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생활의 샘이며 길잡이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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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8 ㅣ No.415

영성생활의 샘이며 길잡이인 Lectio Divina1)


이 글의 제목은 Lectio Divina 없이는 영성생활이 불가하다는 뜻이 아니라, 역사상 글을 모르는 성인들도 있었으니까, 기도 이외에는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독서가 하느님을 만나고 또 그분에 대하여 배우는 통상적인 장소로 이해되어 왔다는 뜻이다. 기도와 이러한 독서를 통해서 하느님께 관한 어떤 것을 배웠을 때에만 일상의 경험 안에서도 그 분에 대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 기도ㆍ독서ㆍ생활 이 세 요소는 서로 내적으로 작용하며 함께 오늘로 엮어진다. 누가 만일 모든 시대 모든 환경의 모든 사람에게 맞는 엄격한 선을 그으려고 감히 시도한다면 그는 용감한 사람이리라.

나는 이 주제를 역사적으로 다루면서, 우선적으로 초세기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거기에는 실로 많은 자료가 있고,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에 도리어 어디서 시작하고 어느 것을 뽑아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다. 어떻든 나는 제대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선택을 했다. 그간 많은 이들의 연구 자료를 통해 도움을 받았으나 그중 내게 가장 크게 영감을 준 것은 위스끄 수도원의 작끄 룻쓰(Jacques Rousse) 신부님이 쓴 “Lectio Divina”(Dictionnaire de Spiritualite에 실린)이었다. 그것은 이 주제에 대한 간단한 글이니 기회가 있으면 그 글을 직접 읽기를 권하고 싶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문헌에서는 Lectio Divina가 실제로 Sacra pagina 또는 감도된 말씀과 같은 의미였다. 그것은 성서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 그 말씀에 귀 기울임을 뜻했다. 정신과 마음, 자기 전 ‘존재’로 거기에 몰두하는 ‘자세’,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맛들이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의 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복합 과정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입으로 반복하는 데, 그것은 말씀의 동화를 자극하고, 묵상과 기도를 증진시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훈련은 종종 라틴어로 meditatio scripturarum이라고 표현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주: 초기 문헌에서는 meditatio가 훈련, 연습을 의미했다). 성서를 이와 같이 읽는 방법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실천 중에 특히 두 가지 점은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유의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겸손, 둘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맛들임이다. 즉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맛들이면 말씀이 그 사람을 순화하고, 그를 선에 진보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곧 율법과 예언서의 요약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구약성서들도 이용했으며 그 책들이 계속 읽혀지고 해설되었다. 2세기말 - 3세기 초에는 Lectio Divina의 주제가 발전된 것을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실행되었으며, 오리게네스가 그 훈련의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사용한 용어들이 유대교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어 중요시된다. 특히 거룩한 독서의 행위를 묘사하는 prosechein이라는 동사가 그러하다. 특히 희랍어인 prosechein은 ‘자기마음을 돌림’, ‘어떤 것에 주의를 집중함’, ‘집중하다’, ‘유의하다’, ‘그것에 헌신하다’ 등을 뜻한다. 오리게네스의 사상에 의하면 이러한 독서는 모든 진지한 수덕의 기초이다. 거기에는 주의집중과 항구함이 요구되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독서는 차츰 그를 세상사에 대한 염려로부터 떼어놓는다.

오리게네스로부터 영감을 받은 집단은, 아침시간을 성서로 묵상하는 데 사용하였고, 식사 중에도 성서가 읽혀졌으며, 밤에 잠들기 전에도 다시 공동으로 성서를 읽었다. 오리게네스에게는 모든 지식의 기초가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데 있었다. 성서에 대한 이해는 은총으로, 때로는 아주 갑자기 주어진다. 그러나 성서읽기가 수덕의 기초이듯이 또한 착하고 수덕적인 생활 없이는 효과 있는 독서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순수하지 않은 마음에는 하느님께 대한 지식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주석에 관한 포괄적인 이론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발전되어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 어떤 이에게는 위대한 통찰력을 주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상상에로 나르도록 이끌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항구하고 겸손하게 읽는 전통을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Lectio Divina를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오리게네스의 제자들의 것으로만 보는 견해는 옳지 않을 것이다. 라틴계 서방교회에서도 우리는 중세까지 유행되어 왔던 카르타고의 성 치쁘리아노의 멋진 말을 찾을 수 있다. “sit tibi vel oratio assidua vel lectio : nunc cum Deo loquere, nunc Deus tecum”(근면한 기도나 독서가 너의 것이 되도록 하여라. 이제 하느님과 함께 말하고, 하느님께서 네게 말씀하시리라). 성 치쁘리아노는 이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부연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또 하나의 뚜렷한 지침이다. 오리게네스처럼 치쁘리아노도 보통 그리스도인 즉 평신도를 생각하며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교적 여유 있는 소수의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한 사람 또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적용할 수 있었다.

