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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아! 어쩌나: 중독성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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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28 ㅣ No.537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02) 중독성 신앙생활 (상)

 

 

많은 분이 상담을 의뢰하는 주제가 ‘중독성 신앙생활’입니다. 중독성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외견상 아주 열심인 신앙인으로 보이기에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거나 추종자들을 이끌어 나름 세를 형성해 사람들을 오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평화신문 창간 23돌을 맞아 이런 병적 신앙생활에 중독되는 유형을 알려 드리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킬까 합니다.

 

 

1. 물질적인 것에 대한 경배를 요구하는 중독성 신앙의 예

 

가톨릭교회는 다른 교회로부터 우상숭배를 많이 한다는 비난을 자주 받습니다. 성당 입구에 있는 성모상, 성물방에 가득한 성물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모세 당대 사람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파괴하시고, 당신 모습을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가톨릭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아무런 불편함 없이 믿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 선생님 말씀뿐만 아니라 교재를 사용하는 것처럼, 신앙인들 마음도 약하기에 순수 의지만으로는 어려워 눈에 보이는 성물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때 성물은 교육 부교재이지 경배 대상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물 자체를 경배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물에서 핏물이나 눈물 비슷한 것이 생겼다고 하면 갑자기 그 성물 자체가 신성한 대상이 되고 경배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왜 그럴까요?

 

심리학자 융은 “사람은 먹고 마시는 본능만큼이나 강하고 긴급하게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향하게 하는 이 종교적 충동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건강하다면 기도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리적으로 병적 상태에 놓였을 때는 기도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 거짓된 상을 만들고 영적 삶에 손상을 가져올 정도로 그것에 자신을 맡기고 매달리는 중독현상이 생깁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시도하면서 이 일치를 물질이나 창조된 실체를 통해 찾는 것입니다.

 

이런 중독 대상은 영적 완성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면서 일시적으로 심리적 온전함을 체험케 하거나 내적 갈망을 충족시켜줍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부적처럼 성물을 소지하고 다니고, 심지어 그 대상을 신적 존재처럼 모시는 우상숭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대상물이 인간의 불안감을 감소시켜주는 일시적 효과가 있긴 합니다. 문제는 불안의 근본적 문제에 직면하는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심리적 도피처 역할을 해서 사람이 퇴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런 신심 행위가 정통성을 상실한 병적 중독현상이라 규정하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도 쉽게 인정하지 않고 오랫동안 심사하는 것입니다.

 

 

2. 중독성 기도

 

교회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주님은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늘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당신도 늘 기도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외로운 영혼에 힘을 불어넣는 영적 에너지의 근원이고, 하느님과의 소통을 통해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돕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수도자와 성직자가 기도의 중요함을 설파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사람들에게 내적 힘을 줘서 힘겨운 현실 문제를 해주면 가장 바람직한데, 때로는 심리적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마치 심리적 방공호처럼 기도 안으로 도피해 현실과 격리된 삶을 사는 경우가 있어서 문제입니다. 대체로 이런 분들은 ‘부정’이란 방어기제를 많이 사용합니다.

 

부정의 방어기제는 인간이 가진 가장 원시적이고 낮은 수준의 방어기제로, 눈을 감으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거라 주문을 외면서 나쁜 일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골방 안에서 기도에만 매달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기도가 백해무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을 왜곡해서 스트레스를 덜어주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닥치는 여러 어려움에 대해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산다면 아마 감당 못할 정도로 약한 사람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 안으로 들어가 부정이란 방어기제로 자기 방어를 하는 행위는 자기보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기도가 지나치게 잦고 길다면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가장 큰 부작용은 다른 사람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기도만 하면 다 해결되는데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냐며 외부 정보에 귀를 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문을 닫으면 자기감정이 어떤지,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이렇게 문제 직면을 피하게 되면 눈덩이가 언덕을 굴러내려가며 점점 더 커지듯 문제가 삶에 스며들어 삶을 점령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도피성 기도는 주변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모두 기도로 해결된다면서 도움을 거절해 결국 상황을 더 악화시키게 됩니다. 세 번째는 도피성 기도에 중독되면 정신적으로 미성숙해집니다. 인간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경험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합니다. 사실에 접근해 정신적 몸부림을 치러내야 치유와 성장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데, 부정의 방어기제인 도피성 기도 안으로 숨어버리면 이런 경험이 없어 심리적 퇴행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15일, 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03) 중독성 신앙생활 (하)

