 동정할 줄 알아야 하겠읍니다. 아무리 언론자유다 사상자유다 행동자유다 하지만 타인의 명예에 관계되는 말이나 행동을 삼갈 줄 알아야 하고 국가와 민족에 해로운 사상과 풍조를 경계할 줄 알아야 하겠읍니다. 호의호식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일하기를 싫어하고 무위도식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우리국가는 국민의 정신적 혁명과 국민개조운동을 부르짖고 있읍니다. 우리 국민이 세살의 것은 세살에게 바치고 천주의 것은 천주께 바칠 줄 안다면 우리 국민의 정신혁명과 국민개조는 자연 이루어질 줄 확신하는 바입니다.18)

 

노기남 주교는 1962년 3월 24일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노기남 대주교의 부활절 메시지는 이전의 메시지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부활절 메시지의 제목은 ‘난관을 참고 결실을’이었다.

 

盧基南大主敎는 22일 復活節을 맞아 “우리가 모든 난관을 더 잘 참고 극복할수록 우리 사회, 우리 사업에도 더 좋은 결실이 있을 것이다”고 말하고 “오늘 ‘예수 ·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축하하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의 모든 십자가를 끝까지 용감히 지고 갈 것을 굳게 결심하자”는 부활절 ‘메시지’를 발표하였다.19)

 

박정희 의장 역시 노기남 주교의 대주교 임명과 서울 대목구의 교구 승격에 대해 국가적 위신 선양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20) 갑자기 군사정부 하의 상황에 대해서 ‘난관’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본인에게 다가올 ‘난관’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에서는 이 시기에 있었던 다양한 ‘난관’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개인적 문제로부터 교구의 재정 문제, 그리고 《경향신문》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5·16 쿠데타 이후 계속해서 일어났으며, 이러한 ‘난관’이 노기남 대주교와 장면 정부의 관계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치적으로 볼 때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조폐공사 사장 반혁명사건’이었다. 1961년 8월 12일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인해 경향신문사의 고문이었던 한창우가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5ㆍ16 쿠데타 당일 과거 장면의 비서였던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과 《경향신문》 사장을 역임한 한창우가 장면으로 하여금 나와서 정권 이양을 하지 말고 유엔군을 동원하여 혁명군을 진압해야 한다고 모의했다는 혐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었다.21) 사건의 심의 결과 한창우는 단지 의견을 전달했을 뿐 선우종원이 모든 것을 진행한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경향신문사에서 진행된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또 다른 반혁명 사건은 1962년 7월 ‘민주당 사건’이었는데, 여기에는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었다. 사건의 전반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61년 10월부터 조중서는 정부가 계엄령을 해제치 아니하고 정치활동을 금하여 독재정치를 함으로써 민생고가 날로 심해 살 수 없다는 독선적인 견해를 피고인 김용옥에게 말한 다음 현 정부 전복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한 끝에 서울 근교 주둔 육군 제9사단 제6군단 오산 고사포 부대 등을 동원, 박정희 의장과 그 밖의 정부요인 34명을 살해키로 합의하고 정부전복 후에는 변영태, 장이욱, 한근조, 최규남 등 인사 중에서 영도자를 선출하고 2, 3개월 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정으로 이양할 것을 합의하며 4차에 걸쳐 42만환을 교부했다. 조중서는 62년 4월에 피고인 노재도, 전봉희, 김영배 등을 통해 데모대원 1백여 명을 동원 확보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군 5개 연대에서 거사하면 데모대원이 호응키로 하여 깡통에 모래와 휘발유를 넣어 뇌관으로 폭발시킬 수 있는 사제 수류탄을 제조 사용할 것이며 그리고 이성렬이 거사일자를 6월 13일로 정하여 상피고인 박진효 등을 혁명계획에 가담케 하고 5만환을 거사자금으로 조달했으며 전민의원 김두한 씨에게 6·13 쿠데타 자금 1천만환을 조달해 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각 혁명과업 수행을 방해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반국가단체 구성에 착수하고 그 수괴 또는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는 한편 사람을 살해할 것을 음모한 것이다.22)

 

이 사건에서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자금 동원의 문제였고, 자금 동원을 위해 이성렬(전 백의사원)23)이 김두한을 통해 자금을 동원하려고 했다는 점이었다.24)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동아일보》는 1962년 8월 3일에 진행된 민주당 사건 3회 공판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전달하고 있다.

