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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천주교 선교 전략의 토착화: 공소회장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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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28 ㅣ No.536

[교회 역사 여행] 천주교 선교 전략의 토착화 - 공소회장 제도


공소회장제도는 교우촌에 설립된 공소의 관리와 신부가 방문하지 못하거나 없는 경우 그를 대리해서 교우촌을 신앙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선교사들의 수적 증대보다, 늘어나는 비신자 관리에도 힘이 벅차던 당시에 교우촌의 유지 및 관리에 공소회장들의 역할은 전교회장 못지않게 중요하였다. 1912년에 발간된 “會長必知”라는 지도서에는 공소회장의 지위를 ‘공소의 두목으로서 본당신부를 대신하는 자’로 규정함으로써 성직자를 보조하는 일종의 부제(副祭, 신부가 되기 전의 성직 단계)로 인식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 제도는 무엇보다도 임금 없이 희생과 봉사를 하는 명예직이라서 보수를 어느 정도 받았던 전교회장과는 차별성이 있었다. 당시에 자금이 부족하던 선교사들에게 공소회장의 존재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드망즈 주교는 1913년, 1914년, 1915년도에 계속해서 공소회장의 이런 활동이 선교사업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들에 의해서 선교사의 활동은 증가됩니다. 반면 그들이 없으면 선교사의 활동은 감소되거나, 아니면 완전히 정지상태에 이릅니다. (중략) 그의 직분은 완전히 무보수입니다. 그러면서도 공소의 종교적인 일은 모두 그의 손을 거치게 되므로 그의 직분은 한가로운 자리가 아닙니다. 이 직책에 대한 무보수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이익을 가져옵니다. 이들 약 400명에게 비록 얼마 안 되는 수당을 준다는 것이 물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釜山敎區年報”, 1987, 38~40, 46~47, 55 인용)

이러한 공소회장들의 자질과 소양을 높이려는 교육 또한 중요하였다. 이들에게 열성을 꾸준
히 갖게 하고, 그들 사이의 유대를 견고히 하며, 열성이 지극한 공소회장과 접촉을 통해 자극을 받게 하여 또 그렇게 해서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얻게 함으로써 신부의 부족을 메우려는 선교전략이 수립되었다. 그 결과에 대해 선교사들은 대부분 만족하였다고 말하고 있다(“釜山敎區年報”, 1987, 47). 그들은 열성적으로 그들의 교우촌을 모범적인 공소로 만들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에게 회장으로서의 본분과 관련된 의무에 대한 규범을 적은 규범집을 배부하기도 하였는데, 이 규범집이란 1913년 9월 10일에 드망즈 주교가 집필하여 조선 남방교회의 모든 회장들에게 반포한 “회장본분”을 가리킨다. 이들을 통해 일관성 있는 교회의 홍보와 신자교육 및 공소예절을 담당할 수 있게 하려던 의도였다. 당시의 공소예절이란 담당 신부가 모든 교우촌을 방문하지 못하던 일요일에 공소회장의 주례로 이루어지는 약식 미사의례를 말하는 것으로 공소회장에게는 이를 주재할 임무가 있었으며, 이 제도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공소회장제도는 전교회장 제도와 함께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일반신자) 조직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전국적으로는 1933년에 5개 교구 주교들의 공동교서가 만들어짐으로써 평신도 조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를 가톨릭운동(Actio Catholica)이라고 하며, 평신도 사도직에 속하는 여러 활동과 그 단체들을 가리킨다. 이 용어는 비오 10세가 처음 사용한 ‘Azion Cattolica’란 말에서 유래되어 비오 11세 등 역대 교황들이 적극 장려하였으므로 전세계 교회로 전파되었다. 한국에서는 1933년 5개 교구 주교의 공동교서가 만들어짐으로써 적극적이고 활발한 단체조직과 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釜山敎區年報”, 1987, p.197 각주 참고). 이것은 천주교 선교전략의 큰 변화가 일어나는 기폭제 역할이었다는 데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37년부터는 전교회장을 이원화시켜 공소회장과 전교회장 제도로 구분하였다. 당시 공소회장 수는 대구 305명, 전주 201명, 광주 43명, 그리고 전교회장은 대구 76명, 전주 35명, 광주 21명 등이었다(“釜山敎區年報”, 1987, 262). 공소회장은 교우촌에 정주하는 회장으로 교우촌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전교회장은 말 그대로 전교(선교)를 위해 돌아다니면서 활동하는 직책을 맡았는데, 10년 사이에 전교회장은 132명으로 약 6배나 증가하였다.

한편 전교회장은 남성들만 임명된 것은 아니었다. 1915년도 드망즈 주교의 보고서에 “여성 전교회장들은 무보수로 봉사하였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釜山敎區年報”, 1987, 55-56)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남자들보다 먼저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에 여성 전교회장제도는 여성들을 선교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교회 초창기의 박해시기에 활동하였던 여성 지도자들의 계보를 잇는다는 데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당시에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소극적이었던 만큼 여성 전교회장들의 활약 여하에 따라 비신자 여성들의 선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2회에 걸쳐서 언급한 전교회장제도와 공소회장제도에서 평신도 사도직이 언제부터 조직되어 운영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고 있는 교회의 원동력이 바로 천주교 선교전략의 토착화에서 비롯된 평신도 사도직 활동 덕분이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

[2012년 5월 20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6-7면, 최진성(미카엘 솔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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