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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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아! 어쩌나: 죄를 안 짓고 살 수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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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28 ㅣ No.536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01) 죄를 안 짓고 살 수는 없나요?

 

 

Q.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새내기 신자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제가 새삼 깨달은 것은 제가 그동안 너무 많은 죄를 아무 생각 없이 짓고 살았구나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숨고 싶은 마음도 들어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어떻게 하면 죄를 안 짓고 마음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으로,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A. 열심인 자매님의 마음 때문에 오히려 제가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자매님처럼 거룩한 삶을 지향하는 분들이 많아지는 그날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오는 날이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교회는 자매님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힘을 합해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무리를 제압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터를 만들려고 하는 공동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매님의 신실한 마음은 반드시 하느님에게서 보답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자매님이 가지신 생각 중에 자칫 지나치면 발생할 수도 있는 심리적 문제는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가끔 자매님처럼 죄를 안 짓고 살 수는 없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영성가가 죄를 피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를 했습니다.

 

사람을 피해 수도원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엄격한 수도원일수록 세상과 격리되기 위해 사막이나 산악지대 절벽에 수도원을 세워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그것도 모자라 홀로 은둔의 삶을 산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분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은 세상 안에서 일상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편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죄’와 ‘인간적 허물’을 구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죄와 인간적 허물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죄라고 생각하고 고해성사를 보며 병적 죄책감을 키우고 삽니다. 이렇게 사는 분들은 일견 열심이고 거룩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상당히 힘겹고 고통스러운 짐을 지고 살기에 마음의 편안함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죄와 인간적 허물을 구분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줄이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신학적으로 죄란 우리가 고의성을 갖고 상대방을 해코지해서 상대방이 상처를 입거나 해를 입은 결과입니다. 그것이 클 때 그것을 대죄라고 합니다. 인간적 허물이란 사람이 가진 약하고 충동적 본성들 즉, 죄의 원인 인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싸잡아서 모두 죄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사람들은 자기 영혼을 늘 마음 안의 감옥에 가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사는 것 자체가 죄이고 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가 아닌 인간적 허물을 죄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목욕탕에서 때수건으로 때를 벗기다 못해 살가죽까지 벗기는 분들을 연상케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일시적으로 후련함이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피부병이 생기듯, 죄도 아닌 인간적 허물을 자꾸 죄라고 스스로 몰아붙이면 나중에 세심증(완전강박증), 결벽증 등 신경증적 증세에 시달리게 됩니다.

 

심지어 무기력증에 걸려 일상생활을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하지만, 자신의 인간적 허물은 그냥 안고 살아야 정신건강에 유익합니다. 또 이렇게 자신의 인간적 허물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허물에 대해서도 관대한 아량을 보입니다.

 

성목요일 주님께서는 제자들 발을 씻겨 주려는 파격적 행동을 하십니다. 당대에는 신발이 구두가 아니고 길도 아스팔트 길이 아니었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면 지저분한 발을 씻기는 일은 종들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그런 비천한 일을 나서서 하려고 하신 걸까요? 그것도 당신 제자들 발을.

 

이유는 간단합니다. 발은 사람의 인간적 허물, 사람이 숨기고 싶은 치부의 상징적 부위입니다. 이런 발, 이런 허물을 나무라지 말고 당신이 보듬어주고 씻겨 주듯이 따뜻하게 대해주라는 말씀을 비유적 행위를 통해 가르치신 것입니다.

 

자매님께서도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세상살이를 멀리하려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주님처럼 세상 사람들의 발, 세상 사람들의 인간적 허물을 보듬어 주신다면 마음의 편안함을 얻으실 것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는 마음의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8일, 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 상담전화 02-727-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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