 

각 피고, 민주당사건 3회 공판서

 

3일 하오 육본보통군재(재판장 이근양 준장 · 검찰관 이용식 대위)는 민주당 사건 3회 공판을 열고 김동호 전 천주교총무원사무국장, 전봉희 민주당 서울시 중구 갑구 당상무위원, 김영배 민주당 서울시 용산구당 감찰위원 및 전충식 전매청장 등 네 피고인을 심문하였다.

 

각 피고인들은 대체로 공소사실 중 범의를 부인하였다.

 

전 피고인은 지난 4월 중순 옛 부하인 노재도(전 전매청주사) 피고인이 집에 찾아와 궁한 소리를 하기에 처음에는 쌀이라도 몇 말 살 수 있게 돈을 주려고 했으나 노는 처음 태도와는 달리 三십만원을 요구하므로 거절했었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盧는 “四·一九를 기해 거사하게 됐다 盧基南(노기남) 주교에게서도 자금 4, 50만 환을 받았고 朱耀翰(주요한) 전상공장관도 30만환을 냈다”면서 자기에게 80만환을 요구, 안되면 30만환이라도 내라기에 거짓수작인 줄 알았으며 그 이유는 교역자인 주교가 정치자금을 댈 리도 없고 만일 어떤 계획이 있다면 주씨 같은 인사가 노 피고인 등에게 돈을 낼 리가 없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25)

 

장면 및 민주당 관계자들과 천주교의 가까운 관계는 노기남 대주교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폐공사 사장 반혁명 사건과 민주당 사건은 가톨릭을 대표하고 있었던 노기남 대주교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다양한 ‘난관’들이 노기남 대주교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4. 가족계획과의 갈등, 그리고 민정이양

 

민정이양을 둘러싼 문제는 군사정부에게 가장 큰 시련이 되었다. 민정이양을 둘러싸고 박정희 의장이 일정을 번복했을 뿐만 아니라 1962년부터 시작된 민주공화당 창당 작업이 난항을 거듭하였기 때문이었다. 군사쿠데타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분열되기 시작했고, 1963년이 시작되자마자 육사 5기 및 함경도 출신들이 중심이 된 쿠데타 세력들의 일부가 반혁명 사건으로 구속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미국과 박정희 정부 사이에서 긴장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민정이양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노기남 대주교의 입장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어렵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박정희 의장이 1962년 3월 16일 향후 4년간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선언을 한 이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시국수습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는데, 여기에 “盧大主敎(노대주교)는 ‘급한 일이 있어 참석치 못한다’고 말하였으며 서울교구 대표 측근자는 ‘정치성을 띤 회의에는 참석치 않을 것이다’고 불참태도를 분명히 했다”고 보도된 것이 전부이다.26)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군사정부의 정책에 대해 가톨릭교회가 반발하고 나섰다. 문제는 가족계획 정책이었다.

 

盧基南大主敎 메시지

 

1963년이야말로 우리 한국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전 국민이 지대한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맞이하는 해라고 생각되는 바입니다.

최근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가족계획에 관한 문제를 삽입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문교정책상 일대과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처사는 사춘기에 있는 남녀 청소년 소녀들에게 성의 난용을 유발하고 청춘남녀들의 만행을 방조하는 길이 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가족계획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고사하고 사회적 성도덕의 타락을 초래하는 악한 결과를 가져오므로 이 사회는 죄악과 만행으로 창일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되는 바입니다. 국가와 사회가 부패되고 죄악으로 충만하게 된다면 천주님께서 이 나라 이사회에 복을 내리시지 않을 것이요, 그러한 처지가 계속된다면 천주님의 무서운 처벌이 이 나라 이 사회 안에 내리지 않을까 극히 두렵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신자여러분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는 이러한 위험성이 있는 교육제도보다도 국민도덕과 윤리를 앙양시키고 국민에게 절제와 근로와 상부상조의 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제도가 이 나라에 실시됨으로써 천주님의 뜻에 의합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이 나라에 건전히 건설되기 위해 노력하며 천주님께 열렬한 기구를 바치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27)

 

가족계획의 문제는 신년사에서도 계속되었다.

