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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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나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악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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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2-12 ㅣ No.606

[레지오 영성] 나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악습입니다

 

 

악습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달콤하게 다가와 친해질 위험의 소지가 높은 악습 가운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게으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로는 달콤하게 느껴져서 더 골치가 아픈 게으름이기에 잘 파악하여 대처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곧잘 다른 것은 다 이해할 수 있지만 게으름피우는 꼴은 도무지 볼 수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자녀가 게을러서 부모님의 속이 썩어 내리고 남편의 게으른 모습에 만정이 떨어진다는 하소연을 흔히 듣는 이유이겠지요. 이렇듯 나태하고 게으르게 지낼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의 속에서 열불이 터지게 만들기 일쑤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나태가 아주 고약한 악습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름끼치는 악습에 너도 나도 젖어들고, 왜 이렇게 게으름이란 고약한 것에 쉬이 젖어들어 삶을 망치기까지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먼저 짚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나태가 우리가 생각하는 생활의 게으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께서 일깨워주시는 나태란 영성적인 것과 윤리적인 덕을 지겨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뜻하니까요. 즉 덕을 실천하기를 미루거나 덕에 따르는 수고나 어려움을 피하려는 꼼수가 곧 나태입니다. 한마디로 영혼의 게으름이지요. 그것은 영적으로 게으를 때, 분심이 생길 수밖에 없고 분심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이 계속 동요하기 때문입니다.

 

에바그리오가 이러한 상황을 상당히 구체적이고 공감되게 설명하고 있기에 그대로 옮겨 봅니다. “나태의 습관이 있는 사람은 영적인 책을 읽을 때 계속 하품을 하고 쉽게 존다. 손을 뻗고 눈은 장애를 일으킨다. 책에서 눈을 떼고 벽을 보다가 다시 책을 좀 읽다가 책을 뒤적거리고 페이지를 헤아리며 얼마 남았는지 살펴본다. 그러면서 글자체와 편집 상태를 비판한 다음 책을 덮어 머리에 배고 잠을 청하지만 그것조차 오래가지 못한다. 다른 근심거리와 함께 배고픔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태가 은총도 구원도, 성사도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하도록 만들어

 

나태, 즉 영혼의 게으름이 심각한 악습인 이유가 쉬이 느껴지시지요? 영적으로 게을러지면  성경 말씀에 대해서 거부감이 일어나게 됩니다. 복음을 실천하는 삶이 손해라고 계산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희생하려는 의지적 노력이 필수인데 그 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나태해질 때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여 마침내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거부하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됩니다.

 

결국 나태가 은총도 구원도, 성사도 필요 없는 것으로 치부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견딜 수 없는 무거움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면 생고생이라는 생각에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게 합니다. 이렇듯 나태의 삶에 빠져들면 주일미사의 의무와 단식의 의무도 귀찮아집니다. 끝내 회피하는 결과에 이릅니다. 투덜대고 그분을 외면하고 따돌리며 사랑과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삶이 불안정해지고 수다스러워지며 외적 분주함에 휩싸여 선을 권하는 사람에 반감을 품기까지 합니다. 마침내 선에 대한 증오심까지 품게 만드니 진정 무서운 악습입니다. 이렇듯 영적 나태야말로 사랑이신 그분과 아무 상관이 없이 온전한 그분의 사랑을 외면하는 처사이기에 악습 중에 가장 험한 악습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레지오 단원들은 이 사실을 두렵게 받아들여 주십시오. 알베리오네 신부가 “게으른 사람은 악마의 일을 거드는 것이니, 게으름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며 충실한 사람은 하루의 계획을 알차게 세워 기도와 결심과 성찰의 내적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빈틈없이 주의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게으름에 빠진 사람은 고작해야 가끔 반성하는 시늉만 하며 지낼 뿐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합니다. 이에 찔림을 받아 영혼을 재정비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복음 선교에 게으름을 피우며 온 정성과 온 마음을 쏟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안에만 가두어 두는 모습을, 홀로 주님의 것을 가로채 듯 묵혀 두고 있는 마음을 나태한 삶이라고 지적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꾸짖으십니다.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히브 6,11-12)고 간곡히 일러주었지요.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미온적인 영혼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자기 자신 안에 더 이상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외부로부터 그 위로의 대상을 찾게 됩니다. 내적 갈증을 채워주는 환희가 부족한 만큼 외부에서의 만족을 갈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나태한 삶일수록 재산이나 쾌락에 대한 강한 욕심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일깨웠습니다.

 

 

맨날 결심하면서도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면 깨어나야

 

하느님의 사랑은 치열합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혼신의 노력을 쏟아야합니다. 때문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언제나 도전입니다. 때문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은 싸움이며 투쟁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나태의 근성과 게으름의 관성에 강하게 맞서야 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다가가기를 미루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모든 망설임을 극복하는 용기를 줍니다. 사랑만이 두려움이라는 장애물 앞에서 주저앉지 않도록 강한 힘을 선물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성에 차지 않는다고 푸념하지 않도록 마음을 단속해줍니다. 사랑만이 언제나 옳기에 갖은 장애를 넘어 극복하도록 하여 성숙한 영혼으로 돋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기보다 두려워하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겁먹지 말고 도전하도록 합시다. 제 소견으로는 그 동안 자신의 삶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 온 딱 그만큼, 하느님의 꿈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애를 쓴다면 나태는 거뜬히 극복될 것이라 싶습니다.

 

나태는 영적 게으름이며 태만입니다. 그러기에 맨날 결심하면서도 전혀 변화되지 않고 살아간다면 깨어나야 합니다. 미사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를 빠뜨리지 않고 하느님께 합당한 예물을 바치겠다고 골백번을 결심하고,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겠다고 마음먹고 기도로 아침을 열겠다는 수만 번을 다짐했을지라도 실천하는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 실천이고 생각에 따라 생활할 때에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 요한 클리마꼬는 오래된 지병을 한 순간에 고칠 수 없는 것처럼 악습도 짧은 기간에 치유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결심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인내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영적 나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몹시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 있다는 뜻입니다. 극도로 험난한 길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나태란 ‘투쟁하고자 하는 열의가 없는’ 무료하고 지지부진한 상태를 일컫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악습은 방치하면 할수록 죄의 형태로 자라나 삶을 망가뜨릴 뿐이니까요.

 

한국의 모든 레지오 단원들이 나태한 생각을 고치게 되시길, 게으른 마음과 행위를 벗을 수 있게 되시길, 하여 진정 당신 나라를 확장시키는 용사로 우뚝 서시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그분을 모시고 성실히 노동하지 않는 게으름이 ‘악습’이듯, 그분을 모시고 쉬지 못하는 삶도 역시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지 않는 불신의 행태임을 기억하시길 당부 드립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12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부산교구 월평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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