3세기말과 4세기 초에 수도승 운동이 일어났고, Lectio Divina는 수세기 동안 주로 수도승들 사이에 실천되어 왔다. 이들 수도승들 중에 성 바실리오와 예로니모는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두 분 모두, 만일 누가 성서에서 이익을 얻으려면 그 안에 머물면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성 예로니모는 기억과 마음에 대하여, 성 바실리오는 성서를 맛들임에 대하여 썼다. 이미 말했듯이 동방과 서방에서 이렇게 성서를 대하는 특징은 계속 유지되었다(사실 성무일도의 독서 후 계응송은 성서를 맛들이고 즐김에서 나온 것이다). 바실리오는 ‘수도승’이라는 용어를 자기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에게 적용시키지 않았지만 바실리오와 예로니모는 수도자였고, 예로니모는 열심한 평신도 단체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 동안 이집트의 콥트인들 가운데 빠코미오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최초의 대규모 회수도승생활이 나타났다. 빠코미오의 지도와 영감은(그의 직접적 영향이 얼마 만큼인가라는 문제는 접어두고), 발전 중에 있던 전 수도승 세계에 침투되어 있었다. 빠코미오는 자기 제자들 중에 문맹자를 용허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감도된 하느님의 말씀은 수도자의 영성생활과 기도생활의 계속적인 양식이었고, 또 장상들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여러 수준의 성서 주석 강화를 매우 중요시했다. 빠코미오와 그의 후계자들 중에 호르시에시오가 남긴 문헌들은 그들의 놀라운 성서 지식을 입증해준다. 젠나디오는 호르시에시오를 “완전히 성서 안에서 교육된 사람”이라고 했다.

빠코미오계의 수도승 운동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의 가치와 타당성을 높이 인식하고 있었다. 모든 수도승은 시편과 신약성서 전체를 암기하여 혼자서 언제나 그 말씀들을 되뇔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묵상으로 이어지는 독서이었다. 그러나 그 묵상은 계속 독서에서 자양분을 받고 지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빠코미오 자신은 성서 전체를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빠코미오의 전통은 오리게네스의 실행이나 이론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 수행의 또 하나의 증거로서 중요시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과 온유, 진리로 자기 안에 간직하면서 자신의 생활 안에 결실을 가져오는 가르침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전망으로 빠코미오 규칙은 성서의 규범들을 수도승의 생활양식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성서에 대한 의존이 너무 현저해서 빠코미오 자신의 가르침을 성서의 가르침과 하나로 보려는 경향조차 있었다.

호르시에시오의 ‘책(Liber)’ 안에는 성서묵상에 관한 주제에 대하여 20여 개의 성서인용이 있다. 수도승들은 자기들이 시간의 충만함 안에 살고 있다고 믿기에, 오히려 자연스럽게 로마서 15장 4절이 인용된다. 사실 그 구절을 인용하면 그와 관련되는 구절들도 함께 환기되기에, 로마서 15장 1절에서 13절까지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내가 대신 다 받았습니다.”라는 성서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성서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인내를 배우고 격려를 받아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아무쪼록 인내와 격려를 주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따라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다같이 한 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진실성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할례받은 사람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고 이방인들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성서에도, “그러므로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주께 찬양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리라”하였고, 또 “이방인들이여, 주님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여라” 하였으며 또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돋아 이방인들을 다스릴 분이 나타나시니, 이방인들은 그분에게 희망을 걸리라” 하였습니다. 아무쪼록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온갖 즐거움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가득히 안겨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희망이 여러분에게 넘쳐흐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실로 그것은 삶의 전 프로그램이요, 예를 들면, 성 베네딕도의 수도승 생활과 공동체 생활에 관한 성 베네딕도의 많은 사상들이 이미 그 안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견되어진 것이다.

빠코미오와 연결된 단체들의 문헌에는 많은 성서 인용과 참고 구절들이 있어 그들이 성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거기에는 자의적(字義的) 의미가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영적 의미는 자의적 의미를 파악한 다음에 따라왔다. 성서를 이해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이 「생애들」의 다양한 수정판들 안에서 보인다. 영적의미는 비유를 사용하여 해설되었으나 언제나 객관적 타당성의 정도에 맞게 적용되었다. 궁극적으로 성서 읽기에 열매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참된 수도승 안에 언제나 일하시면서 그를 비추시고 인도하신다. 성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내적 일치의 원천이요, 원리이시다. 그분이 한편으로는 거룩한 말씀의 의미를 계시해 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이 그 안에 거하는 자의 영성생활을 촉구하신다. 또 다시 우리는 로마서 7장 14절 이하의 영향을 볼 수 있다. 특히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명제 안에 로마서 13장 10절이 반영되어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첫 세대를 따랐던 위대한 수도승 성인들은 거의 모두 성서읽기와 동화(同化)를 권장하였다. 6세기에 이르러 바르사누피오나 가자의 요한과 같은 사람들은 lectio divina의 폭을 넓혀 위대한 수도승 성인들의 생애와 여러 성서주석가들을 포함시켰다. 조심성 있게 오리게네스, 디디무스, 에바그리오까지도 포함시킨 것을 볼 수 있다(그들의 가르침은 의심스러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여러 라틴 규칙서들 안에서 Lectio Divina에 대한 규정을 발견한다. 많은 경우에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 즉 아침에 하도록 배정하고 있다. 베네딕도의 규칙에는 계절에 따라 다른 독서시간과 그 양이 규정되어 있다. 성서와 더불어 교부들의 글도 언급되어 있고, 주일은 모두 독서에 바치라고 가르치신다. 까시오도로가 역사를 소개한 이래 그것이 중세 때까지 대부분 흑의의 수도원들의 한 가지 특징이 되었다. 골롬바노 규칙은 매우 간략하여 거기에는 독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서방교회에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영향력이 대단하여, 그 이후 수 세기 동안 성서독서가 잘 보존되었고, 그 위치와 목적을 유지하였다. 스마락두스(Smaragdus)는 베네딕도 규칙해설에서 이러한 독서에 관하여 세비에의 성 이시도르의 재미있는 말을 인용한다.