 

<盧基南> 국가재건을 위해 분투하시는 각하에게 충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최근 高等學校敎育課程에 家族計劃에 관한 문제를 삽입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같은 처사는 사춘기에 있는 남녀 청소년ㆍ소녀들에게 성의 난용을 유발하고 사회적 도덕의 타락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어 철회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교육으로 안유해서 사회에 죄악과 만행이 창일하고 부패가 충만하게 된다면 천주님은 이 나라에 복을 내리시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처지가 계속된다면 천주님의 무서운 처벌이 이 땅에 도래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28)

 

가족계획 문제는 당시 경제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였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로서는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민정이양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65년 1월 이효상 국회의장실에 모인 사람들은 노기남 대주교가 중심이 되어 ‘인공산아조절’에 대해 비판적 견해가 피력되었다.

 

지난 15일 저녁 국회의장으로서가 아니라 이효상씨 개인 이름으로 된 석찬초대상을 받은 다음 원내각파의원들의 구성은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인지 처음 아무도 몰랐던 일.

 

초대장을 받은 12명은 민주당의 박순천, 조재천, 유성권(불참), 김대중(불참), 한통숙, 김성용(불참) 의원과 공화당의 현오봉(불참), 김주인, 이만섭, 민병권, 서인석(불참) 의원 그리고 민정당의 이영준 의원.

 

도무지 무슨 緣由(연유)인질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날 밤 議長公館(의장공관)엘 가보니 뜻밖에도 盧基南大主敎(노기남대주교)를 비롯한 主敎(주교) 몇 사람과 「로마」 교황청 사절까지 동석해 있어 더욱 놀랐을 밖에… 그러고 보니 전기각 의원은 모두가 천주교신자라 무슨 종교 의식이라도 있는가 했더니 간소한 이의장 생진 파티였다고.

 

이날 밤 화제는 자연종교와 정치 사이를 맴돌았을 수밖에 없었지만 은근한 결의가 이루어진건 천주교가 절대 용납안하는 인공산아조절에 대한 신자 의원들의 단결 약속으로서 앞으로 국책이 되다시피 한 가족계획에 따른 원의엔 이날 밤 모인 의원들은 여야 가리지 않고 모두 이를 반대키로 맹서…?29)

 

군사정부는 노기남 대주교를 달래기 위한 조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1963년 광복절을 맞아 노기남 대주교에게 대통령장 훈장을 내렸다.30) 그리고 노기남 대주교는 동년 10월 19일 로마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박정희 의장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축전을 보내왔다.31) 어쩌면 장면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구파의 윤보선 당선을 바라지 않았을 가능성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성탄절에 “제3 공화국의 탄생을 본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들은 예수님의 평화와 사랑의 정신을 머릿속에 깊이 간직하고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발표했다.32)

 

이 시기 노기남 대주교에게 치명적인 문제들이 대부분 터져 나왔다. 일본 공항에서 압수당한 미군표 문제, 성모병원 신축과 관련된 재정 문제, 《경향신문》 매각 문제, 그리고 부도수표 문제 등이 연속해서 터져 나온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에서 자세한 이야기들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지만, 노기남 대주교로서는 서울대교구의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33) 검찰은 노기남 대주교의 은퇴와 함께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 수사를 종결했다.34)

 

 

5. 은퇴 이후의 활동

 

1967년 노기남 대주교는 현직에서 은퇴하였다. 《경향신문》 매각 과정과 부도수표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만, 박정희 정부는 노기남 대주교에 대해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노기남 대주교에게 수모를 안겨 주었다. 노기남 대주교로서는 호의적이지 않은 박정희 정부 하에서 더 이상 교구장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주교의 이후 행보는 또 다른 의문을 갖도록 한다. 노기남 대주교는 민주화운동에 관여하였던 천주교 내의 움직임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면서, 종교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미 해방 직후 보여 주었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그의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남조선노동당의 핵심인사의 하나였던 양한모의 관계, 과거 군내 공산주의자들의 책임자 급이었던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 그리고 그가 《경향신문》 매각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박정희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는 1965년 7월 19일 여운형의 18주기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나타내기도 했다.35)

 

어쩌면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 가톨릭교회가 한국 정치와 너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났던 현상일 수도 있다. 민주당 정부가 있었던 1년간 가톨릭교회는 많은 사업을 벌였다. 서강대를 신축하고 성모병원 신축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경향신문》 역시 확장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경향신문》뿐만 아니라 모든 신문사들이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경향신문》 매각을 둘러싼 문제가 정치적 보복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지만, 이 역시 가톨릭교회의 정치관여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기남 대주교가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정치성과 무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성은 밑으로부터의 정치성이 아니라 기성 정치인과의 관계 속에서의 정치성이었다.

