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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대안리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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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9 ㅣ No.481

[한국 교회 사적지 순례]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대안리 공소


1. 대안리 공소의 설립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의 작은 마을 대안 1리. 마을 입구에서 10여 분을 걷다 보면 작은 언덕 위에 옛 모습을 간직한 대안리 공소를 만날 수 있다. 흥업면은 원시 서남방으로 8km 지점에 있고, 북쪽으로는 원주시, 서쪽으로는 호저면 · 지정면, 동쪽으로는 관부면과 충청북도 제천시, 남쪽으로는 귀래면에 인접해 있다. 대안리는 흥업면의 남서쪽에 있고, 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안 1 · 2 · 3리로 구분되었다. 대안리의 문화재로는 천연기념물 제279호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있고, 조선 효종의 4녀 숙휘공주와 5녀 숙정공주의 태(胎)를 봉안한 운산태실(雲山胎室), 불교 유적인 약사암지(藥師庵址) 등의 유적이 있다.1)

대안리 일대에 천주교 신앙이 언제 전파되었는지는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신자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따르면, 박해시대 신자들이 대안리 남쪽에 있는 덕가산(700m)에 숨어 살다가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지금의 공소가 있는 마을로 내려와 살면서 교우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2) 이처럼 교우촌이 형성됨에 따라 공소가 설립되었는데, 설립 시기는 신자들의 구전에 의거하여 1892년경으로 추정하여 왔다.3) 그런데 1892년경에 공소가 설립되었다면, 원주 지역을 관할하였던 풍수원 본당(1888년 설립)과 원주 본당(현 원동 주교좌 본당, 1896년 설립)의 교세 통계표나 보고서 등에 대안리 공소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 조선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가 1900년 10월 9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1월 6일 풍수원에 도착할 때까지 원주 본당의 관할 20개 공소와 8개의 교우촌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는데, 방문한 곳 가운데 대안리 공소는 없었다.4) 당시 대안리 공소가 있었다면, 원주를 방문한 뮈텔 주교는 대안리 공소를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을 텐데 말이다. 이러한 점에 의문을 가진 필자는 본 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검토하였는데, 그 결과 공소의 설립 시기를 알려주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비자들이 많은 곳은 특히 원주 근교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미 지난 가을 주교님께서 이곳을 지나가실 때 나와서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 수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봄 사목 때 새로운 다섯 공소를 만들어야 했는데, 매번 신부의 방문을 요청하는 새 신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선량한 이들로, 지금까지 제가 해결해야 할 어떤 사건도 일으키지 않았고, 주님을 위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도안리(To-an-ri), 항골(Hang-Kol, 혹은 홍골 Hong-kol), 분줄(Poun-tjyoul), 오리절(Ori-tjyel), 고사리골(Kosarikol)이 다섯 새 신자 마을의 이름입니다.

위의 자료는 원주 본당의 3대 주임 드브레(E. A. J. Devred, 兪世竣, 1877-1926) 신부가 1901년 6월 4일에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드브레 신부는 봄 사목 때, 즉 1901년 봄에 원주 지역에 다섯 공소를 설립하였는데, 그중에 ‘도안리’가 바로 대안리 공소였다. 원주 본당의 교세 통계표나 보고서에는 ‘To-an-ri’(도안리), ‘Toi-an-ri’(되안리) 혹은 한글로 ‘되안리’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서 대안리 공소는 1892년경이 아니라, 1901년 봄에 설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신앙의 전파와 공소 강당의 건립

대안리 공소가 처음 기록된 원주 본당 1900-1901년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당시 신자는 24명의 작은 공소였다. 그러나 이후 신자수가 꾸준히 늘어 1901-1902년에는 40명, 1902-1903년에는 85명, 1903-1904년에는 76명이었고, 1909-1910년에는 112명이 되었다.5) 이처럼 신자수가 증가한 것은 신자들의 독실한 믿음과 전교 활동 덕이었는데, 드브레 신부의 1903년 5월 28일자 보고서는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특히 두 마을이 예비자 교육에 대한 열성으로 두드러집니다. (중략) 다른 한 곳은 도안리입니다. 원주에서 2리외6)(8km) 떨어져 있습니다. 올해 25명의 성인 세례자를 얻었습니다. 이 마을은 전체가 새 신자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의 열성적인 믿음과 주변 외교인들을 개종시키려는 열의로 두드러집니다. 그들은 꽤나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주일날 종종 원주에 와서 미사에 참례합니다.

