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예수 성심과 최양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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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12 ㅣ No.1384

[돌아보고 헤아리고] 예수 성심과 최양업 신부

 

 

온 교회에 예수님 마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겠고 닿지 않은 때가 없겠지만, 한국교회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이 어떻게 전달되었고, 그 마음은 최양업 신부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기록상 예수 성심 첨례(지금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를 분명하게 지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864년 목판본 『천주성교공과』(이하 『공과』로 표기)가 나오고, 그 이전에 필사본이 유통되던 때에 이미 축일을 지냈을 것이다. 옛 가톨릭 기도서인 『공과』에는 예수 성심 첨례가 분명하게 나오고, 그날 바칠 기도문들이 매우 길게 수록되어 있다. 이미 한국교회가 시작되면서 전승되어 온 기도서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훨씬 이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냈음이 틀림없다. 한글 천주교 서적의 간행을 담당했던 다블뤼 주교는 이 『공과』가 나온 배경에 관해 설명해 준다.

 

“그런데 이번 박해(1860년 경신박해) 덕분에 5권의 교리서가 막 교우들에게 배포된 상태이며, 아직 작업 중인 2권도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 있습니다. … 더위가 오기 전에 무엇보다 우리 기도서 작업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소중한 총서가 완성되면 저는 찬미의 노래 테데움을 부를 거예요. 게다가 그 서적들은 거의 전적으로 조선인 사제 토마스 신부의 작업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고작해야 8, 9개월 그 작업에 매달렸을 뿐입니다”(1861년 1월 24일 다블뤼 주교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다블뤼 주교는 천주교 서적 간행이라는 책임을 맡으면서 최양업 신부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소각된 한글 서적 중에 「공경녀슈셩심」이 있는 것을 보면, 한국교회는 어쩌면 그 시작부터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이 있었는지 모른다. 또한 예수 성심을 전 세계로 전파하고, 보편 전례력으로 확장시키는 발단이 된 곳이 프랑스였기 때문에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예수 성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영향 속에서 교육을 받아서인지 최양업 신부의 편지와 삶 속에서도 ‘예수 성심’에 대한 뚜렷한 신심이 나타난다. 사제 서품을 받고 나서 스승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그의 순명이 예수 성심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제가 거룩한 순명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저는 벌써 우리 포교지인 조선에 들어가 있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저 세상에서 우리 신부님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저의 장상이 명하시는 것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마우신 신부님을 통하여 신학교의 모든 신부님들에게, 특히 우리의 지도자이신 바랑 신부님께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늑방 안의 심장으로부터의 순명과 인사의 문안을 드립니다”(1849년 5월 12일,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위의 편지를 통해 최양업 신부의 생애는 한마디로 “예수 성심께 대한 사랑과 장상께 대한 순명”으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최양업 신부가 대부분 번역했다는 「예수성심첨례」 중 「예수 성심이 받으시는 능욕을 기워 갚으며 외우는 기도문」(일부 현대어로 윤문) 일부를 읽어보자.

 

지극히 달으신 예수여, 너 I 사람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거늘, 저들은 이 사랑을 잊어버리며 소홀히 여기며 경솔하게 여기며 또한 배은망덕함으로 갚나이다. 이제 우리는 네 제대 앞에 부복하여 악인들이 각처에서 네 사랑하올 성심을 가볍게 여기고 능욕하는 것을 특별히 공경으로써 기워 갚기를 원하나이다. 구하나니 지극히 인자하신 예수여, 너 I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워 갚으심과 전달하심을 보시어 우리들의 자원 보속함을 받으소서.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죽기까지 너를 충성으로 섬기게 하시며 또 우리에게 끝까지 항구하는 큰 특은을 주시어 마침내 우리 모든 이로 하여금 영원한 본향에 도달케 하소서. 너 I 저기서 성부와 성신과 함께 무궁세에 생활하시며 왕하시나이다. 아멘.

 

위 기도문에서 하느님을 ‘너’로 지칭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서적에서는 존칭으로 계속 바뀌고 있는 반면, 『공과』에서는 1960년대까지 이러한 형식이 보존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위의 기도문처럼 그의 마지막 사명을 다하고, 병자성사를 받는 과정에서 “예수, 마리아”라는 마지막 기도와 함께 선종하셨다. 그분의 선종은 예수 성심께 대한 사랑이요, 공로요, 일치였다. 다블뤼 주교는 최양업의 선종에 대한 안타까움을 신학생이었던 당신의 동생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6월에 우리의 유일한 조선인 사제 최 토마스 신부가 갑작스레 병을 얻어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멀고 긴 사목 순방을 마친 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던 길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이 상실감을 너에게 표현할 수가 없구나. 이 상실감을 이해하려면 그가 조선 대목구에 바친 수많은 봉사와 그가 조선교회에 가져다 준 모든 이익을 봤어야만 한다. 그 말인즉,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는 확실히 가장 대체하기 힘든 인물이었다는 것이지. 그러니 우리의 애도와 애석함이 얼마나 클지 짐작해 보아라.…”(1861년 9월 [이시도로] 다블뤼 신학생에게).

 

가경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과 선종 160주기를 기억하며 시복이 이루어져 그분의 모범이 더 잘 알려지기를 기원합니다.

 

[교회와 역사, 2021년 6월호,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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