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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을 전례에 사용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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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8 ㅣ No.416

시편을 전례에 사용하는 법1)


구약 성서의 시편이 교회의 성무일도에 결정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3세기부터였다. 초대 교회의 감동적인 찬미가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있고 사용되고 있는 것은 ‘글로리아 인 엑 첼시스’(대영광송)뿐인데, 그것은 동방 교회의 아침기도에 나온다. 그리고 끝기도의 전신인 ‘루체르나레’(Lucernare)라는 고대 성무일도에서 노래한 ‘기쁨의 빛’이라는 찬미가가 있는데, 그 기도 동안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등불을 켜두었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이런 찬미가들이 구약의 시편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한 것을 애석히 여기는 이도 있으리라. 고대 박해시대에 찬미가 형태로 되어 있던 기도들은 분명하고도 직설적인 언어로 예수께서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그들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그분이 이룩하신 구원의 위대함을 노래하였다. 오늘날, 주석학자들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편지 2장 6-11절을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이런 형태의 예배 가운데 한 본보기로 본다. 목덜미가 뻣뻣한 당신의 선민과 다투시는 성마르신 하느님으로 우리 정신을 점령하는 그 많은 시편들보다는, 이 신학적인 시의 걸작품이 우리의 예배와 영성생활 전체를 위해 그 의미가 비할 데 없을 만큼 풍성하고, 더 큰 영향을 주지 않는가? 성 바오로의 서간보다도 더 오래된 것일는지도 모르는 이 장엄한 찬양의 노래야말로, 예를 들어, 시편 중 가장 긴 119(118)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주지 않는가? 전통적으로 주일과 월요일의 낮기도 시간에 바치는 이 시편은 장장 176절에 걸쳐서 율법에 대한 애착이라는 단일 주제를 제시한다!


1. 시편의 전례적 사용을 위한 두 가지 분류표

처음에, 신약 성서에 의해 영감을 받은 그 아름다운 기도 본문들의 자리를 시편이 대치하기 시작했을 때, 시편을 두 분류법에 따라 배분하였다. 하나는, 그 날이나 그 축일 또는 전례시기에 따라, 예를 들면, 특히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시간경에 알맞게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다른 분류법은 그 기원이 수도승적이고 특히 밤기도에 맞추어 생각해낸 것으로서 시편의 순서를 그대로 따랐다. 이 후자의 분류표는 일반적으로 성 베네딕도가 그 당시 로마 성당들에서 전례 예절을 맡은 수도승들로부터 빌려온 배분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로 카르투시오회원들을 포함한 서방교회의 모든 수도승들은 현재까지도 이 분류를 채택하였고, 거의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황 바오로 6세를 따라, 한 주간동안 시편 전체를 바치는 성 베네딕도의 분류를 포기하고 있는 실정을 나로서는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리고 정말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공의회에도 불구하고 수도승들마저 기도의 감각, 가치, 유용성, 심지어 시간 전례기도(성무일도)까지도 의문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저 편의상 성무일도를 변경하거나 특히 짧게 하는 수도원들의 수가 놀랄 정도로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수도원이 하나 있는데 - 그것도 엄률 시토회 수도원이다 - 작년 성탄에 야과경(nocturne)이 하나 밖에 없는 밤기도를 하였으니, 시편 6개, 성서나 교부들의 글이 아니라 칼 라너에게서 따온 독서 4개, 그리고 떼 데움(Te Deum)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예들이 전 세계에 많고도 많다. 수도승들이 성무일도에 모국어를 도입할 때 그 결과로는 거의 항상 그레고리오 성가를 희생시키고, 점차적으로 그들의 부르심이 지닌 관상적 방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그들의 부르심이 세상의 이름으로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임을 잊은 채 세상과의 ‘대화’를 실천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베네딕도회원인 장 레끌레르(Dom Jean Leclercq, O.S.B) 신부는 기도에 대한 특별한 정신집중과 더불어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짐이 그 이름에 적합한 수도승 생활의 본질적 요소라고 거듭 말한다. 이 기준에 의해 판단해 보건대, 오늘날의 수도승적 수도원들은 결코 훌륭하다고 할 수가 없다. 최근에 화란에 있는 어떤 베네딕도 수도원은 예수회 신부인 칼 라너가 관상수도자들에게 준 충고를 실천에 옮겼다. 그 지도자격인 신학자는 ‘히피족’의 예를 들면서, 관상 수도승들과 수녀들에게 그 시대의 정신을 공공연히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그 당대에 대한 탁월한 섬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이 화란 수도승들은 몇 년 전에 밤기도부터 끝기도까지, 매일, 시간경 전부를 그레고리오 성가로 부르기로 결정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화란에서 뛰어난 수도원이 되었다. 화란 전역에서 그리고 심지어 국경을 넘어서까지 사람들이 그 수도원을 순례지로 방문하는데, 거기서 ‘멋지게’ 하늘스런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 ‘변화하는’ 대수도원들이 텅텅 비는 반면, 이 수도원은 성소자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2. 시편과 수도승 정신의 부흥