이와 같이 공소가 설립되고, 신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공소 강당이 세워졌는데, 이와 관련해서 뮈텔 주교의 일기를 참고해 보자.

1910년 11월 12일 성당에는 드브레 신부가 만든 신부 방이 딸려 있다. 축성해 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진짜 성당이기에 성당 축성 예절로 축성하였다. 성당은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미사를 드리고 38명에게 견진을 주었다. 성당 축성을 축하하기 위해 큰 잔칫상이 차려졌다. 9시 반에 20리 거리인 원주로 떠났다.7)

뮈텔 주교는 1910년 11월 2일 경기 남동부, 강원도 일원 등지로 사목 방문을 떠나 조은이, 능말, 퇴침이 등지를 거쳐 11월 7일 풍수원에 도착하여 11월 9일 풍수원 성당을 예수 성심께 봉헌하였다. 그런 다음 11월 11일 원주 본당의 5대 주임 조제(J. Jaugey, 楊秀春, 1884-1955) 신부가 머물고 있던 대안리 공소를 향해 출발하였다.8) 뮈텔 주교가 대안리 공소를 방문한 이유는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대안리 공소 강당을 축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소 강당은 이때 건립된 것이 아니라 ‘드브레 신부가 만든 신부 방이 딸려 있다’는 것으로 보아 뮈텔 주교가 방문한 1910년 이전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드브레 신부가 원주 본당에 재임한 기간이 1900년 5월부터 1906년 8월까지였고,9)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1년 봄이었으므로, 대안리 공소 강당은 1901-1906년 사이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공소 강당이었지만, 뮈텔 주교가 ‘진짜 성당’이라 했을 만큼 당시로서는 훌륭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신자는 더욱 늘어 1917-1918년에는 159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19-1920년 80명을 시작으로 급감하여 1923-1924년에는 100명 이상이 감소한 36명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신자수가 급감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자료를 아직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규명해야 할 문제이다. 1930년대에는 약 50여 명의 신자들이 대안리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3. 공소의 변화

대안리 공소는 한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전쟁 직후부터 원주 지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원주 시가지는 폐허로 변하였고, 수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났다.10) 대안리 공소는 한때 원주 지역을 장악하였던 북한군의 막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11) 이러한 혼란 와중에 미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한 원주읍의 주민들은 가까운 대안리나 지정면 등지로 피신하였다. 이후에도 강원도 북부 지방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약 6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들이 원주로 몰려들었고, 그들 중 일부는 대안리의 북쪽에 있는 사제리에 머물렀다. 그들을 위해 사제리에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피난민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던 까닭에 공소도 설치되었던 것 같다.12) 그러나 휴전된 후에 많은 피난민들이 원주를 떠나고, 신자들도 감소함에 따라 사제리 공소는 자연스럽게 폐쇄되어 대안리 공소로 합쳐졌다. 원동 본당사에는 1954년(혹은 1956년) 3월에 대안리 공소를 분리하여 술미 공소를 설립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정확하지 않다.13) 조제 신부가 1919년 10월부터 1923년 3월 사이에 작성한 보고서에 술미 공소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14) 따라서 1954년(혹은 1956년)에 술미 공소를 설립한 것이 아니라, 대안리 공소의 도움으로 술미 공소가 재건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갈 무렵, 대안리 공소를 개보수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었던 까닭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개보수 공사가 실시되었는데, 자료와 증언에 따라 작업 시기가 1950년대, 1960년대, 1965-1966년 등으로 엇갈려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초가였던 지붕은 기와로 바꾸었고, 모든 대들보도 교체하였지만, 벽체 등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당시 신자들이 대안 2리까지 운반된 기와를 지게로 공소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와가 무거워 기둥이 그 하중을 이기지 못함에 따라 1970년대, 보다 정확히는 1972년 3월 이후에 지붕을 슬레이트로 교체하였다. 하지만 슬레이트 지붕에 잦은 누수가 발생하자 2007년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슬레이트를 제거하고 대신 금속 기와로 교체하였다.15) 이처럼 몇 차례에 걸쳐 개보수 공사가 이루어졌지만, 대안리 공소는 목조 가구식 한옥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하여 2004년 12월 31일 대안리 공소를 등록문화재 제140호로 지정하였다.16)

