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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에서 배운다: 아비뇽 유배와 이후의 서구 대이교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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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22 ㅣ No.530

[교회사에서 배운다] ‘아비뇽 유배’와 이후의 서구 대이교 시대를 돌아보며


로마 가톨릭교회 전체를 통솔하는 교황청은 어디에 있는가? 모두가 한결같이 이탈리아의 ‘로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1300년대와 1400년대 초반을 살았던 가톨릭 신자들은 프랑스의 아비뇽이나 로마에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다른 답이 나올까? 아비뇽과 로마에 각각 교황이 있었다니 무슨 말인가? 이 문제는 이후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이러한 과거의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던지며, 오늘날 내가 속한 가톨릭교회의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은 그 자체로 소중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아비뇽 유배’란?

1300년대 초 프랑스 왕 필리프 4세(1285-1314년 재위)는 프랑스 안의 성전기사수도회를 해산하고 막대한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국가 재원을 마련하는 한편, 교황청을 프랑스로 옮기고자 하였다. 이는 서구 유럽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교황청을 이용하고자 한 그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보르도 출신의 대주교로 교황에 선출된 클레멘스 5세(1305-1314년 재위)는 리옹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뒤, 로마가 아니라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정착하였다.

이후 클레멘스 5세부터 그레고리오 11세(1370-1378년 재위)까지, 6명의 프랑스인 교황들이 선출되어 아비뇽에서 교도권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를 일컬어 ‘아비뇽 유배’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사건에 빗대어 로마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를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고 불렀다.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 이유

그렇다면 클레멘스 5세가 로마가 아니라 아비뇽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주요 원인으로 먼저 당시 교황령이 위치한 로마의 혼란한 사회, 정치적 상황을 들 수 있다.

사실 13세기 중반 이후, 여러 명문 귀족 가문들 사이의 다툼과 군중의 소요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위협 등으로 로마는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고, 교황이 페루자, 나폴리, 비테르보 등 로마 안이 아니라 밖에서 피신처를 찾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당시 클레멘스 교황이 직면한 긴급한 문제들을 들 수 있다. 곧 선임 교황인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왕 사이에 빚어진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고, 다른 한편으로 교황청의 유지와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자 프랑스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하는 가운데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드러난 문제점

클레멘스 5세와 그의 뒤를 이은 프랑스인 교황들 - 요한 22세(1316-1334년 재위), 베네딕토 12세(1334-1342년 재위), 클레멘스 6세(1342-1352년 재위), 인노첸시오 6세(1352-1362년 재위), 우르바노 5세(1362-1370년 재위) - 의 재위 시기 동안에 아비뇽의 교황청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업적들이 꽤 많음에도,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아비뇽 천도를 단행한 클레멘스 5세 교황의 경우,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성전기사수도회의 와해에 공조하거나 또는 이를 방관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비엔 공의회(1311-1312년, 제15차 보편 공의회)에서 결정된 성전기사수도회의 해산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또한 아비뇽에서 교황청의 체계를 갖추고 전 교회적 차원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요한 22세의 경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과 관련하여 그가 취한 태도는 당시 프랑스와 경쟁관계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큰 반발을 초래하였고, 결국 황제에 선출된 바이에른 공국의 루드비히의 지지 아래 로마에서 니콜라오 5세(1328-1330년 재위)가 대립교황으로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다른 한편, 아비뇽 시기의 교황청은 그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자원을 마련하는 데서도 문제를 드러내었다. 재정적 궁핍을 해결하고자 아비뇽의 교황청이 도입한 각종 조치들이 이행되는 가운데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며, 교황청에 대한 불만을 증대시키고 그 권위를 실추시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교황의 로마 귀환과 대립교황의 등장으로 말미암은 서구 대이교(大離敎)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더욱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1300년대 중반,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형성된 교황령이 내부의 소요사태로 존립을 위협받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교황의 로마 귀환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는데, 당시 스웨덴의 비르지타 성녀(1303-1373년)와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1347-1380년)의 계속된 경고와 탄원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결국 가타리나 성녀의 탄원에 응답하듯,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그의 재위 말기인 1377년 초 마침내 로마로의 귀환을 단행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약 70년간 지속된 교황의 아비뇽 유배 시기는 그 종말을 고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위기에 처한 교황령을 보존하고 교황권을 다시금 확립하고자 아비뇽에서 로마로 귀환한 그레고리오 11세는 기존의 라테란 궁이 아니라 바티칸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378년 교황이 세상을 떠난 후 새로운 교황의 선출을 둘러싸고 혼란이 계속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로마에서 진행된 콘클라베에서 이탈리아인 우르바노 6세(1378-1389년 재위)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 선출이 ‘무서운 공포와 강요 속에서’ 이루어졌기에 무효라고 주장한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별도의 장소에서 모임을 갖고 프랑스인 클레멘스 7세(1378-1394년 재위)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기에 이르렀고, 그가 아비뇽에 자신의 거처를 정함으로써, 결국 교회는 또다시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분열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대립교황의 난립과 교권의 실추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은 각각 상대를 고발하고 파문하는 한편, 자신에 대한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교황청의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자원을 마련하려고 각종 특전과 은사를 경쟁적으로 부여하였다.