수도승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이들이 해야 할 최초의 과업 중 하나는 수도승들로 하여금 시편에 푹 젖게 하여 그들의 기도를 개선하는 것이라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젊은 수도승들이 시편을 기도하고 노래함으로써 참된 관상기도로 만들도록 가르치는 데 특별한 주의를 쏟아야 하리라. 나는 거의 오십년간, 밤낮으로, 그리고 가장 위안이 되는 결과를 보면서, 이런 식으로 시편을 사용한 뒤인지라, 이 점에 관해 몇 가지 제안을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구약성서의 사고방식 때문에 시편을 그리스도인의 기도서로 만드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 아드님, 바로 우리 구원의 중재자에 의해 완성된 그 구원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과거의 모든 수도승들처럼, 우리는 구약 성서 본문 안에서 그리스도의 예언과 전형(前形)을 찾음으로써 이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서 수치와 고문에 의한 죽음이라는, 겉보기에 분명한 실패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신 그분의 중심되는 신비를 찾음으로써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이 시편 본문들 안에서 현재 상태의 교회와, 종말론적인 시기의 교회의 전형이 되는 서술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우리의 최종적 운명이 그 본색을 드러낼 때, 그리고 우리의 이 시간적, 공간적 세상은, 하늘의 인간(homo caelestis)이라는 실존의 상태에, 마침내 하늘스런 생명에 소생하는 인간 실존의 상태에 길을 터주기 위해서 사라질 것이다.

시토회의 성무일도 시편들은 약간 도덕주의적인 경향을 띤 다른 적용법을 드러낸다. 수도승이 일단 시편을 사용하는 이런 방식에 투입되면, 비슷하거나 또는 아주 다른 적용 양식을 쉬 발견할 것이다.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들을, 인간에게 주는 특히 자기 자신에게 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여, 믿음의 정신으로 이 정신적 훈련에 자신을 적응시키면서, 수도승은 성령께서 이해와 음미하는 지식이라는 은총의 선물로써 자신을 비추기 시작하신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하느님의 빛이 하나의 문장 또는 이 때에는 이런 표현, 또 다른 때에는 다른 표현을 비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우리가 경건심을 위한 자양분을 발견하는 한, 정신은 완전한 자유로 그 본문을 사귀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가대는 노래나 낭송을 계속하는데, 노래를 따라 하는 가운데 그런 작은 묵상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대의 역할은 특정하지 않은 기도의 분위기와 저류를 조성하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참석자들을 감싸고 이끌어 나간다. 이 저류는 우리의 정신이 분심 중에 방황한 뒤 돌아와 다시 정신을 차릴 적마다 우리를 들어올린다. 성무일도를 바치는 데 같이 참석할 때 우리는 노래하거나 낭송하는 모든 단어와 문장을 이해하고 싶어서 분석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성 이냐시오의 방법에 따라 성무일도를 묵상적 기도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정신이 극도로 피곤해져서 아무런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한 채 곧 기운을 잃고 말 것이다. 오히려 이따금씩 어떤 특별한 생각을 잡으려고 애써야 하는데, 예를 들면, 하나의 시편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 흠숭과 찬미, 감사나 두려움, 또는 고뇌 등 그 주된 생각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와 비슷한 심성에 우리 자신을 놓아 둘 수 있다. 다른 때에는 시편이 묘사하는 그 비슷한 상황과 동료나 나라를 생각할 수 있다. 수도승의 소명은 하느님의 백성의 대변인으로서 행동하며 그들을 위해 지속적인 중재기도를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을 노래하거나 낭송하는 가운데 우리는 그 기도를 말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의 단순한 감동으로써(베이커 신부의 ‘열망’), 또는 그런 뜻으로 우리의 지향을 세움으로써, 세상과 교회를 위해 중재기도 하는 그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시편은 흔히 이스라엘 역사 중 두드러지는 사건을 길게 묘사한다: 하느님의 백성이 너무도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에집트에서의 탈출이 그것이다. 수도승이 성무일도 중에 그런 시편을 접할 때에는 교회, 즉 새로운 이스라엘인 신자들의 공동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시간의 종말에 교회를 기다리고 있는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통한 교회의 오랜 지상의 순례를 기억해야 한다. 시편이 다윗이나 일반적인 왕에 대해 말할 때는 다윗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적용시켜서 그 나라가 널리 퍼지도록 기원하는 기도로 바꿀 수 있다. 비록 그 나라가 이 현세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바로 우리 가운데에서 힘겹게 성장해 나가고 있다.