현재 대안리 공소는 여느 농촌 지역의 공소와 같이 농촌 인구의 감소 등의 어려움으로 신자수가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자들은 친환경적인 농법과 도농의 교류를 통해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해 나가고 있다. 2006년 6월 6일 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www.wrn.or.kr)가 국내 최초로 대안리를 유전자 조작 거부지역으로 선포한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17) 약 100년의 역사를 가진 공소와 친환경적인 농촌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 이번 여름에는 대안리 공소를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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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주시사(민속 · 문화재편)”, 원주시, 2000, 756-764쪽, 907-908쪽, 980-981쪽, 1083-1084쪽.
2) 오영환 · 박정자, <원주 대안리 공소>, “순교의 맥을 찾아서”, 가톨릭출판사, 2009, 330-331쪽.
3) 원주교구 원동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원동 백년사”, 천주교 원주교구 원동교회, 1999, 267-270쪽 ; 오영환 · 박정자, 위의 글, 2009, 330-331쪽.
4) 원주교구 원동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위의 책, 1999, 68-69쪽. 당시 원주 본당은 양주, 양평, 여주 등 경기 남동부 지역과 강원도 원주, 홍청, 양구, 화천, 춘천 등지를 관할하고 있었다.
5) 1904-1905년부터 1908-1909년까지의 교세 통계표가 없어 신자수를 파악할 수 없다.
6) 리외(lieue) : 과거 프랑스의 거리 단위로, 1리외는 약 4km이다.
7)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4(1906-1910년),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498-499쪽.
8)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위의 책, 1998, 494-499쪽.
9) <원동 주교좌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6675-6678쪽.
10) “원주시사(역사편)”, 원주시, 2000, 634-640쪽.
11) 오영환 · 박정자, 앞의 글, 2009, 330-331쪽.
12) “원주시사(역사편)”, 원주시, 2000, 634-642쪽 ; 원주교구 원동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앞의 책, 1999, 267-270쪽.
13) 원주교구 원동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위의 책, 1999, 114쪽, 271-272쪽.
14) 보고서에는 ‘원주군 흥업면 대안리 슐뫼’라고 기록되어 있다.
15) “원주 천주교 대안리 공소 기록화 조사 보고서”, 문화재청, 2007, 36-40쪽.
16) “원주 천주교 대안리 공소 기록화 조사 보고서”, 문화재청, 2007, 36-40쪽, 110쪽. 등록문화재 제도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급속히 사라져 가는 근대문화유산을 목록화하고 보존하기 위해 2001년에 도입되었다(오영환 · 박정자, 앞의 글 2009, 330-331쪽).
17) <서울 우리농, 유전자 조작 거부지역 선포식>, “가톨릭 신문” 2006년 6월 18일자 ; <그래도 농사꾼은 풍년을 바랍니다>, “경향잡지” 1666호(2007. 1), 28-33쪽.

[교회와역사, 2010년 6월호, 양인성(대건 안드레아 ·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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