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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재능나눔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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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8-23 ㅣ No.586

[경향 돋보기 - 새로운 기부, 재능나눔] 재능나눔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올해 OECD가 34개 회원국 국민들의 삶의 질을 측정한 ‘행복 지수’에서 한국은 하위권인 26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로 진입했다고 하면서도 왜 행복하지 않다고 할까? 가장 큰 원인으로,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 있고, 더군다나 빈곤 계층을 위한 사회안전망과 복지가 허술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실시한 복지사각지대 전국조사에서 약 2만여 명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제도적으로 어떤 복지혜택도 받지 못하고 소외된 채 방관되어 있는 극빈계층을 도와주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는데, 정부의 노력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인 종교계의 나눔과 배려 운동이 사회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최근 천주교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한 ‘재능나눔’이라는 신선한 움직임이 일고 있어서 사회적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재능나눔에 관한 그리스도교적인 성찰을 해보고자 한다.

 

 

새로운 질서로서의 나눔

 

예수님은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신 분이다. 그분의 나눔은 매우 낯선 형태이다. 그분은 당신의 능력을 나누는 것을 넘어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심으로써 죄스러운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다른 이들을 살리는 이러한 이치는 한 알의 밀알에 비유된다(요한 12,24 참조). 예수님에게 죽음은 나눔의 정점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죽음을 통한 삶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보여주신다.

 

나눔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질서이다. 초대교회는 내것, 네 것 구별 없이 서로 물건을 나누어 쓰는 가운데 서로 일치하여 기존의 다른 공동체와 차별화한다. 영생을 원하는 부자 청년 이야기는 이를 반영한다(마르 10,17-22 참조).

 

예수님은 영생을 원하는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신다. 재물을 많이 가진 청년은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간다.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눔을 실천하지 못한 부자 청년은 새로운 질서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토록 원하던 영생을 얻지 못한다.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은 나눔이다.

 

나눔이란 새로운 질서를 실천하는 곳이 이 세상의 대안 공동체이며, 교회 공동체는 그 역할을 하는 곳이다. 교회가 부를 축적하고 가진 자와 기득권자 편에 서서 부와 권력을 누리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한다면 이 땅의 질서를 바꿀 수 없고 대안 공동체가 될 수 없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고자 늘 자신을 쇄신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다.

 

 

올바른 소유 개념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신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이 말씀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으로서 보존하고 가꾸라는 명령이다.

 

인간은 모든 만물의 소유주가 아니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만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우리는 단지 하느님에게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받았을 뿐이다. 인간은 이 지상의 나그네이며 순례자일 따름이다. 유한한 존재로서 잠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사용할 따름이지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 자원, 돈, 식량, 집, 땅 등 어느 것이라도 다 하느님의 것이지 내 사적 소유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태 22,21) 하신 예수님 말씀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하느님 것임을 반증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다음 복음을 선포하도록 그들을 파견하실 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각자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과 지력까지 거저 주어진 것이고,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게 하신다. 제자들이 깨달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게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때의 나눔이 진정한 복음 선포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몸의 건강과 쪼갤 수 있는 시간, 재능을 가진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아낌없는 나눔을 실천할 것이다.

 

 

섬기는 사람

 

진정한 나눔은 섬기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시는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기까지 자신을 비우시는 참 봉사자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에게 발을 씻긴 제자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뒤 예수님처럼 참 봉사자의 길을 걷는다.

 

나누는 사람은 봉사하는 사람이다. 봉사자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나눔과 봉사는 고통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하지만 그저 연민에만 그칠 때 사람을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게 되는 이분법적 차별이 생겨난다. 불쌍한 사람을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본다면 그들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만드는 결과가 된다.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다. 불쌍한 사람도 공동체에서 주체적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줄 때 그들도 주체가 되어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내가 나누고 주는 데 항상 주체로 남게 된다면 자칫 자기 중심, 자기 이익, 자기 사랑이라는 유혹에 빠지게 될 수 있다.

 

 

재능나눔

 

나눔은 물질과 돈에 국한되지 않고 비물질적인 것도 나눌 수 있다. 나눔의 요소로 마음, 재능, 물질을 드는데, 물질은 나눔이 외형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며, 재능과 마음은 물질의 이면에 있는 나눔의 모습이다. 여기서 재능은 물질과 마음 양쪽을 포괄한다. 예를 들어, 가르치는 재능이 있다면 가르치기 위한 물질적인 도구와 피교육자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있어야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재능은 하느님이 주신 각자 고유한 탈렌트이다. 탈렌트 비유 이야기(마태 25,14-30 참조)에서 각자 받은 탈렌트를 늘린 종은 두 배의 상을, 늘리지 못한 종은 벌을 받는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주신 재능을 이웃을 위해 잘 활용해야 함을 강조한다.

