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해방 전후 대구대목구의 사제단 내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갈등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06 ㅣ No.1634

해방 전후 대구대목구의 사제단 내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갈등

 

 

머리말

 

1. 일본인 대구대목구장 주교와 사제단

  1) 일본인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의 관계

  2) 한국 신부들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의 갈등

  3) 대구대목구 한국인 신부들의 차기 대구대목구장 임명에 대한 제안

  4)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의 차기 대구대목구장 임명에 대한 제안

 

2. 대구대목구장 서리 주재용 바오로 몬시뇰의 임명과 사제단의 갈등

  1) 전주지목구장 주재용 바오로 몬시뇰의 대구대목구장 서리 임명

  2) 대구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기대

  3) 대구대목구의 한국 신부들과 프랑스 신부들 간의 화해를 위한 시도

  4) 대구대목구장 서리 주재용 바오로 몬시뇰과 카다스 신부와의 갈등

  5) 대구대목구장 서리 주재용 바오로 몬시뇰과 한국 신부들 간의 불만

 

3.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제안들

  1) 대구대목구의 문제 해결을 위한 주일 교황대사의 제안

  2) 파리외방전교회를 위한 독립 선교지 설립에 대한 제안

  3) 한국 교황 순찰사 패트릭 번 몬시뇰의 대구 방문 및 보고서

  4) 후속 조치들

 

맺음말

 

 

국문 초록

 

필자는 해방 전후로 대구대목구에서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시작하여 파리외방전교회를 위한 독립 선교지로 충청남도가 선정되고, 주재용 몬시뇰이 대구대목구장 서리를 사임하면서 새로운 대목구장이 임명되는 일련의 과정을 다룬다.

 

20세기 초에 한국 교회는 절대적으로 한국인 사제들이 부족했고,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신부들이 양성되어, 점차 숫자가 늘어났다. 이는 한국인 주교의 임명에 대한 신자들의 염원과 함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외국인 선교사 주교들이 한국인 사제들에게 지목구장이나 대목구장 자리를 넘겨주어야 했다.

 

일제강점기 말에, 서울대목구는 다행히 노기남 주교가 서울대목구장으로 임명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 간의 갈등을 크게 키우지 않으면서 무난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대구대목구의 경우, 하야사카 주교가 대구대목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이 일본인 주교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일본인 대목구장은 프랑스 선교사들보다는 한국인 신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고, 이에 선교사들은 실망했다.

 

해방 이후에도, 사임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일본인 주교는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면서 전주지목구장 주재용 몬시뇰이 대구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되었고, 그가 재임하던 시기에 주 몬시뇰을 둘러싸고,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

 

초대 주한 교황 순찰사로 온 패트릭 번 몬시뇰이 대구에서 벌어진 사건을 조사하고, 보고서와 서한을 통해 해결 방안을 교황청에 제시했다. 그는 충청남도를 서울대목구에서 분할하여 파리외방전교회를 위한 독립된 선교지로 설립하는 것과, 주재용 몬시뇰이 사임하면서 대구의 사건과 관련 없는 한국인 신부를 새로운 대목구장을 임명하는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대로 후속 조치들은 이루어졌고, 갈등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본고의 연구가 인류복음화성에 찾은 새로운 사료들의 소개와 함께, 자료들의 부족으로 인해 비어 있던 조각의 퍼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교회사 연구 제62집, 2023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권영명(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 부소장)]



파일첨부

1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