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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소리 박득순 - 이윤일 요한 성인을 눈에 잡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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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09 ㅣ No.735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소리(素里) 박득순(朴得錞, 1910~1990)


‘이윤일 요한 성인을 눈에 잡은 사람’

 

 

2016년, 우리는 새해를 프란치스코 교황의 칙서 『자비의 얼굴』에 따라 ‘자비의 특별 희년’으로 지내고 있다. 이렇게 기쁜 소명의 해가 병인박해 때의 어둠과 불안을 가셔주며 새롭게 떠오른다. 한 해에 사람들이 수천 명이 처형된다면 지인, 친인척으로 해서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150년 전 병인년 새해가 밝았다. 탑승인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된 세월호 승선자의 희생은 한국인 마음에 큰 상처를 그어놓았다. 이를 보면 1866년 병인년의 불안이 어떠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신자만 불안했던 게 아니었다. 혹시 신자인 사람하고 같은 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많았을 터였다.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박해는 1866년 봄,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1868년(무진박해), 그리고 1871년(신미박해)의 네 차례에 걸친 파동으로 이어져 대략 8,000여 명 정도의 순교자를 내었다. 이 6년간에 걸친 불안은 살아있음이 차라리 고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를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싶어한다. 그때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어한다.



종교화가 이희영(?-1801)

조선에 거룩한 신앙의 여명이 밝아왔을 때 성당도 없고 사제도 없는 가운데 조그만 성물이나 상본이 신앙의 표징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1784년 이승훈은 북경에서 많은 책과 십자고상, 상본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동시에 교회초기부터 이 교리서, 성물, 성화 등이 문제가 되었다. 순교자 이도기가 체포되었을 때 관장은 십자고상과 책들을 살펴보고 나서 그 책과 그림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다. 박취득의 경우도 두 번째 신문 때 관장은 그를 형틀에 올려놓고 때리며 집게로 살을 집어 뜯었다. 그러면서 책과 십자가, 패와 그림들을 불사르라고 명령했다. 이처럼 초기부터 신자들은 성화나 상본을 소중히 여겼다.

초기 신자 중에 성화작가도 있었다. 벌써 국내에서 성화를 직접 그리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희영은 여주에서 살다가 1797년 친구인 김건순의 전교로 입교했다. 그는 입교 후 서울로 이사하여 성화, 상본 등을 그리며 생활했다. 이희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현의 숙부인데, 이현은 홍익만의 사위였다. 홍익만은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의 장인이기도 했다. 즉 그는 초기 교회 핵심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그는 황사영에게 예수상 3본을 그려 보낸 일이 탄로나 1801년 참수되었다. 이희영은 성화 이외에도 산수 등을 즐겨 그렸다. 유작으로 사생풍의 〈견도犬圖〉와 남종화풍의 산수도가 여러 점 전해 온다. 오세창은 〈견도〉를 서양화법을 이용하여 그린 최초의 작품이라고 평했다. 1827년 정해박해 무렵에도 성화나 상본이 대량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이 체포되었을 때 관장은 많은 상본과 유리로 만든 성물과 그림 등을 가져다가 그 출처를 물었다. 이경언 자신도 많은 성화를 그렸다.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영정