 

 

3. 허영심에서 비롯된 중독성 기도

 

인간의 정신은 외적 자극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신체를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은 외적 자극을 통해 끊임없이 양육됩니다. 이것이 정신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고, 결코 완벽한 균형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즉, 정신세계는 상대적 안정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융은 정신적 균형을 회복하려 일시적으로라도 세상 감각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고 했고, 그런 의미에서 명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정신세계는 열림과 닫힘의 연속성에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허영심에서 비롯된 중독성 기도는 폐쇄적입니다. 허영심이란 열등하고 부족한 느낌을 말합니다. 허영심은 개인의 존재 목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쳐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들을 세상 누구보다도 중요하고 성공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특히 여러 가지 조건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신앙공동체는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고 지배하기 좋은 토양을 가진 곳입니다. 이들은 과도한 기도나 혹은 인정받기 어려운 사적 이적들을 통해 사람들 관심과 존경을 받고자 하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성공하고 나면 나름대로 세력을 확보한 뒤 신앙공동체 안에서 정신적 터줏대감 노릇을 하면서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자건 성직자나 수도자건 간에 비난과 모함으로 몰아붙여 자신들 터가 흔들리는 것을 방어하려 합니다. 

 

이렇게 허영심에서 비롯된 기도에 중독된 사람들은 심리적 폐쇄 정도가 도를 벗어날 정도로 심해서 ‘교주 콤플렉스’ 같은 병적 콤플렉스에 걸리거나 정신병에 걸리게 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4. 중독성 자기비난식 기도

 

가톨릭교회 신심 행위 중에 자기성찰이란 것이 있습니다. 자기성찰은 자신이 하느님 뜻을 따라 살고 있는지 자기 길을 점검해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심리치료에서 자기탐색과 유사한 것으로, 자신의 삶을 좀 더 건강하고 유익하게 만들기 위한 신심 작업입니다.

 

이런 자기 점검 행위는 비단 가톨릭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 영적 삶을 희구하는 종교들이 가진 공통적 자기수련 방법입니다. 그런데 간혹 신자 중에 자기성찰과 자기비난을 혼동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자기비난의 정도가 심각할 정도로 강해서 정신적 문제와 신경증적 증세(종교적 우울증과 불안증, 강박증 등)에 시달리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분 중 상당수는 대개 어린 시절 성장 과정에서 심한 열등감이나 불안감을 안고 살았던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일정 기간 심리상담을 받고 나면 호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그런 기도 방법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기 비난을 지속적으로 하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왜 병적 신앙생활 양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요?

 

보상감소 이론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유발해 관심과 동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즉, 자신을 비하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하고 격려해주면 스스로 부족하게 느꼈던 자신감이 회복되는 느낌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또 침울한 모습을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수준을 낮추고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비난이 심한 사람들, 아무리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고 자학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런 여러 혜택을 얻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구 때문에 자학중독적 기도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생활은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장기간 지속하면 주위 사람들이 그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 됩니다. 왜냐면 그런 사람에게서는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달래주느라 지친다는 느낌만 받기 때문입니다.

 

또 자학중독적 사람들은 주위 사람마저 우울하게 만드는 ‘오염의 근원’ 역할을 하므로 점차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거나 떠나게 됩니다. 정작 본인은 버림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로 인해 보상이 감소하게 돼 우울증에 걸리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신앙생활이란 주님 도움으로 기도의 삶을 통해 마음과 몸의 건강을 되찾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는 명의가 있는가 하면 자기 마음대로 환자를 다뤄서 병을 악화시키는 돌팔이가 있는 것처럼, 신앙공동체 안에도 신자들을 건강한 삶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병적 삶으로 이끄는 ‘사이비 교주’ 같은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을 조심하고 또 멀리해야 합니다. [평화신문, 2011년 5월 22일, 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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