유럽의 각국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로마에 있는 우르바노 6세와 그의 후임자들 - 보니파시오 9세(1389-1404년 재위), 인노첸시오 7세(1404-1406년 재위),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년 재위) - 을 지지하는 쪽과 아비뇽에 있는 클레멘스 7세와 그의 후임자인 베네딕토 13세(1394-1423년 재위)를 지지하는 쪽으로 양분되었고, 특정 교구나 같은 수도회 안에서도 누구에게 순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분열의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물론 대립교황의 등장과 계속되는 서방교회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409년 피사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어 기존의 두 교황인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가 폐위되고 알렉산데르 5세(1409-1410년 재위)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대립교황의 문제는 쉽게 종식되지 않았다. 알렉산데르 5세가 이듬해에 죽고, 요한 23세(1410-1415년 재위)가 그 후임이 되었지만, 기존의 교황들이 자신의 교황직을 고수함으로써, 결국 교회에는 3명의 교황이 생기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콘스탄츠 공의회 개최와 공의회 우위설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 그리고 교황의 로마 귀환 이후 초래된 대립교황 문제는 그 자체로 교황의 권위를 실추시키기에 충분했다. 이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친 위클리프(John Wycliff, 1328?-1384년)와 후스(John Hus, 1372?-1415년)가 영적이고 순수한 교회를 주창하며 로마교회를 비판하고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 것도 그 이유가 없지 않았다.

아무튼 난립한 교황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의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1414년 말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공의회(1414-1418년, 제16차 보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교황의 부재 가운데에서 공의회를 주도한 유럽의 추기경들은, 위클리프와 후스를 단죄하는 한편, Haec Sancta의 반포를 통해 공의회 우위설, 곧 교황의 공의회 예속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세 교황을 모두 퇴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단일한 교도권을 확립하기로 방향을 잡고, 마르티노 5세(1417-1431년 재위)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제각기 새 교황을 자국 내에 머물도록 계획하였지만, 교황은 이를 물리치고 로마의 바티칸으로 귀환하였다.

마르티노 5세 교황의 선출과 로마 귀환은, 한 교황을 중심으로 교회의 일치를 공고히 하고 교권을 다시금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교황의 권한은 사실상 이전에 비해 매우 축소되고 제한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천명된 공의회 우위설이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티노 5세의 후임 에우제니오 4세 교황(1431-1447년 재위)이 1431년 바젤에서 공의회(제17차 보편 공의회)를 개최하고, 1437년 공의회 우위론자들과의 대립을 피하려고 페라라(Ferrara)로 공의회 거행 장소를 옮겼을 때, 공의회 우위론자들이 에우제니오 4세를 폐위하고 펠릭스 5세(1439-1449년 재위)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한 일은, 당시 교황과 공의회 우위론자들 사이의 대립 구도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이후 펠릭스 5세가 교황의 지위를 포기하고, 또 공의회 우위설의 기세가 점차 약화됨으로써 교회는 더 이상 대립교황이 등장하는 아픔을 겪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공의회 우위설에 대한 교황의 두려움은 이후로도 여전히 상존했으며, 그 결과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공의회 개최를 통해 신속히 이에 대처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교황에 대한 잘못된 인식

오늘날 교황은 과거에 지녔던 세속 군주로서의 면모를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다. 19세기 후반 교황령에 속한 모든 지역이 통일 이탈리아의 영토로 복귀되는 가운데, 교황은 자연스럽게 기존에 자신이 지녔던 세속 군주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령의 상실과 그에 따른 교황권의 변화는, 교황에게 신앙과 윤리, 도덕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그 본연의 영적 권위를 회복하도록 함으로써 현대세계에서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정립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1300년대 초반 교황청의 아비뇽 천도는 교회의 영적 선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교황청이 좀 더 안정된 조건 속에서 자리 잡기만을 원했던 당시 교황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보편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면모가 아니라 교황령을 통치하는 세속 군주로서의 교황의 면모가 더 부각되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아비뇽 유배’는 이후 대립교황의 등장과 그에 따른 교황권의 실추, 그리고 교회 일치의 파괴라는 일련의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4세기 70여년간 계속된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와 15세기 전반까지 계속된 대립교황의 시대를 되돌아보며, 교황좌가 가지는 초국가적이고 보편적인 의의의 소중함을 되새겨야 하겠다.

그리고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이 세상 보편 교회의 목자’인 교황과 이 세상에 흩어진 가톨릭교회는, 어떤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과 교회의 영적 선익을 위해 내리는 결단들을 통해, 그 참다운 권위를 유지하고 확대해야 한다는 사실도 자각해야 하겠다.

* 한윤식 보니파시오 - 부산교구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세계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7월호, 한윤식 보니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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