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5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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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아! 어쩌나: 어떤 모습으로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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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28 ㅣ No.557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26) 어떤 모습으로 죽을 것인가?

 

 

Q. 저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입니다.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배 단원들을 따라 초상집을 다니다 보니 여러 가지 모습을 봅니다. 

 

초상집인지, 잔칫집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집안이 훈훈하고 조문객도 많고 ‘호상’이란 말을 듣는 초상집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집은 대문 앞에서부터 분위기가 싸늘해서 들어가기 싫은데다 조문객도 별로 없고, 고인도 아주 불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죽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신앙인답게 편안하게 주님 품 안에 가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사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요?

 

 

A. 형제님은 참으로 신심도 깊고 자기존재감이 깊은 분인가 봅니다. 형제님 같은 분이 많을수록 교회의 역동성이 살아나리라 기대합니다. 사람이 생전에 얼마나 잘 살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손의 수와 유산의 양, 조문객 수…. 그러나 가장 정확한 기준은 죽을 때 모양새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생애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으로 평생을 자기 마음을 잘 다듬어온 분들이 죽음을 맞을 때 아주 겸허하게 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 마음을 다듬어야 할까요. 

 

자기 마음 다듬기는 ‘인생의 다섯 봉우리 넘기’라고도 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라는 분이 불치병 환자 200여 명을 대상으로 죽음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결과, 사람이 죽음을 맞이 할 때는 다섯 가지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반응은 사람이 역경에 처했을 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반응이기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반응은 ‘부정’입니다.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것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사의 오진으로 돌리거나 무슨 실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응입니다. 이 부정이란 반응은 심리적 완충장치 기능을 합니다. 즉, 죽음을 의식하지 않게 함으로써 심리적 충격을 덜 받게 하고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나마 마음의 안정감을 갖게 합니다.

 

두 번째 반응은 ‘분노’입니다. 더 이상 병을 부정할 수 없을 때 병이 비현실이나 거짓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임을 어찌할 수 없이 인정하고 난 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왜 하필 나인가’ 하는 식의 이 반응은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는 무의식적 시도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타협’입니다. 더 이상 몸부림을 치고 거부해도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협상하고자 합니다. 자기를 살려만 주신다면 어떠한 보상을 해드리겠노라, 혹은 아직은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살려주십사 하는 등 기도를 하게 됩니다.

 

네 번째 반응은 ‘우울반응’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반응이 없고 병이 진행되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신이 갖고 갈 수없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과 억울한 마음이 들고 동시에 수치심과 죄책감 등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울해하고 힘들어합니다. 이런 우울반응은 세상 애착을 끊어버려야 하는 데에 대한 아픔, 자신과 인연을 맺은 것들과 결별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 반응은 ‘수용’입니다. 몸이 지치고 마음도 허약해지고 나면 더 이상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나면, 오히려 마음의 평화로움이 찾아오고 성숙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용서를 청하고 화해하고 가진 것을 정리해 나눠주는 어른스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이 단계를 ‘최후의 성장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다섯 가지 반응을 인생의 다섯 봉우리라고 하는데 문제는 누구나 마지막 단계까지 이런 과정을 가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수없이 많은 다섯 봉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뜻대로 살려 노력한 사람만이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 가장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죽음을 선종이라고 특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형제님은 레지오 마리애를 통해 여러 가지 봉사를 하고 있고, 특히 돌아가신 이들의 여러 가지 면모를 접하시면서 자기 삶에 대해 성찰을 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고 있으니 형제님 뜻대로 주님 마음에 드는 신앙인이 되리라 믿고 선종의 은총을 얻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초심을 잃지 마시고 초지일관하시길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1년 11월 13일, 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cafe.daum.net/withdo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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