11세기와 12세기까지는 독서가 소중하게 실천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전례기도와 준 전례기도의 발전으로 인하여 독서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모든 흑의의 수도원들을 끌뤼니 수도원의 모조품으로 본다거나 또는 끌뤼니 제도 안에서의 모든 집이 공동기도의 지나친 확장으로 인한 동일한 압력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끌뤼니 초기에 성 오도는 ‘수도생활의 일상적인 노력이 수도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이끌어준다. 왜냐하면 그 생활은 전례나 거룩한 독서에 의해서 생기를 얻기 때문’이라고 했다. Farfenses라고 부르는 11세기 초 끌뤼니의 관습서에서 나는 봉쇄구역 안에서나 가대 안에서 11개 내지 12개의 독서에 대한 언급을 보았다. 나는 그것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시토회는 베네딕도 규칙을 더 충실히 지켜 더 건전하고 균형잡힌 생활을 하였다. 그 결과 위대한 신비생활이 꽃피고, 성서를 해설하는 장상의 강화가 다시 회복되었다. 후자의 경우는 빠코미오계의 실천으로 되돌아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성서주석에 주요 영향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오리게네스에 더 가깝다. 성 벨라도의 비유는, 그 자신의 표현처럼, 그의 청중들인 수도승들을 졸게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13세기에 ‘대학’ 수도승들이 출현하면서 전통적 지혜인 Lectio Divina가 차츰 소멸되어 갔다.

11세기, 12세기에는 백의의 수도승이나 흑의의 수도승이나 모두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수도승적 삶의 기본적인 영감을 성서독서로부터 받았다. 어떤 교우들과 그들의 주석에서, 예를 들면 성 티에리의 윌리엄이나 성 벨라도의 경우에는 오리게네스에게서 영향받았다. 예를 들면, 그것은 다름의 ‘영역’으로부터 닮음, 비슷함의 영역으로 돌아감에 관한 주제였다. 그것은 하느님의 모상과 닮음에도 창조된 인간상태에 관한 성서와 아우구스띠노의 주제와도 관련된다. 모상은 성삼의 인(印)을 영혼위에 받기 위한 적성을 뜻하며, 닮음은 이것이 실현되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윌리엄은 성 벨라도와 같이 모상(imago)을 역동적이며 심리적인 것으로 보았기에, 그것은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가 보는 고정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개념과는 다르다. Lectio Divina를 이렇게 위험한 바닷가로까지 끌어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마치는 것이 더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결론적 요약

여러 저자들 간에 다음과 같은 점에 의견이 일치한다.

1. 우리는 성서를 Lectio Divina의 첫째 대상으로 생각한다.
2. 성서는 우리에게, 나에게, 지금 여기서 하시는 말씀이다.
3. 성서 안에는 언제나 쉽게 알아들을 수는 없는,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4. 성서의 자의적 의미와 영적 의미
5. 성서의 참 뜻을 이해하는 것은 성령의 선물이다.
6. 성서가 열매 맺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요구된다.
7. 성서가 열매 맺으려면 성서를 맛들여야 한다. 침묵과, 그 외에 자기와 관련된 일들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맛들인 성서는 우리 마음과 삶의 변화를 도와줄 것이다.

(코이노니아 제11집 17쪽, Gerard MacGinty, O.S.B, 최 안젤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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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틴어 Lectio Divina는 내용상 포괄적이어서 여기서는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래도 라띤어를 쓰고 있다. 이 용어는 역사적인 용어이면 “lectio spiritualis”(영적 독서)라는 말과도 혼용되며, 베네딕도회에서 나름대로 사람에 따라 각기 번역하여 쓰고 있다. 이 기회에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힌다면, “聖讀”이란 말을 만들어 쓸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아일랜드의 글렌스탈 수도원(Glenstal Abbey)의 수도승. 이 논고는 아일랜드의 베네딕도회와 시토회의 학술모임인 “Imago”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Cistercian Studies, 1986년 1월호에 “Lectio Divina : Fount and Guide of the spiritual Life”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것이다.

[출처 : 코이노니아 선집 5 기도와 전례, 2004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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