비록 조선 땅에서 성화나 상본이 제작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순교자들을 그릴 수 없었다. 박해시대 순교자들은 초상화를 남길 겨를이 없었다. 물론 순교자들은 사진으로도 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렌즈를 이용하여 상을 맺게 하고 그 상을 찍어내는 사진기법은 19세기 들어오면서 활발히 일어났다. 이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한 최초의 국가가 프랑스였다. 우리나라에서 기해박해가 일던 무렵인 1839년은 프랑스 파리에서 사진이 탄생된 해라고 한다. 사진은 1850년대 초상화를 대신하는 작업으로 주목받았고 1860년대에는 기록화로 쓰이기 시작했다. 사진이 대중화된 때는 1888년 조지 이스트먼이 작고 간편한 카메라인 ‘코닥’을 개발한 이후였다. 그렇기 때문에 1839년에 순교한 앵베르 주교도 사진이 아닌 동판화로 뜬 초상화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박해시기에 순교한 우리의 성인, 복자, 순교자들은 영정을 새롭게 그려야 했다. 그렇지만 순교자들은 시복될 때까지 영정을 갖지 못했다. 1925년 조선교회 순교자 79위가 시복되었다. 시복식이 거행되던 바티칸 성당의 중앙 제대 왼쪽은 순교자 김효임과 그 동료, 오른쪽은 유대철의 신문 장면, 정문 위에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정면 제대 위의 복자 전체가 함께 그려진 걸개그림이 있었다. 이는 모두 이탈리아인 쥬스띠니아니 교수가 그린 그림이었다. 1968년 시복식 때는 정광섭 교수가 베르뇌 주교를 선두로 한 시복기념화 ‘영광’을 그렸다. 24위가 한꺼번에 있는 추상화였다. 그뿐 아니라 1984년 우리 복자들이 시성될 때에도 103위가 모두 함께 그려진 성화가 있었다. 그 성화는 1977년 혜화동성당의 박희봉 주임신부가 한국순교복자들의 시성을 전망하면서 79위 복자와 24위 복자를 화가 문학진에게 부탁하여 그려서 혜화동성당에 걸었던 그림이었다. 이 성화는 1984년 5월 6일 여의도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103위 성인시성식 제대 옆에 모셔져 교황의 축성을 받았고 현재 혜화동성당에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우리 순교자들은 몇 분을 제외하고는 개개인의 영정이 없다는 말이다.


이윤일 요한 성인과 박득순 화백

나약한 인간인 우리는 눈에 보이면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성미술 작가는 이를 가능케 하고, 우리의 보고자 하는 본능적 열망에 답을 준 사람들이었다. 병인순교자 이윤일 성인은 소리(素里) 박득순(朴得錞) 화백에 의해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을 맞아 이루어진 103위 시성식이 끝나고 나서, 대구대교구에서는 이윤일 성인이 미리내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교구에서는 관덕정순교기념관 설립을 서두르는 한편, 성인의 유해를 모셔오고 성인찬가와 기도문, 영정제작 등에 몰입했다. 이윤일 성인 영정은 1987년 1월 21일에 열린 순교 120주년 유해봉안 기념미사에서 소개되었다. 서울에서 제작된 이 영정은 그해 1월 16일 김시완 부위원장이 모셔왔다.

박득순은 6.25 한국전쟁 중에 부산에서 요셉이란 이름으로 영세했다. 후일 서울 서대문본당에서 여러 해 총회장으로 활동했고, 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도 역임했다. 제자들은 스케치 여행에서 남들은 모두 잠들었는데도 그가 홀로 묵주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는 원래 성격이 곧고 직선적인데 그의 가톨릭 신앙도 그러한 테두리에서 돈독함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성화도 적잖게 그렸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은 1971년의 〈십자가의 고난〉이다.

박득순은 1910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약 2백 섬을 추수하던 부농이었다. 17세 때인 1926년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다. 그의 그림 재능은 보통학교 2~3학년 무렵부터 두드러졌는데, 5학년 때 그림을 좋아하던 담임선생을 만나 크게 격려받고 화가의 꿈을 다졌다. 더욱이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때 아펜젤러 교장이 장래 희망을 묻자 “미술학교에 유학하여 화가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해서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미술가는 부농의 장남에게는 허락되지 않던 꿈이었다. 그는 배재학교 2학년 때부터 혼자 유화에 몰두했다. 그러나 4학년 때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배재학교 전교생이 서울에서 맨 먼저 이에 호응, 봉기하며 항일시위투쟁을 선언하고 동맹휴학 상태에 들어갔다. 1930년까지 사태가 지속되고 그는 겨울방학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그는 배재학당을 아주 자퇴한 결과가 되어버렸고, 수년간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미술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부친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이때 그는 결혼을 했고 아이가 태어났다.