 

노기남 대주교가 은퇴한 이후 윤보선 씨가 성 나자로원으로 노기남 대주교를 방문하였다. 이때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구파의 수장이었던 윤보선과 장면을 지원했던 노기남 대주교. 20분간의 담소를 제외하고는 다른 내용들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36) 당시 상황을 미루어 추측컨대 윤보선 씨가 대통령 선거에 대한 가톨릭의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이후 노기남 대주교는 박정희 정부의 정책에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1970년 3월 2일 “서구문명의 무비판적 도입으로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도리어 방종으로 흘러 우리나라 고유의 역사적 전통과 민족의 기본이념을 저상시켰다”고 지적하면서 “민족중흥운동을 전개하여 사회의 좌표를 세우는 일에 선봉에 서겠다”고 선언한 3·1 국민회의에 참여하였지만,37) 1971년에는 부정선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권수호대책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물론 주권수호대책위의 면면을 볼 때 박정희 정부에 대한 적극적 비판을 위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3·1 국민회의는 23일 주권수호대책위원회를 구성, 시국선언문을 통해 이번 선거에서 금력이나 권력을 배제한 신성한 주권을 소신껏 행사할 것. 이번 선거에서 어떠한 형태의 부정과 불법도 허용될 수 없고 이를 거역할 때는 준엄한 역사의 심판이 따른다. 학생에 대한 부당한 탄압은 배제되어야 하고 학원은 하루속히 정상화돼야 한다. 이번 선거의 투개표 과정에서 부정이나 불법이 있을 때 전국민의 이름으로 규탄할 것을 경고한다는 것 등 4개항을 결의했다고 발표했다.

 

주권수호 대책위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金斗憲 高凰京 劉鳳榮 李寅基 尹泰林 金善積 李相殷 黃信德 李?潭 盧基南 黃山德 洪以燮 趙義卨 崔恩喜38)

 

1972년 10월 유신 선언 후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유신정부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교회와 경찰협의회는 지난 10일 오전 10시 서울 해남빌딩 수정궁에서 모임을 갖고 「10월 유신과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의 기원」을 결의, 국민총화체제를 이룩하는 데 총력으로 단결할 것과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건전하고 알차게 발전 육성시키자고 다짐했다. 결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10월 유신으로 조국의 통일과업과 번영의 기틀을 확고히 하고 모든 부조리를 자율적으로 시정하는 사회기풍을 함양하여 새마을운동이 민족과업으로 진행되어가는 이때 정신적 바탕으로 평화통일의 기반을 정립하고 국민총화체제를 이룩하는 데 총력으로 단결할 것을 기원한다.

 

2. 우리는 현시국의 중요성과 절박감을 인식하면서 남북 5천만 겨레에게 복음선교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건전하고 알차게 그리고 능동적으로 발전 육성시켜 민주국가로 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로 이룩되기를 기원한다.

 

1972년 11월 10일 서울교회와 경찰협의회

중앙협의회 고문 (가나다 순)

 

…金信謹 牧師 金應祚 牧師 金正俊 牧師 金昌仁 牧師 金熙寶 牧師 盧基南 大主

敎 宋相錫 牧師 尹昌德 牧師39)

 

노기남 대주교는 전두환 정부의 출범에 대해서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내일은 전두환 대통령의 제 12대 대통령 취임식이 있고 그래서 제5공화국이 공식 출범하게 되는 날인데, 거기에 붙여 특별히 무슨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축하할 일이지요. 전 대통령은 믿을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분들도 전 대통령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말씀들을 합니다.” 은퇴 후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으로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데서 보람을 찾는다는 노 대주교는 이야기가 본론에 접어들면서 더욱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해나갔다.

 

“10·26 후 혼란과 시련이 거듭되다가 모두 애쓴 덕에 겨우 안정이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종교인으로서 나는 하느님의 섭리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제5공화국에서는 새 대통령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국민의 행복과 나라의 영광을 위해 노력해줄 것으로 보고 기다립니다.”

 

폭넓은 사면 · 복권 · 감형같은 조치에 관한 노 대주교의 견해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조금 달랐다. 훌륭한 조치이고 화합을 위한 좋은 계기이지만 사회적 혼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여러가지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려있고 이북에서는 남쪽의 정치적 혼란과 민심교란을 항시 노리고 있는 만큼 조금이라고 틈을 보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소신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종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종교인 · 학생 ·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의견이 어떤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노 대주교의 답변은 논지가 분명했다.

