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종교철학ㅣ사상

철학 에세이: 행복이란 말에 어울리는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3 ㅣ No.104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4]

행복이란 말에 어울리는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뭐가 의미 있나 뭐가 중요하나 정해진 길로 가는데 / 축 처진 내 어깨 위에 나의 눈물샘 위에 / 그냥 살아야지 저냥 살아야지 죽지 못해 사는 오늘 / 뒷걸음질만 치다가 벌써 벼랑 끝으로 / 어차피 인생은 굴러먹다 가는 뜬구름 같은 / 질퍽대는 땅바닥 지렁이 같은 걸 / 그래도 인생은 반짝반짝하는 저기 저 별님 같은 / 두근대는 내 심장 초인종 같은 걸, / 인생아”(옥상달빛, ‘하드코어 인생아’).

“행복은 오락 속에 깃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 행복한 삶은 덕스러운 삶을 말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 6장).


좋은 삶, 행복 그리고 인생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좋은 삶’으로 정의합니다. 행복에 관해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좋은 삶의 ‘기준’을 되도록 명료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그는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 한 가지 분명한 출발점을 두는데 그것이 바로 매일의 삶을 인생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은 지금 눈앞에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 과거의 삶의 역사, 미래의 전망, 삶의 궁극목적을 아우르는 ‘인생 전체’라는 지평에서만 의미 있게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삶의 사건들에 대한 즉각적 반응과 해석에 제한되지 않는 이러한 지평은 당연히 꽤 높은 차원의 성찰력과 반성력을 통해서만 얻어집니다. 그래서 좋은 삶을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존과 생명의 관점과 관련된 ‘조에’라는 그리스 단어가 아니라 품위 있게 자신을 도야해 온 인간의 전 생애를 가리킬 수 있는 ‘비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과 관련해서 말하는 인생은 단순히 순간이 긴 시간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련하고 활동하여 마침내 인간의 궁극적 목적에 다다른 역동적인 완성의 여정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행복을 생각하는 것은, 한 인간의 인생을 생존의 영역과 구분되는 좋은 삶이라는 규범적 이상을 통해 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과 좋은 삶의 상관관계에 대해 분명하고도 섬세하게 추적해 가는 것을 보면서 감탄하고 머리로 납득하지만, 무엇인가 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나 일종의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하는 실제의 삶이 철학자에게서 배우게 되는 성찰을 통한 품격 있는 인생의 한 장면이라기보다는, 한 치 앞을 알기 어려운 거칠고 절실한 생존의 영역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삶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시간만이 인생은 아닙니다. 인생 안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듯, ‘벌거벗은 존재’로서 살아남고자 투쟁하고 고통을 견디며 인생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좋은 삶으로서의 행복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인생은 언제나 그 심연에 살고자 하는 생명의 절실함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 - 살아내는 것, 살아남는 것

‘인생’이라는 말은 자주 우리의 ‘심간’에 파문을 일으키며 ‘미혹’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고작 두 음절의 이 짧은 단어를 혼자 앉아 천천히 발음해 보면, 갑자기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뒤엉켜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회에 젖는 이유입니다.

이 낱말을 담담함과 단순한 긍정에서 말할 수 있는 이라면, 다른 모든 외적 기준과 상관없이 이미 좋은 인생을 살아온, 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훨씬 많은 이에게 인생이란 말은, 단순한 기쁨이나 우아한 관조이기 이전에 고뇌와 처절함의 상흔이 어린 생존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현실에서 인생은 ‘좋은 삶’의 성찰과 실천의 아름다운 결실 이전에,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절박함 속에서 견뎌내고 살아낸 시간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동서와 고금의 성현들이 밝혀낸 인생에 대한 아름답고 영롱한 지혜를 대할 때 감탄하면서도, ‘그들의 인생은 왜 나의 인생과는 이리도 다른가!’ 하고 탄식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삶이라는 기준에 나의 인생을 비추어보며 부끄러워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인생을 살아낸 것이, 생존 투쟁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킨 것이,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살아남는 것’ 자체의 소중함과 가치를 말해주는 이를 만날 때 한없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꽤 여러 해가 지났지만 제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죽음을 안겨다 줄 수 있는 문화와 기술의 시대에서 ‘살아남아라.’라는 단순하지만 엄숙한 가르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 해 전에 읽은 뛰어난 두 편의 중국 소설들을 통해, 곡절 많은 인생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현대 중국의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위화의 「인생」이라는 소설입니다(중국의 대표적 영화감독 장예모가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 푸구이가 파란만장하고 쓰디쓴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작품은 위화보다는 한 세대 앞선 작가 모옌의 대작인 「인생은 고달파」입니다. 천 쪽이 넘는 이 소설에서 저자는 구비문학적 향기가 가득한 입담으로, 주인공 서문뇨가 현대 중국의 격동의 50년을 관통하여 견뎌내고 ‘살아내는’ 인생길을 슬픔과 해학, 설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냅니다.


절실하게 좋은 삶을 생각한다는 것

위화와 모옌의 소설은 살아남는 것 자체의 고귀함을 예찬하고 응원하고 위무합니다. 그런데 살아남음을 정말로 진실하고 절절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좋은 삶에 대한 절실한 갈망을 말없이 전합니다.

인생이 살아내는 것, 견디어내는 것, 살아남는 것이라는 무거운 진실을 외면하는 철학과 사상은 공허한 말잔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좋은 삶이라 말하는 것은 생존의 시간과 격리된 곱디고운 순수한 사유의 결과만이 아니라 오히려 절실한 마음의 일이어야 합니다.

또한, 좋은 삶을 바라고 묻는 것이 인생의 고통을 잊는 한순간의 위안의 방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결심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살아남음의 장함’은 결국은 좋은 삶의 길에서만 충만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납득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탐구하는 여정에 절실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설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생존의 시간의 무게와 좋은 삶의 절실함을 아는 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정발산 본당 주임으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4월호, 최대환 세례자 요한]


2,52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