박득순은 결국 독단으로 집을 떠나 동경으로 직행했다. 그는 신문배달, 철공소 노동 등으로 학비를 해결했다. 박득순은 1934년 동경의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이미 박득순의 사실적인 묘사력과 아카데믹한 회화역량이 특출하게 발휘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사실주의 화가인 고이소 료헤이의 작품수법을 배웠고, 이와 아울러 렘브란트의 신비한 광선, 모네 등의 구도를 익혔다. 그가 변함없이 추구하며 실현하려고 한 회화작업은 자연미의 재현에 집중되었고, 그 신념에서 자신의 수법과 표현적 특성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박득순은 1938년 공부를 마치고 이듬해부터 경성부 도시계획과에 근무했다. 이후 8.15 민족해방 때까지 조선미술전람회 응모출품과 입선, 특선 등으로 서양화계 진입에 성공했다. 그 사이 아내가 월남해 오기를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송순희와 재혼했다.

박득순은 거의 국전을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였다. 그는 1981년에 관전(官展)제도가 제30회전을 끝으로 발전적으로 막을 내리게 될 때까지 빠짐없이 국전에 참여했다. 국전은 해마다 가을철 최대 규모의 미술계 행사였다. 신인 응모작품 심사결과를 에워싸고 물의도 많았던 그 국전에서 그는 어떠한 비판적 논쟁에도 가담함이 없었다. 그는 국전의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의 위치에서 오로지 자기 충실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출품하곤 했다. 그가 각별히 공력을 쏟은 역작과 대작은 주로 국전을 통해 발표되었다. 그는 주로 소녀, 정물, 풍경 등을 그렸다. 또 그는 종군작가로도 활동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 그는 가족을 거느리고 대구로 피난을 왔다. 1951년 대구에서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육군종군화가단이 결성되면서 그는 단장에 선출되어 전장 스케치의 종군활동을 했다. 이 시기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아군 공병대에 잡힌 괴뢰 탱크〉 등이 알려져 있다. 1966년에는 해군본부 위촉으로 월남전선 기록화도 제작했다. 박득순은 화가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였다. 그는 1947년 서울 용산중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이어 1953년부터 서울대학교에 강사로 나갔다가 1955년부터는 장발의 추천으로 이 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 대우로 부임해서 1961년까지 근무했다. 그 후 수도여자사범대학, 상명여자사범대 교수를 거쳐 1972년 영남대학교에 부임, 1976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영남대 문리대 예술학부장으로 일했다.

박득순은 타고한 예술적 재질 외에 주위에서 장사로 여길 만큼 대단한 체력과 만능의 운동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씨름대회에 나가 황소를 끌고 오기도 했다. 일본 유학 때는 권투를 했다. 그런 그의 주먹은 보통사람보다는 크고 돌같이 단단했다. 그러나 그가 그림에 임할 때는 정반대로 무척이나 자상했다. 소묘를 보아줄 때는 학생을 일으켜 세우고 그 자리에 앉아 대상을 파악하는 방법과 그리는 과정을 철저하게 시범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서 오는 지식을 자상하게 털어놓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재능이 탁월하게 나타난 분야는 인물화이다. 그는 인물화에서 탁월한 묘사력과 사실적 생명감 및 선명한 표현분위기를 조성했다. 1950년대 이후 각계의 인사와 국가적인 인물의 초상화 요청이 쇄도했다. 박득순은 회화예술의 기본이 인물화라고 역설했다. 그는 “인물화를 제대로 그릴 줄 알아야 풍경화, 정물화도 옳게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작품생애에 그대로 반영된 실천적 확신이었다. 박득순은 미술계의 화목, 또 사실주의 화풍, 현장스케치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또 이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1972년의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비롯하여 각종 상을 수상했고, 한국미술협회 고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피선되는 등 여러 일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린 이윤일 성인의 영정이 1991년 관덕정에 모셔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는 1990년 11월로 예정된 동아일보사 주최의 회고전도 보지 못한 채 그해 9월에 선종했다.

약한 푸른빛을 띠는 점잖은 선비 이윤일 성인의 영정! 우리 눈앞에 나타난 이윤일 성인은 작가를 통해 우리에게 말 걸기를 한다. 이제 그것을 바탕으로 각자 자신의 순교자를 그려야 한다. 스스로 성인의 모습을 새겨야 한다. 그래야 성인들과의 통공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훈련을 통해 예수님과 동무하며 하느님만이 그 이름을 특별히 기억하시는 순교자들의 얼굴도 보게 될 것이다.

[월간빛, 2016년 1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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