 

“신부가 정치강연에 나아가 「아무개 물러가라」고 소리치는 일도 있었는데 나 같으면 단단히 벌했을 거요”라고 그는 단언했다.

 

젊은 신부들의 정의감은 이해하지만 교직자는 정치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겸손한 자세로 모범을 보이고 신용을 얻어서 신도들의 정신적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0)

 

“…과연 오늘날에도 성당은 성역인가? 성역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놓고 여론이 분분하다. 흉악범도 보호해주는 것이 오랜 가톨릭 교회사의 관례라는 주장에 대해 오늘날 성소는 治外法權(치외법권)지대가 될 수 없다는 반론이 맞서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 “국가가 있어야 종교도 존재할 수 있다”면서 “국가의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범인에 대해 교회가 성역일 수는 없다”고 한 노기남 대주교의 견해에 귀를 기울여 봄직하다.41)

 

노기남 대주교의 이러한 정치적 견해가 과연 그의 견해를 모두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문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발언들만 뽑아놓았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그의 발언은 마지막까지 그가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대주교로 기억되도록 했다.

 

 

6. 글을 나오며

 

한국 현대사에서 노기남 대주교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장면을 비롯한 민주당 관계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5·16 쿠데타 이후에 있었던 다양한 ‘난관’들. 사실 이러한 모습들은 노기남 대주교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가 안고 있었던,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가 안고 있었던 실재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그 모습들을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본고에서의 분석을 통해 한 가지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실상 노기남 대주교가 장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 정부 시기를 통해 천주교회는 서강대 설립을 비롯해서 다양한 사업들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그의 명예롭지 못했던 은퇴의 중요한 빌미가 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정권의 지원 하에서의 무리한 사업 확장이 결국 5·16 쿠데타 이후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나오게 된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러나 본고에서의 분석은 많은 한계가 있다. 신문을 통해 드러난 그의 활동을 살펴보았지만, 사상적인 근저에까지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2년부터 1965년 사이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가 한국 교회에 어떻게 반영되었으며, 노기남 대주교의 사상과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노기남 대주교는 스스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새로운 혁신을 위해 자신이 은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하셨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에 대한 기록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노기남 대주교는 선종하시기 1년 전에 기록물 1,000여 점을 한국교회사연구소에 기증하셨다.42) 이 중에 가장 중요한 자료는 42권에 달하는 노기남 대주교의 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일기는 대주교께서 하셨던 일들에 대한 간단한 메모 이상으로 노기남 대주교의 생각을 읽기에는 부족한 자료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결국 노기남 대주교에 대해 자료들을 찾아 그를 통해 한국 천주교회사를 복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이 역시 천주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남아 있는 자료들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료가 있다고 해도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특히 회의나 토론 자료들이 없기 때문에 상황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법원이나 검찰청, 경찰청의 자료 공개 또한 필요하다.

 

그러나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문 자료들 속에서 또한 적지 않게 노기남 대주교와 관련된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 특히 1945년 이후 시기 천주교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일천한 현재의 상황에서 다양한 자료를 통해 교회의 역사를 복원해 나가는 작업은 천주교 자체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자료를 축적하는 작업들이 계속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는 구술사 작업이 교회에서도 활발하게 지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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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교회사연구소, 《인사이드 한국천주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142~147쪽.

2) 노기남 대주교는 장면의 임종을 함께 하였다(<張勉博士(장면박사) 逝去(서거)>, 《동아일보》 1966년 6월 5일자).

 

3) 정대철의 《장면은 왜 수녀원에 숨어 있었나》(1997, 동아일보사)와 백남익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장면 정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김철규 신부였다고 한다. 김철규 신부는 당시의 인사에 깊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http://unsuk.tistory.com/entry/%EB%B0%B1%EB%82%A8%EC%9D%B5%E7%99%BD%E5%8D%97%E7%BF%BC-%EC%8B%A0%EB%B6%80-%EC%A6%9D%EC%96%B8. 김철규 신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세례명을 지어 주었고, 대통령 당선미사를 베풀어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대중은 김철규 신부의 집전으로 노기남 대주교실에서 세례를 받았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1), 2010, 101쪽).