시편은, 현대의 심성으로는 너무 자주, 이스라엘의 적들이나 시편저자 자신의 적들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뿜어낸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애덕과 형제적 사랑의 법에 따라 살고 있음을 상기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교가 20세기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기주의와 탐욕을 넘어 사랑이 승리하게 하기는커녕,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온갖 완벽한 기술과 생산의 방대한 활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지구상의 훨씬 더 넓은 지역에서 존재하는 사무치는 빈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죄과가 중하다. 하루에 몇 번이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반면에,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는 국가들을 거의 도와주지 않고 있는 소위 문명화한 지역의 죄과는 매년 늘어만 간다. 성무일도 동안 그 짧은 순간에 말없이 하느님께 정신을 들어올리기 위해 저주 시편에서 어떤 생각을 끌어낼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심지어 수도승들까지도 시편의 이 난폭한 저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는 까닭은, 그 시편들을 규정할 때 그것들이 마치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기도인양 바쳐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각자 개인적인 흠숭과 중재기도를 위한 제목과 주제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관한 시편들과 구약성서 전체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준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오는 곳에서는 ‘사랑, 애덕’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충고를 따를 것이다. 성 요한 복음사가가 일깨워 주는 것처럼, 새로운 율법 하에서는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기”(1요한 4,18) 때문이다. 거룩한 교회의 신비가이자 학자의 권고를 따라 이 전환법을 응용할 때 그 시편 안에서 얼마나 계몽적인 발견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3. 기도가 점차로 단순해지기 위하여

수도승의 전례 생활은 전반적인 기도 생활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성무일도에서 시편을 사용하는 경우도 아마 그럴 것이다. 점차로 우리는 더 이상 다양한 생각으로써가 아니라 보통 우리 신심을 특별히 고취시키는 것으로 체험한 몇 개의 구절에 생각이 거듭 되돌아감으로써, 전례 기도의 자양분을 대는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때때로 마음을 찌르는 구절과 마주치거나 그런 구절을 기억하고서는 그저 흠숭, 감사, 탄원의 내적인 태도로 만족할 수도 있다.

성 토마스는, 성무일도를 낭송할 때 기도의 상대인 하느님의 현존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몰입하기까지 스스로를 내맡겨도 좋다고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 수도승은 음송의 평화로운 운율을 타고 이런 주의에 이끌릴 수 있다. 성 아우구스띠노 자신이 자주 그랬던 것처럼, 그 기도에 잠긴 감미로움 속에 멍한 채로 있어도 좋다. 나는 깊은 종교심을 지닌 단순한 한 영혼을 알고 있는데, 그녀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거행되는 주일 저녁기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다. 거기서 그녀는 첫째 시편인 시편 109 편을 바치는 동안 메시아, 왕, 사제이신 그리스도를 흠숭하였으며, 둘째 시편인 시편 110 편을 바치는 동안에는 성인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께 경배를 드렸다. 그리고 세 번째 시편인 시편 111편을 바치는 동안에는 구약의 뛰어난 의인이신 성 요셉을 공경하였다. 그리고 넷째 시편인 시편 112 편을 바치는 동안에 이 명상가는 - 수도원 바깥 세상에 살고 있지만 관상적인 영혼임에 틀림없기에 - 우리 성모님을 두고, 또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는데, 이 시편의 주제들은 그녀에게 성모의 노래(마니피깟 ‘Magnificat’)를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성무일도를 바치는 동안 시편에서 이런 식으로 영감을 얻는 명상적이고 관상적인 방법은 본문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만 있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방법은 라틴어로 성무일도를 노래하거나 음송하는 사람이 언어를 조금도 몰라도 따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사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함께 노래한다고 해서 전례기도 전체에 깔려 있는 영혼의 일반적인 느낌과 태도를 덜 표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를 생생한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저변에 흐르는 느낌들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코이노니아 제23집 164쪽, Benoit du Moustier, 백순희 젬마 마리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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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누아 뒤 무스티에(Benoi?t du Moustier) 신부는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수도승이다. 카르투시오 수도회는 1084년 성 부루노(1030~1101)에 의해 설립된 반(半) 은수생활을 하는 엄격한 관상 수도회이다. 「시편을 전례에 사용하는 법」(How to use the Psalter in Liturgy)은, Pax 1970 (Autumn/Winter), 36-41쪽에 게제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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