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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심리학이 만난 영화: 부주의 맹시 - 감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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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24 ㅣ No.817

[심리학이 만난 영화] 부주의 맹시 - 감시자들

 

 

경찰청 감시반 소속 하윤주(한효주)의 기억력은 초능력에 가깝다. 마치 감시 카메라에 찍힌 장면을 보는 것처럼 자기 눈으로 본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하윤주의 임무는 지하철 2호선에 탄 목표물을 감시하는 것이다.

 

그녀는 사십대 후반 남성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기억해 낸다. 목표물의 인상착의. 그가 타고 있던 지하철의 객차 번호. 지하철에서 벌어진 사건과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 목표물의 동선과 그가 움직인 정확한 시간. 심지어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번호부에 적던 목표물의 필압까지 확보해 두었다.

 

하윤주가 놀라운 기억력으로 목표물에 대해 설명할 때, 갑자기 감시반의 황 반장(설경구)이 목표물이 들고 있던 신문에는 뭐가 쓰여 있었는지 묻는다. 하윤주가 멈칫거린다. 목표물이 지하철에서 쇼핑백을 든 여자와 부딪히면서 신문을 떨어뜨리는 것을 분명히 봤다. 다시 한번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어 본다. 지하철에서 봤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 가면서 신문에 대한 기억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녀의 이미지 속에 있던 모든 대상은 지워지고 신문만 남는다. 이제 신문의 내용을 읽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이 보여 준 것은 글자가 다 지워진 신문지뿐이었다. 하윤주의 기억에는 신문의 기사 제목이나 내용은 입력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 황 반장이 소리친다. “부주의 맹시!”

 

 

부주의 맹시

 

조의석, 김병서 감독이 공동 연출한 2013년 개봉작 ‘감시자들’의 주인공은 경찰청 특수 조직인 감시반 요원들이다. 이들의 목표물은 초강력범들이다. 삼 분만에 은행을 털고, 특검 조사 대상의 서류를 탈취하면서 단서 하나 남기지 않는 무장 범죄 조직이 감시반의 상대다.

 

감시반이 사용하는 무기는 일반 경찰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감시반의 본부는 최첨단 기기를 활용해서 감시반을 지원하지만, 현장 요원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바로 그들의 눈과 머리다. 요원들은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감시용 기기의 사용을 최소화한다. 대신 개개인의 관찰력과 기억력을 이용한다. 요원들의 관찰력은 감시 카메라도 놓치는 범인을 찾아낼 정도로 뛰어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기억력이다. 마치 사진을 찍듯이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낸다. 보고 기억하는 능력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감시반이 현장에서 사용하는 관찰력과 기억력이라는 무기의 성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는 사람은 경찰대를 갓 졸업하고 감시반에 선발된 하윤주다. 그런 하윤주도 목표물이 가지고 있던 신문의 내용은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이다, ‘부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때문이다.

 

부주의 맹시는 우리가 주의를 두지 않은 대상을 지각하지 못하는 심리적 현상을 일컫는다. 황 반장은 하윤주가 목표물의 움직임에만 온 신경을 모으다 보니 신문에는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신문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농구공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고릴라 복장을 하고 이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고 생각해 보자.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이 고릴라 차림을 한 이 사람을 못 볼 수 있을까? 더구나 한눈팔지 않고 농구공을 패스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의 대니엘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이다.

 

이들은 연구 참여자들에게 세 명씩 한 팀으로 구성된 사람들이 농구공을 서로 패스하는 영상을 보여 주었다. 참여자들의 과제는 흰색 티셔츠와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두 팀 가운데 흰색 티셔츠를 입은 팀원들이 주고받은 공의 횟수를 정확하게 세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패스를 주고받는 중간에 등치 큰 사람이 고릴라 복장으로 등장해서 이들 사이를 통과한다는 것이다. 그냥 빠르게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멈춰 서서 카메라를 보고 진짜 고릴라처럼 자신의 가슴을 몇 번 두드리기까지 한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고릴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 영상을 본 사람들 가운데 50%가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영상을 보여 주어도 상당수가 고릴라를 보지 못한다. 나중에 다시 영상을 보여주면 자신이 보지 못한 고릴라가 얼마나 컸는지를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혹시 고릴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영상에 집중하지 않고 도중에 딴 짓을 한 것은 아닐까? 이들은 몇 번의 패스가 이루어졌는지를 거의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영상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눈 뜬 장님이 되는 이유

 

이 연구의 핵심은 패스의 횟수를 세도록 한 것이다. 참여자들은 두 팀 가운데 한 팀의 패스만 정확히 세려고 모든 주의를 기울여서 공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 결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대상인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이다.

 

부주의 맹시가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눈을 포함해서 우리의 감각 기관에는 수많은 정보가 접수되는데, 이 가운데 의식적으로 처리되는 것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주의는 선택적인 속성을 갖는다. 우리가 선택한 대상(농구공 패스)에 주의를 집중하면, 다른 대상(고릴라)에는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래서 눈은 뜨고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대상은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부주의 맹시는 말 그대로 우리가 눈 뜬 장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운전 중 통화가 위험한 이유

 

대부분의 사람은 감시반 요원도 아니고, 평생 눈앞을 지나가는 고릴라를 볼 일도 없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도 부주의 맹시는 일어난다. 단지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일상생활 가운데 부주의 맹시가 일어나는 가장 흔한 상황은 전화 통화를 할 때다. 통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인지적 과제다. 상대방의 질문에 답하고자 기억 속에 저장된 정보를 찾아내야 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고 순간순간 판단과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이야기의 주제가 복잡해지면 상대방의 말에 숨은 진심을 찾아내야 하고, 가끔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통화는 농구공의 패스 횟수를 세는 것보다 더 많은 주의를 요구한다. 따라서 통화하는 동안 우리의 주의는 통화에 집중된다. 그 결과, 부주의 맹시에 빠지게 된다. 눈을 뜨고 앞을 보며 운전하고 있지만, 통화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눈앞에 나타난 고릴라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길을 걸으며 통화에 집중하면 눈은 자동차를 응시하고 있어도 우리의 뇌는 내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를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

 

운전 중 휴대 전화의 사용은 사고를 일으킬 위험이 네 배 정도 증가한다. 통화 때문에 반응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초보운전자나 경험이 많은 운전자나 마찬가지다. 운전을 잘한다는 사람들조차도 휴대 전화로 통화하다가 일어난 급박한 상황에는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다. 이는 운전을 잘한다는 택시 운전기사나 고속버스 운전기사의 경우에도 운전 중 휴대 전화를 사용하면 사고가 날 가능성이 그 만큼 커진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핸즈프리(맨손통화기)를 사용하더라도 통화는 운전자의 반응속도를 늦춘다는 것이다. 휴대 전화를 손으로 쥐고 있든 아니든 간에 통화하는 것 자체가 운전자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음주 운전만큼 ‘운전 중 통화’는 위험하다.

 

마찬가지로 무단 횡단만큼 ‘보행 중 통화’는 우리에게 큰 위험을 초래한다. 이제는 운전 중 통화와 보행 중 통화의 위험성과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 전우영 -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무료 온라인 공개강좌 서비스인 케이무크(K-MOOC)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디자인한 ‘심리학 START’를 강의하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 프라이밍」, 「내 마음도 몰라주는 당신, 이유는 내 행동에 있다」 등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3월호, 전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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