 

4) 노기남, 《나의 회상록》, 332~334쪽.

5) <내가 겪은 二十世紀 (이십세기)(13) 盧基南(노기남) 大主敎(대주교)>, 《경향신문》 1972년 3월 31일자.

6) 《동아일보》 1949년 3월 24일자.

 

7) 이 시기 장면의 비서였던 선우종원은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1960년 4·19 혁명 이후 귀국하여 장면 정부 하에서 조폐공사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5·16 쿠데타 이후 반혁명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군사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군사혁명재판사》 4, 1962, 415~416쪽).

 

8) <내가 겪은 二十世紀(이십세기)(13) 盧基南(노기남) 大主敎(대주교)>, 《경향신문》 1972년 3월 31일자.

9) <내가 겪은 二十世紀(이십세기)(13) 盧基南(노기남) 大主敎(대주교)>, 《경향신문》 1972년 3월 31일자.

10) 《경향신문》 1960년 5월 29일자.

11) 《경향신문》 1960년 6월 6일자.

12) 《경향신문》 1961년 3월 24일자.

13) <서로도와 좋은백성되자>, 《경향신문》 1960년 12월 24일자.

14) <忍耐로써 祖國을 保全>, 《경향신문》 1961년 1월 1일자.

15) <가톨릭 勞動靑年會發足>, 《경향신문》 1961년 10월 22일자 ; , 《경향신문》 1961년 10월 23일자.

16) <韓美紐帶强化市民大會>, 《동아일보》 1951년 11월 5일자.

17) 박태균,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 4~5부 참조.

18) <天主의 것은 天主께 바쳐야한다>, 《경향신문》 1961년 12월 24일자.

19) <難關 참고 結實을>, 《경향신문》 1962년 4월 22일자.

20) <敎階制度 따라 本分 다할 터>, 《경향신문》 1962년 6월 30일자.

21) 《한국군사혁명재판사》 4, 415~423쪽.

22) <기소장요지>, 《조선일보》 1962년 7월 27일자.

 

23) 여기에서 백의사는 해방 직후 테러 활동을 했던 단체로 보인다. 민주당 사건에 관련된 관계자들의 면면을 보면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과거 청년단 관계자, 자유당 관계자 등이 적지 않다. 백의사와 청년단 관련자들이 있다는 것과 김두한이 자금 동원에 관련되었다는 사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김두한은 자금 제공에 대해 부인하였다.

 

24) <자금 요청 여부 규명>, 《조선일보》 1962년 8월 16일자.

25) <犯意를 否認>, 《동아일보》 1962년 8월 4일자.

26) 《동아일보》 1963년 3월 27일자.

27) <平和 위해 協商을>, 《경향신문》 1962년 12월 24일자.

28) <무엇보다 相扶相助>, 《동아일보》 1963년 1월 1일자.

29) <家族計劃에 反對盟誓?>, 《동아일보》 1965년 1월 23일자.

30) 《동아일보》 1963년 8월 14일자.

31) 《동아일보》 1963년 10월 19일자.

32) <조용한 反省을 ‘크리스머스 · 메시지’에서>, 《경향신문》 1963년 12월 24일자.

 

33) 노기남 대주교가 부도수표 문제로 불구속 입건된 것이 신문에 보도된 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노주교를 입건>, 《동아일보》 1967년 3월 10일자). 이 사건이 알려진 후 보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노기남 대주교는 은퇴를 선언했다.

 

34) <오늘 중 매듭>, 《동아일보》 1967년 3월 28일자.

35) <呂運亨先生 18周忌>, 《동아일보》 1965년 7월 19일자.

36) <尹潽善씨 盧大主敎 방문>, 《동아일보》 1967년 3월 31일자.

37) <3·1국민회의 개최>, 《매일경제》 1970년 3월 2일자.

38) <主權守護對策委 구성>, 《동아일보》 1971년 4월 23일자.

39) <10月維新 촉진다짐 서울敎會 · 警察협의회 決議>, 《동아일보》 1972년 11월 13일자.

40) <第5共和國의 出帆맞아 盧基南 대주교에 듣는다>, 《경향신문》 1981년 3월 3일자.

41) <餘滴>, 《경향신문》 1982년 4월 5일자. 4

42) <盧基南 대주교 記錄物 1,000점 기증>, 《동아일보》 1983년 2월 11일자.

 

[교회사 연구 제35집, 2010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박태균(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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