 

탈출기에서도 성소 건립을 위해 재능을 발휘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너희 가운데 재능 있는 이는 모두 와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어라”(탈출 35,10). 따라서 재능나눔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위이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 주시는 여러 은사를 소개한다(1코린 12,1-11 참조). 병을 고치는 은사,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예언의 은사, 식별의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거나 해석하는 은사 등 모든 은사는 공동선을 위하고 성령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한다. 성령께 받은 은사는 각자 고유한 재능에 속한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통해 은사와 재능을 받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언급한다. 사랑이 없으면 자랑하고, 교만해지며, 뽐내기 때문이다(1코린 13,1-3 참조).

 

 

사랑의 구체적 실천인 재능나눔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일 것이다(마르 12,28-34 참조). 우리는 무수히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지식으로 알아들을 뿐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데 70년이 걸렸다고 술회하신 김수환 추기경님 말씀대로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동사이지 명사는 아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야고 2,20)고 한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나,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고 한 요한계 저자의 말씀은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강조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2007년에 세상을 떠난 피에르 신부님을 아직도 존경한다. 그는 ‘엠마우스’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집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이다.” 타인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라는 뜻이다.

 

타인 없이 나 혼자 행복할 것인가? 타인과 더불어 행복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내려야 할 근본적인 선택이라고 피에르 신부는 강조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재능나눔은 타인과 함께 행복하고자 하는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우리 가슴을 울린다. “사랑 가운데 있지 않는 믿음은 불 꺼진 등대와 같다.”

 

하느님께 받은 우리 각자의 재능을 필요한 이웃과 나눌 때 우리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결과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하고 촉구하신다.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현재와 미래 삶의 안정과 보장을 위해 주식, 부동산, 보험 등에 투자하지만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오히려 걱정과 근심, 불안과 두려움 속에 지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재능을 나누고 봉사한다면 그것을 하늘나라에 쌓아두고 평생 보장받을 것이다.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재능나눔

 

교회의 선교 사명과 봉사는 동전의 양면이다. 복음 실천이 곧 봉사가 되고, 봉사가 그리스도인 개인과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삶과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선교와 봉사는 분리될 수 없다.

 

교회 봉사는 넓은 의미에서 교회복지에 포함될 수 있다. 교회 복지는 지역의 문화적 수준과 복지를 향상시켜 함께 더불어 잘 사는 행복한 지역 공동체를 지향한다. 하지만 최근 급격한 문화 변동에 따라 ‘불우이웃돕기’를 중심으로 전개된 기존 교회복지나 사회봉사가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봉사가 지역사회의 변혁을 지향하기보다 봉사적 개념의 활동에 방점을 두어왔기 때문이다.

 

문화의 시대에 공공 영역에서 교회의 공적 역할의 기대와 함께 지역과 사회의 새로운 소통 방식을 모색하는 과제가 포함되어야 한다. 일반 사회봉사 영역인 지역단체나 행정당국과의 네트워크와 협력 구조 연대를 개발하여 지역복지 실천에 구체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천주교 일각에서 벌이는 ‘재능나눔 운동’은 이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떠오르는 새로운 교회복지 모델이 될 것이다. 재능나눔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교회복지라는 공동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때 더욱 많은 이들에게 수혜가 이루어질 수 있다.

 

올해 서울대교구 역촌동본당에서는 모든 본당 신자가 참여하는 재능나눔이 될 수 있도록 ‘재능나눔은행’을 설립한 바 있다. 이 은행은 신자 각 개인의 직업이나 재능을 모으고 분류하여 도움이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나누는 시스템이다.

 

환자 방문이나 병자 돌봄과 같은 기존 봉사활동뿐만 아니라 독거노인 가정을 방문하여 오래된 집을 수리하는 데 인테리어 전문가들의 봉사, 어려운 형편의 청소년 상담이나 멘토 역할, 보유한 기술이나 예술 나눔 등등 모든 신자가 다양한 방법으로 재능나눔에 참여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재능나눔은행’은 지역에 있는 노인종합복지관, 구청 사회복지과, 지역주민자치센터 등과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가진다. 또한 지속적으로 복지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극빈 계층을 찾아내어 필요한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물질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문화복지의 향상도 배려할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다른 본당으로도 확산될 것으로 전망한다.

 

어느 영성신학자는 회심에 ‘마음, 생각, 지갑’이라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지갑의 회심이라고 한다. 머리와 마음으로는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만 자신의 일부를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행동은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능나눔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일상에서 하는 행위이다. 그런 면에서 교회 안에 ‘나눔 문화’가 정착되고 확산되어 물질뿐만 아니라 재능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를 언제 어디서나 증언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 김민수 이냐시오 - 서울 역촌동본당 주임신부이며,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1년 8월호, 김민수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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